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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호장공은 박혁거세의 혈손으로 전하고있은나 상계가 실전되어 정확한 계대룰 알수없다 고려 고종때
반남현호장을지냄
戶長公 복장속전 전설에 의하면 호장공이 돌아가시니 급제공이 동읍의 風水客을 초청하였다. 한곳을
가리키며 <여기가 可히 쓸만하다> 하고는 돌아가는데 급제공이 가만히 그뒤를 미행해서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알아 보았다.
풍수객이 자기집에 가서 처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늘 박씨의 묘터를 잡았으나 그것은 큰 버드나무 밑만 같지 못한 이곳이 제일이고 박씨
터는 第二 이다>고 하니 그의 처는 <박씨가 평소에 당신을 후대했는데 어째서 힘껏해주지 않는가> 한 즉 風水客은
<나도 박씨의 은혜를 잊은 것은 아니나 만약에 버드나무 밑에 쓴다면 내게 해가 돌아올 것이니 그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하였다.
그것을 급제공이 몰래 듣고 돌아와서 장사때가되어 광지를 버드나무 밑으로 파나깄다. 풍수객이 왔다가 크게 놀랐으나 말릴수가 없음을
알고 그는 <꼭 이땅에 장사를 지내려거든 내가 집에가지 돌아간뒤에 광지를파야지 그리하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고 사과하였다.
그리하여 풍수객이 떠나간뒤에 급제공은 괴이하게 여기며 오히려 믿지않고 바로 삽을 가지고 땅을 파니 큰벌이 광지에서 나와 그 풍수객을
따라가서 집에 도착하기 전에 대뇌를 쏘니 반령에서 죽었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그 지방에서는 그곳을 봉현(벌고개)이라고 한다.
(답사여행 길잡이 5 -- 전남(全南)편 - 돌베게 출판사 137쪽) 신촌리 자미산에는 백제때 산성이이었다
그리고 그옆의 벌고개를 넘으면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진 반남박씨 시조 박응주의 묘가 있다. 박응주의 묘는 벌명당으로 불리는데 사연은
이러하다. 고려말 이곳 신촌리 성내 마을에 사는 박응주가 죽자 그의 아들 朴宜가 지관에게 명당자리를 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지관이 명당을
찾아다니다가 벌고개 넘어에 천하에 명당자리를 발견했으나 그땅에 묘를 쓰면 지관 자신이 죽는 자리였다 하여서 지관은 그 자리를 숨기고 다른곳을
잡아 박의에게 알렺주었으나 행동을 수상히 여긴 박의가 닥달을 하자 할수없이 그 자리를 알렺주게 되었다 박응주의 묘를 쓰는 도중 그속에서
땅벌이 나와 지관을 쏘아 죽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 묘를쓴 반남박씨 집안은 날로 번성 했고 조선시대들어서는 정승 판서가 수없이 배출
되었다 고려말 이성계에 협력한 덕에조선 시대에 들어서 명문의 위치를 굳힌 반남박씨지만 당시나 지금의 사람들은 묘지를 잘쓴 덕분이라고 하며
묘로 가기위해 넘는 고개를 벌고개 박응주의 묘자리를 벌명당이라고 부른다 (호장) 향직(鄕職)의 우두머리. 고려 초에 신라
때부터 지방에 세력을 펴고 있던 성주(城主)나 호족(豪族)을 그대로 포섭하여 호장?부호장의 향직을 준 데서 부터 시작되었으며, 지방자치에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983년(성종 2)에 고려 태조 때의 당대등(堂大等)을 호장, 장대등(長大等을 부호장이라 고쳤으며, 목종 때는 호장으로
70세가 넘으면 안일(安逸)에 속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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