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문화재

용봉동의 지명유래

월명실 2013. 6. 15. 09:29

 

[용봉동 - 지명유래]

유래
용봉동 전경

용봉동동전경

용봉동은 동녘 각화동 대봉산 기슭에서 내려오는 경방천과 북녘 일곡동에서 흘러오는 용봉천이 합류하는 왕개 윗녘에 자리잡고 있다. 일찍이 풍수지리상 명당이라 소문난 곳이다. 전남대 학생회관 뒷편으로 이어지는 언덕 자락은 용주, 반룡마을을 안고 있어 반룡희주형(盤龍戱珠形) 명당이라 한다. 동(洞)의 서쪽 경계인 어린이 대공원 전망대 기슭에 있는 저불마을도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날으려는 형세로 풀이가 된다. ‘섬배미’, ‘저불들’, ‘진봇들’, ‘여시박골’에 농사를 짓던 이곳은 1951년 전남대학교의 설립으로 점차 대학촌으로 발전하였고 1980년 북구청의 개원과 함께 북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용봉동이란 이름은 1914년 전국토의 세부칙량을 실시하고 행정구역 개편을 실시하고 법정리를 정하면서 관내에 있는 용주, 반룡, 봉곡, 청계마을의 이름 가운데 용주, 반룡의 ‘용’과 봉곡의 ‘봉’자를 따서 ‘용봉리’라 하였다.
반룡마을은 마을의 지형이 용의 형국이라 하여 반룡이라 하였는데 마을의 일부는 전남대학교에 편입되었고, 나머지는 현재 경영대학 뒷편에 있다.
용주마을은 용봉동에서 으뜸이 되는 마을로 지형이 용이 구슬을 가지고 논다는 반룡희주형(盤龍戱珠形)의 명당이 있다고 하여 용주라 하였다 한다. 이 마을도 전남대학교에 편입되어 없어졌는데 현재 법대, 사회대 건물이 있는 언덕 밑 당산나무가 있는 일대였다 한다.
중봉마을은 본래 저불이라 하여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다. 저불마을로 1985년까지 불리어지다가, 봉곡(鳳谷)으로 마을 이름을 바꾸었다. 이는 마을의 형국이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날으려는 형이라 하여 봉곡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은 500여 년 전 함풍(평)이씨가 들어와 현재까지 살고 있다. 마을이 점차 커짐으로 변두리에 있는 마을을 변봉이라 하고, 위쪽에 있는 마을을 상봉이라 하였다. 그리고 본 마을은 중봉이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본래 광주군 와지(蛙只)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다라 반룡리와 용주리, 봉곡리, 청계리, 하촌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반룡과 봉곡의 이름을 따서 용봉리라 해서 서방면에 편입되었다가 1955년 7월 1일 광주시에 편입되고, 1957년 동제 실시에 따라 신룡(태봉)동회의 관할이던 것이 1983년 10월 1일 분동으로 용봉동이라는 본래의 명칭을 찾게 되었다.

소지명
  • 반룡, 반룡리 : 용주 서북쪽에 있는 마을.
  • 봉곡, 봉곡리, 저불 : 반룡 서북쪽, 들옆에 있는 마을.
  • 왕개, 왕포 : 주젱이 동쪽에 있는 마을.
  • 용주, 용주리 : 용봉동에서 으뜸가는 마을. 반룡희주형의 명당이 있다 함.
  • 주젱이, 주정 : 용주 동쪽에 있는 마을.

    [용봉동 - 유물유적]

    기타

    광주성 동문 밖 법수 : 전남대학교 내(內)

    광주성 동문 밖에 있던 법수를 전남대학교 구박물관 앞으로 옮겨놓았다. 법수에는 왜주성선(?柱成仙), 보호동맥(補護東脈)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왜주성선(?柱成仙)은 여와씨가 천지를 구제하고 이제는 선인이 되어 이곳을 지킨다는 뜻이고 보호동맥(補護東脈)은 광주 동쪽의 지맥을 비보하여 천재지변과 수난을 예방한다는 뜻이다.

    부도

    이 부도(孚屠)는 담양군 남면 서봉사지(瑞峰寺址)에서 석탑과 함께 이곳으로 옮겨온 것으로 석종형(石鐘形) 부도이다. 부도는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하던 것으로서 이 부도는 지대석(地台石)과 상대석(上台石), 탑신(塔身)의 3매석으로 이루어졌는데 지대석은 하대석과 중대석까지도 간략화시켜 1매로 만들고 상대석에는 내부에 사리공(舍利孔)을 장치하고 있으며 그 위에 석종형의 탑신을 올리고 있다. 이러한 석종형의 부도는 신라 하대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고려말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유행한 것인데 이 부도는 장식적이면서도 퇴화된 조각기법으로 보아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총 높이는 2m이다.

    ○ 담양 서봉사지석탑 : 전남대학교 내(內)

    이 석탑(石塔)은 담양군 남면의 서봉사지(瑞峰寺址)에서 부도 1기와 함께 옮겨 온 것으로서 상륜부는 유실되었고, 기단부(基壇部)는 일부가 주변에 흩어져 있으며, 지금은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만이 모습을 갖추고 있다.
    탑신과 옥개석은 각각 1매석으로 이루어졌는데 옥개석은 네 모서리가 약간 반전(反轉)되고 체감비율도 적은 편이어서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현재 높이는 2.5m이다.

    ○ 영암 청풍사지 석탑 : 전남대학교 내(內)

    이 석탑은 원래 영암군 영암면 학송리의 청풍사지라 전해지던 곳에 있던 것으로서 도로확장으로 인해 1969년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지금은 오층 옥개석과 상륜부가 유실된 채 남아 있으나 원래는 오층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대석과 그 위에 2중의 기단석이 놓이고 탑신과 옥개석은 각각 1매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옥개석의 반전은 경쾌하나 체감율이 적어 전체적으로 불안한 모습이다. 탑의 형식으로 보아 고려 중기나 말기의 석탑으로 알려져 왔는데 이전 해체시 사리호의 발견으로 탑이 아니라 부도의 성격이며 조성 시기도 조선 초기라는 주장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고인돌

    이 고인돌은 장성군 북상면 덕재리 남암마을에 있던 것으로서 1976년 장성댐 수몰지구에서 발굴 조사된 후 이곳으로 옮겨졌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묘제인 이 고인돌은 몇 개의 굄돌(支石)이 없이 덮개돌(上石)만 올려진 개석식(蓋石式)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그 하부에는 판돌(版石)이나 깬돌(割石)로 만든 돌널(石棺)이 나타나는데 주로 돌검이나 돌살촉이 부장되고 주변에는 홍도(紅陶)나 무문토기편도 출토되고 있다.  

[용봉동 - 민속문화]

채국계(採菊契)

채국계는 교유계(交遊契), 풍류계(風流契)로 지금의 전남대학교 뒷편 반룡부락에 거주하던 운파(雲坡) 김진현(金珍鉉)을 위하여 이철종(李哲琮) 등이 1933년 중구일(重九日)에 동료 제자들과 스승의 지우(知友) 등 300여명을 모아 창계하였다. 김진현은 이미 강의계(講誼契)를 만든바 있고 채국계의 창계를 지원하였으며 해방 후 난심계(蘭心契)까지 결성하는 등 시문을 좋아하고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즐겼다.
채국계라는 계명을 붙인 것은 중양절(음력 9월 9일)과 관계가 깊다. 지금은 우리 기억에서 멀어졌지만 구구절, 구일날 또는 귈날이라고도 하는 중양절은 추석 못지 않은 큰 명절이었다. 햇곡식으로 조상께 천신(薦新)하고 누런 국화를 따서 국화전을 부치고 국화주를 빚어 시식(時食)으로 삼았다.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1에서 10까지의 기본수 가운데 기수(奇數)를 양수(陽數)라 하여 1월 1일,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을 명절로 삼았다. 그 가운데에서도 양수의 극이라 믿는 9가 겹치는 날을 중양이라 하여 양기를 존중하는 사상에서 큰 명절로 삼아 왔다. 한?위(漢?魏)시대부터 국화를 감상하고 높은 곳에 올라 시를 읊는 상국등고(賞菊登高)의 습속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이래로 중구절을 숭상하여 군신(君臣)이 설연창화(設宴唱和)하였고 풍류를 아는 선비들은 높은 곳에 올라 시를 쓰고 단풍과 국화를 감상하며 하루를 즐겼다 조선조이래 중구절은 일반백성의 명절이라기보다 양반들 특히 남자들의 명절이었다. 중양절의 의미를 살려주는 국화를 계명에 붙인 것은 이와같은 전통에서 기인한 것으로 계절감 및 계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준다. 1968년 운파 사후 채국계는 받드는 대상을 상실하고 소멸하였다.
채국계는 성년이 된 운파의 문인과 친우들로 구성되었는데 거주지는 서방?용봉 지역이었다. 창계시 계원이 300명이 넘었으니 운파를 흠모하고 따르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고 그의 높은 학식과 문장의 고매함을 알 수 있다. 한학의 대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직이므로 단결력이 튼튼하고 스승이 생존해 있는 기간 동안은 별다른 계원의 변동없이 잘 유지되어 왔다.
채국계의 강신일은 매년 음력 9월 10일이었다. 강신일이 되면 20여명의 유사가 200명 이상이 참석하는 계회의 음식물을 각자의 자비로 부담하여 준비하고 가마솥, 땔감, 그릇 등을 터가 넓은 정자나 냇가의 나무숲 아래로 가지고 나가 직접 밥을 지어먹었다. 같은 솥의 밥을 함께 먹음으로써 일문이라는 일체감을 더욱 다진 것이다. 채국계도 강의계와 유사하게 스승을 받들고 교제를 넓히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국등고(賞菊登高)는 못하였지만 지참한 지필묵으로 운에 맞춰 한편의 싯구를 읊으며 늦가을의 정취를 한껏 표출하는 장을 마련하였으며 이를 본계의 중요한 대목으로 여겼다. 이 자리에서 직강에 의해 한시 짓는 법이 강의되었고 서로 앞다투어 시문을 써내 주고받으며 필력을 향상시키고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계비는 창계시 20전, 해방이후 30원씩의 계비를 각출하는 등 최소 운영비용만을 거두었을 따름이며 계원에 대한 상조 기능은 거의 없었고 그때그때 계원 상호간 부조만 있었다. 운파 사후 유족과 그를 따르는 몇몇 제자에 의해 ?雲坡遺稿文集?이 발간되었다.
지금까지 채국계를 통해 선인들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해방 후 극히 짧은 기간동안 우리의 의식이 급변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구비전승

- 밭노래 1

물은 물이라도 생수가 나면 노던내 고기도 아니노 놀아요
나무가 늙어서 고목이 되면 앉던내 새도 아니나 앉고요
기생이 늙어 낙화가 되면 오던 내 한량도 아니니나 된들
요내 몸이 늙어나지면 오던내 님도나 아니니나 온들

- 밭노래 2

못다멜 밭 다 멜라다 금봉채를 잃었고여
금봉채 하나에 날 댓냥 한다고 내당여 줌세

- 댕기요

울아버지 따다준 댕기 울어머니 접어준 댕기
우리 오빠 호롱 댕기 우리 성님 눈치 댕기
우리 언니 눈물 댕기 머리 끝에 디리고야
이댕기가 담너메로 빠졌고야
저기저그 담너머 깔베는 저 총각아
그 댕기를 주었거든 담넘어로 살짝 넘겨주소

- 시집살이요

강진땅의 김효순이 딸 하나를 곱게 키워
개린다고 개린 것이 아주 몹쓸 사람을 개렸구나.

- 연정요

석탄 백탄 타는 불은 연기 짐이 나는디요
요내 가슴 타는 불은 연기 짐도 아니 나요
산천 초목 불나는 불은 나무 초군이라도 꺼주는디
요내 가슴 타는 불은 한강수라도 막무가내요
마당 가운데 모드락불은 날과 같이 속만 탄다

* 제보 : 이남순, 임점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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