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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복-동량-미-세교-태두-필하-사익-대원-상로-海壽-齊堂-元陽-泳孝-일서-찬주(영친왕 아들 李?)贊汎 본관
반남. 자 자순(子純). 호 춘고(春皐)?현현거사(玄玄居士). 초명 무량(無量). 수원 출생. 판서 원양(元陽)의 아들. 13세
때 철종의 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결혼하여 금릉위(錦陵尉)가 되고, 유대치(劉大致)를 중심으로 김옥균(金玉均)?홍영식(洪英植)?서광범(徐光範)
등 개화당 요인들과 결속, 정치적 혁신을 주창하며, 일본의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간섭과 러시아의 침투를 억제하는 데
주력했다. 1882년(고종 19) 수신사(修信使)에 임명되어 민영익 ?김옥균 등과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개혁을 시도했으나
민태호(閔台鎬)?김병시(金炳始)?김병국(金炳國) 중심의 수구파의 집권으로 실패하였다. 이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서 개화당 요인들과 협의,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郵政局) 청사의 낙성연(落成宴)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신내각이
조직될 때 친군전후영사겸좌포장(親軍前後營使兼左捕將)이 되어 군사와 경찰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삼일천하(三日天下)로 그쳐, 역적으로 몰려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5년 잠시 도미(渡美)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야마자키[山崎永春]로 개명하고 메이지학원[明治學院]에 입학, 영어를 배우고,
유학생들의 기숙사로서 친린의숙(親隣義塾)을 경영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죄가 용서되어 귀국, 제2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에서 김홍집
?박영효의 연립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내무대신으로 있으면서 자주적 개혁을 꾀하였으나 1895년 반역음모사건으로 재차 일본에 망명했다.
1898년 중추원 회의에서 그를 정부요직에 다시 기용하자는 건의가 나올 정도로 영향력이 컸고 이런 움직임을 반대파에서는 박영효
대통령설을 유포시켜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는 데 이용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정치적 변동은 친일 세력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1907년 오랜 망명생활 끝에 다시 귀국, 궁내부대신(宮內部大臣)에 임명되었다가 고종의 양위에 앞장선 대신들을 암살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1년간 제주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국권피탈 이후 일제의 한국인 회유정책으로 주어진 후작(侯爵)을 받았으며 1918년에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이사에 취임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사 초대 사장, 1926년 중추원의장, 1932년 일본귀족원의원을 지냈으며,
1939년 중추원 부의장에 있을 때 죽었다. 저서에 《사화기략(使和記略)》이 있다. 궁내부대신(宮內部大臣) 1894년(고종 31)
7월 갑오개혁을 단행한 조정은 근세왕조 최초의 칙령 제1호로 건국 초기 이래 500년을 이어온 통치기구를 개혁, 서정(庶政)을 총할하는 의정부와
왕실사무를 총할하는 궁내부로 2원화하여 궁내부 대신을 의정부 총리대신 다음의 서열로 정하였다. 궁내부에는 대신·협판(協辦:차관) 각 1명,
참의(參議)·주사(主事) 각 3명, 위원 5명을 두고, 승선원(承宣院)을 비롯한 원(院)·각(閣)·사(司) 등 15개 부속기관을 관장하였다.
그러나 궁내부는 이듬해의 을미개혁(乙未改革)에 따라 다시 기구를 개편, 내사과(內事課)·외사과(外事課)·대신관방(大臣官房)과
특진관(特進官:勅任官) 16명 등을 두고, 왕태후궁(王太后宮)을 비롯한 각 궁(宮)·서(署) 및
시종원(侍從院)·비서감(秘書監)·규장원(奎章院)·회계원(會計院)·내장원(內藏院)·제용원(濟用院)과 18개 사(司)를
관장하였다.
박영효(朴泳孝) 1. 개화당 조직 1872년(고종 9)철종의 부마가 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별하였다.
금릉위(錦陵尉)정1품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에 봉해졌다. 큰형을 따라 박규수(朴珪壽)의 사랑을 출입하면서
오경석(吳慶錫)?유대치(劉大致)?이동인(李東仁) 등 실학, 특히 북학파(北學派)의 학맥을 이은 개화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 1879년경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 등과 개화당(開化黨)을 조직하였다.
2. 일본견문과 개화시책 1882년 9월 임오군란의
사후수습을 일본정부와 협의하기 위하여 특명전권대신 겸 제3차수신사로 임명되어 종사관 서광범 등 14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일본으로
갔다. 그곳에 약 3개월간 체류하면서 일본정계의 지도자 및 구미 외교사절들과 접촉하여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한편, 명치일본(明治日本)의
발전상을 살펴보았다. 이때 항해하는 배 위에서 태극사괘(太極四卦)의 국기를 제정, 일본에 도착한 직후부터 사용하였다. 1883년초
귀국한 뒤 한성판윤에 임명되어 박문국(博文局)?순경부(巡警部)?치도국(治道局)을 설치하여 신문발간과 신식경찰제도의 도입, 도로정비사업,
유색의복(有色衣服)장려 등 일련의 개화시책을 폈다. 그러나 민태호(閔台鎬)?김병시(金炳始) 등 수구파의 반대에 부딪혀, 삼국(三局)은
폐쇄되고 광주유수 겸 수어사(廣州留守兼守禦使)로 좌천되었다. 이때 수어영에 연병대(鍊兵隊)를 신설하여 신식군대의 양성에 주력하였다. 다시
수구파가 이를 문제삼음으로써 같은해 12월 사임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으로 《한성순보 漢城旬報》의 창간을 볼 수
있었다.
3. 갑신정변과 망명 이처럼 정계진출이 계속 좌절되자, 1884년 2월 미국유람을 계획하였으나, 이 계획 역시
좌절되었다. 이때 개화당 인사들이 정권장악을 기도하자 이에 가담하여 먼저 미국에 협조를 얻고자 접촉하였으나 미국은 불응하였다. 다시 일본에
접근하여 여러 차례의 협의 끝에 군사적 지원을 확약받고, 같은해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켜 친청수구파(親淸守舊派)를 숙청하고 혁신내각을 수립하여
전후영사 겸 좌포도대장(前後營使兼左捕盜大將)직을 맡아 병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청국군의 즉각적인 개입으로 정변이 삼일천하(三日天下)로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뒤 본국정부의 집요한 송환기도와 일본정부의 냉대로 1885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곳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되돌아와 야마자키(山崎永春)로 이름을 고친 뒤 명치학원(明治學院)에 입학, 영어를 배우면서 미국인 선교사들과도 친분을
맺었다.
4. 개화상소 1888년초 일본에 있으면서 고종에게 국정 전반에 관하여 13만여자에 달하는 장문의 개혁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이른바 ????개화상소(開化上疏)???? 혹은 ????건백서(建白書)????이다. 이 상소문에서 봉건적인 신분제도의 철폐, 근대적인
법치국가의 확립에 의한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주장하였다. 여기에 그의 개화정치에 대한 이상이 설계되어 있으며, 그뒤 그가 시행한
개혁정치는 그것의 실천이었다고 볼 수 있다. 1893년말 후쿠자와(福澤諭吉) 등 일본 조야(朝野)의 유력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동경에
친린의숙(親隣義塾)이라는 사립학교를 세워 유학생들의 교육에 힘을 썼다.이때 조선정부의 밀명을 맡고 이일직(李逸稙) 등이 박영효를 암살하고자
친린의숙에 잠입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5. 귀국 후의 정치활동 1894년 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계기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정부의 주선으로 그해 8월 귀국하였다. 그뒤 조선정부에 친일세력을 부식하려는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의 지원을 받아 수립된
제2차김홍집내각의 내부대신으로 입각하였다. 1895년 삼국간섭으로 일본세력이 퇴조하자 불안을 느껴 이노우에의 권고를 무시하고 김홍집파를
내각에서 퇴진시킨 뒤 독자적으로 제2차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시기에 중점적으로 추진하였던 개혁은 근대적인 내각제도의 도입, 지방제도의
개편, 새로운 경찰?군사제도의 확립 등이었다. 이러한 개혁을 통하여 조선의 부국강병을 도모하는 한편,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왕실과 이노우에공사로부터 배척당하고 1895년 7월 역모를 음모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뒤
상소를 통하여 자신의 역모 혐의의 부당함을 고종에게 호소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1898년에 접어들면서 독립협회(獨立協會)가 강력한
정치단체로 부상함에 따라 본국에 이규완(李圭完)?황철(黃鐵)?이정길(李鄭吉) 등의 심복을 밀파하여 독립협회와의 제휴를 통한 자신의 정계복귀를
기도하였다. 그 결과 독립협회의 신진소장파가 중심이 되어 그의 소환서용운동 (召喚敍用運動)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고종과 수구파대신들은
오히려 이를 구실로 독립협회를 해산시켜버렸다. 이렇게 되자 1900년 7월 본국에 밀파되어 있던 이규완일행에게 의화군 강(義和君堈)을 국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쿠데타 음모를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 음모도 사전에 발각됨으로써 그의 정계복귀공작은 실패로 돌아갔고, 궐석재판결과 교수형이
선고되었다. 1907년 비공식으로 귀국하여 부산에 체류하다가 상경, 궁내부고문 가토(加藤增雄)와 접촉, 공작하여 고종의
특사조칙(特赦詔勅)을 제수받았을 뿐 아니라 성대한 환영식과 연회로 정계복귀를 할 수 있었다. 이어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궁내부대신에
임명되어, 통감 이토(伊藤博文)와 이완용(李完用)내각의 고종 양위압력을 무마시키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순종이 즉위한 뒤 군부(軍部)내의
반양위파(反讓位派)와 통모, 고종의 양위에 찬성한 정부대신들을 암살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1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6. 합방 후의
행적 국권이 늑탈된 뒤 일제가 회유정책의 일환으로 수여한 후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1911년 조선귀족회회장, 1918년 조선은행이사를
역임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뒤 일제의 이른바 문화통치에 순응하여
유민회(維民會)?동광회(同光會)?조선구락부(朝鮮俱樂部)?민우회(民友會) 등 친일 내지 개량주의적 단체와 관계를 맺는 한편, 1920년 동아일보사
초대사장에 취임하였다. 1926년 중추원의장, 1932년 일본귀족원의원을 지냈으며, 1939년 중추원부의장 재직중 죽었다. 저서로
《사화기략 使和記略》이 있다.
친일개혁파의 지도자 <한국역사 인물사전> 철종의 사위로 친일
개혁파의 지도자인 김옥균과 함께 개화당을 만들었다. 고종19년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왔고 한성판윤으로 개화파 요인들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실패한 뒤에 일본에 망명하여 일본과 미국의 정치 제도를 시찰했다. 갑오경장 뒤 귀국하여 김홍집 내각 때 내부대신이 되었으나 고종폐위 사건에
휘말려 다시 일본 에 망명했다. 이완용 내각 때는 궁내부대신에 임명되었고 .한때 제주도에 유배된 적도 있었다. 한일 합방 뒤 일본으로 부터
후작 작위를 받고 중추원 고문과 일본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그 뒤 한때 동아일보 사장을 지냈다. 일제가 한일합방당시. 이른바 합방공신들에게
남발하였던 작위란 본디 나라에 공를 세운 사람의 신분을 높여조기 위해 주던 명예의 칭호를 말한다. 중국 당 송나라레서 고 후 백 자 남
의5둥급 으로 나워준것에서 비롯 되었다. 우리나라는 고려 시대에 한때 이 제도를 채택한 적이 있었으나 봉군 제도로 바뀌었고 조선시대에는 부원군과
군 등 봉군 제도가 굳어 졌다;
태극기와 박영효 한국을 떠나 낯선 외국 땅에서 태극기를 본 순간 가슴 뭉클한 감정은
말로 표현 할 수없을만큼 가슴 뿌듯함을 느끼며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포근함을 느끼는데,그나 라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국기인
『태극기』이다 우리나라는 운양호사건(1875년)을 계기로 국기의 제정이 조정에서 거론 되었는데, 1882년(고종19) 8월 특전권대사겸
수신사(修信使) 박영호(朴泳孝)가 일본에 갈 때 당장 게양할 국기가 있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조정에서 구상되고 논의된 바 있는 도안내용을 다소
수정하고,태극 사괘의 도안이 그려진 旗를 박영효가 타고간 일본선박 "메이지마루" 에서 창제 하여 박영효가 일본에 도착하여 숙소 건물 옥상에 배
안에서 만든 태극사괘가 그려진 기를 게양 하였으며 이것이 『태극기』의 효시이다. 박영효가 창제하여 사용하였던 것을 1883년(고종20)
정식으로 채택 공포 하였다.한편태극기 도형,사괘,태극의 위치 등 통일성이 없어서 1949년 3월25일 문교부의 심의위원회를 설치,음양(陰陽)과
사괘(四卦)의 배치 안을 결정 오늘에 이르렀다. 태극기의 사상은 우주의 생성(生成) 원리를 상징한 것이며,적색은 존귀(尊貴).태양을
의미하고,청색은 남성.희망을 뜻하는 것이다. 사괘는 건(乾.하늘) 감(坎.달) 곤(坤.땅) 이(離.태양)로 태극기 전체로는 평화.만인.
창조.광명.무궁을 상징하고 있다. 태극기는 우리나라가 세계에 으뜸가는 국가로 무궁하게 발전할 것은 물론, 깊고 높은 뜻이 담긴 태극기를
자랑 스럽게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아끼고 사랑 해야한다. 태극기를 창안하여 사용한 박영효(朴泳孝 1861 - 1939)는 조선 말기의
정치가로, 반남박씨24세손이며, 초명은 무량(無量). 자는 자순(子純), 호는 춘고(春皐). 현현거사(玄玄居士), 수원출신.판서 원양(元陽)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다. 1872년(고종 9)철종의 부마가 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별하였다. 금릉위(錦陵尉) 정1품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에 봉해졌다. 큰형(泳敎 1849-1884)을 따라 박규수의 사랑을 출입하면서 오경석(吳慶錫). 유대치(劉大致).
이동인(李東仁) 등 실학, 특히 북학파(北學派)의 학맥을 이은 개화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 1879년경 김옥균(金玉均). 서광범(徐光範) 등
개화당開化黨을 조직하였다 1882년 9월 임오군란의 사후수습을 일본정부와 협의하기 위하여 특명전권대신 겸 제3차수신사로 임명되어 종사관
서광범 등 14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일본으로 갔다.그곳에 약 3개월간 체류하면서 일본정계의 지도자 및 구미 외교사절들과 접촉하여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한편, 명치일본(明治日本)의 발전상을 살펴보았다.. 1883년초 귀국한 뒤 한성판윤에 임명되어 박문국(博文局). 순경부(巡警部).
치도국(治道局)을 설치하여 신문발간과 신식경찰제도의 도입하였고, 도로정비사업, 유색의복(有色衣服)장려 등 일련의 개화시책을
폈다.
<고종순종실록> 고종 009 09/02/22(병자) / 영혜 옹주의 부마로 박영효를 정하다
지시하기를, ????영혜 옹주(永惠翁主)의 의빈(儀賓)으로 전 도사(前都事) 朴元陽의 아들 朴泳孝로 정하니 해당
조에서 시행하게 하고 그밖의 사람들은 다 혼인을 하도록 허락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종 009 09/09/01(임오) / 영의정,
호조 판서가 돌려가며 대비전을 특별 당직 서게 하다 》 또 지시하기를,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은 대비전에 특별
당직을 설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종 015 15/05/13(임술) / 국장 도감에서 하현궁 명정 서사관(下玄宮銘旌書寫官)은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로, 으로 제의하여 임명하였다. 고종 015 15/05/22(신미) / 빈전 향관으로 윤의선?박영효?김병주
등을 임명하다 고종 018 18/08/09(무진) / 박영효를 판의금부사로 임명하다 고종 019 19/06/11(을축) /
이경응?이승응?이재면 등을 종친 집사로 임명하다 고종 019 19/07/25(기유) / 박영효를 일본 수신 대사로, 김만식을 부사로
임명하다 고종 019 19/12/29(신사) / 박영효(朴泳孝)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임명하였다 고종 021
21/10/17(무자) / 민영익이 우정국낙성식에서 피살되고 김옥균 등이 일본 공사에게 원조를 청하다 이날밤 우정국(郵征局)에서
낙성식(落成式) 연회를 가졌는데 총판(總辦) 홍영식(洪英植)이 주관하였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에 담장 밖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이때
민영익(閔泳翊)도 우영사(右營使)로서 연회에 참가하였다가 불을 끄려고 먼저 문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밖에 어떤 여러 명의 흉도凶徒)들이 칼을
휘둘러 맞받아치는 바람에 민영익(閔泳翊)은 칼을 맞고 대청 위에 돌아와서 쓰러졌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흩어지자
김옥균(金玉均)?홍영식(洪英植)?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 등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궐 안 침전(寢殿)으로 곧바로
달려들어가서 변고에 대하여 급보를 올리고 빨리 자리를 옮겨 변고를 피할 것을 청하였다. 그래서 임금이 경우궁(景祐宮)으로 거처를 옮겨가 각
전(殿)과 궁(宮)도 황급히 도보로 따라갔다. 고종 021 21/10/18(기축) / 박영효(朴泳孝)를 전후영사(前後營使)로
임명하였다. 고종 021 21/10/20(신묘) / 당시 도성(都城) 안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일본 사람들을 밉게 보아 만나기만
하면 때려서 많이 살상하였다. 일본 공사(公使) 죽첨진일랑[竹添進一郞, 다케조에 신이치로]은 군사를 거느리고 거류민을 보호하여
도성(都城) 밖으로 나갔고,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서재필(徐載弼) 및 사관학교(士官學校) 생도(生徒) 10여 명은
다 일본 공사관(公使館)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고 몰래 인천항(仁川港)에 가서 곧바로 일본으로 도망쳤다. 고종 021
21/11/01(신축) / 김옥균 등의 가족들의 벼슬을 모두 박탈하다 》 이조(吏曹)에서 아뢰기를,
박영효(朴泳孝)의 아버지인 대호군(大護軍) 박원양(朴元陽), 형인 사사(司事) 박영호(朴泳好), 에 대하여 모두 관직을 박탈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고종 030 30/08/26(을해) / 정언 김만제가 권봉희, 안효제, 어윤중, 장병익에 대한
엄격한처벌을 제의하다 정언(正言) 김만제(金萬濟)가 상소를 올렸는데 그 요지는 이러하였다. 어윤중(魚允中)에
대하여 말하면 그는 갑신년(甲申年) 변란의 네 흉악한 역적 중에 포함된 박영효(朴泳孝)의 아비 시체와 형의 시체를 그가 다 맡아
처리하였고 고종 032 31/08/04(무신) / 박영효의 죄명을 삭제하라고 지시하다 》 지시하기를, ????지난 날의
박영효(朴泳孝)의 문제는 그 나타난 사실을 논한다면 누구인들 죽여야 한다고 말하지 않겠느냐 마는 그의 마음을 살펴보면 사실 용서할
만한 점이 있다. 이제 신소장을 보니 10년 동안 떠돌아 다니면서 그래도 나라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그의 죄명을 특별히 지워버려
조정의 관대한 뜻을 보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종31/11/13(을유) / 홍순목, 박원양 등에게 벼슬을 회복시키고 박영효에게는
임명장을 돌려주고 갑신년 죄인들의 죄를 전부 취소하라고 지시하다 》 지시하기를, ????죽은 판서(判書)
박원양(朴元陽)에게 모두 벼슬을 회복시킬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지시하기를,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에게
임명장을 돌려주는 동시에 죄를 벗겨주고 다시 등용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종 032 31/11/21(계사) / 칙령 제1호에서
제8호까지 보고하다 제4호에서는 박영효(朴泳孝)를 내무 대신(內務大臣)으로, 고종 032 31/12/17(기미) / 총리
대신 등이 왕실의 존칭을 만들어 제의하다 》 내무 대신(內務大臣) 박영효(朴泳孝), 학무 대신(學務大臣) 박정양(朴定陽),
고종 033 32/02/10(임자) / 농사 피해 지역에 조세를 감면해 주도록 하다 》 내무 대신(內務大臣)
박영효(朴泳孝), 탁지 대신(度支大臣) 어윤중(魚允中)이 제의하였다. 고종32/04/01(임인) / 김홍집, 김윤식, 박영효, 어윤중,
조희연, 서광범, 박정양, 김가진을 임명하다 》 정1품 박영효(朴泳孝)를 내부 대신(內部大臣)으로, 종1품
박정양(朴定陽)을 학부 대신(學部大臣)으로, 고종 32/04/27(1895) 내부대신(內部大臣) 박영효(朴泳孝)에게 내각 총리
대신(內閣總理大臣)의 사무를 대리하라고 지시하였다 고종 32/05/08(무인) / 총리 대신(總理大臣) 박정양(朴定陽)과 내부
대신(內部大臣) 박영효(朴泳孝)를 불러서 만나 보았다(1895 고종 44/06/11(양력) / 박영효를 석방할 것을 지시하다
》 지시하기를, ????지난 을미년 여름에 박영효(朴泳孝)를 엄하게 신문해서 죄를 정하라는 내용으로 지시를 내렸고
광무(光武) 4년 음력 섣달에는 역시 법맡은 관청에서 그것을 선포하였다. 후에 알고보니 그 사건은 매우 명확하지 못한
것으로써 해명하지 않아도 저절로 근거가 없는 상태로 돌아갔다. 朴泳孝를 특별히 석방함으로써 죄를 깨끗이 벗겨주는 은전을 보여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종 44/06/13(양력) / 금릉위 박영효에게는 임명장을 돌려주다 》 고종 048
44/06/23(양력) / 박영효에게 집 한 채를 주고 녹봉은 정1품 종친의 규례대로 주게 하다 》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극(李載克)이 제의하기를,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가 지금 이미 등용되었습니다. 영혜 옹주(永惠翁主)가 궁방을 절수(折受)받는
것은 규례대로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각 궁방을 떼주는 것은 모두 폐하 일가의 벼슬 품계와 녹봉을 가지고 시행합니다. 이번에도
정해진 규례대로 제도국(制度局)에서 첨가해 넣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승인하였다. 또 제의하기를,
????영혜 옹주의 신위가 양주군(楊州郡) 평구(平邱)지방에 있다고 합니다. 가져다 모시지 않을 수 없는데 해당 궁에 현재 모실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지시하기를, ????제 1구(區)를 줄 것이다.???? 또 제의하기를, ????금릉위
박영효(朴泳孝)의 녹봉을 마련해야 하겠는데 관제가 전과 다르니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지시하기를, ????정1품 종친 규례대로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종 048 44/07/17(양력) / 박영효를 궁내부 대신으로 임명하다 순종
00100/07/25(양력) / 박영효(朴泳孝)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으로 임명하고 칙임관(勅任官) 1 등을 주고 순부 001
03/10/27(양력) / 태왕 전하가 박영효에게 경효전에서 전작례를 거행하도록 명하다 순부 017 19/04/09(양력) / 이강 공과
박영효, 윤덕영 등이 병세를 돌보다 순부 017 19/05/29(양력) / 발인(發靷) 및 하현궁(下玄宮)할 때 여재궁원(쵛梓宮員)으로
남작(男爵) (閔泳綺) 를, 식재궁원(拭梓宮員)으로 후작(侯爵) 박영효(朴泳孝)를, 복토원(覆土員)으로 후작(侯爵) 윤택영(尹澤榮)을 임명할
것을 명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