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동 - 지명유래]
유래
신안동동전경
조선 후기 이 지역은 광주군 기례방(奇禮坊)면과 경양면에 속했다. 당시 이곳에 신촌이 있었으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기례방면 신촌리, 병항리 일부와 서양(瑞陽)면 동(洞)리, 오치(梧峙)면 청계리가 합해져 서방면 신안리가 되었으며, 1955년 7월 1일에는
광주시 풍향출장소 관할 신안동이 되었다.
신안동은 1960년대까지 경양방죽 물로 벼농사를 짓던 농촌이었다. 당시 이곳의
태봉산(52m)과 봉두산 남쪽 기슭에 자미(재매) 마을과 서쪽으로 1Km쯤 떨어진 곳에 신촌마을이 있었다.
1969년 광주역이 건립되고
경양방죽 매립을 위해 태봉산을 헐어내어 주택지를 만들었다. 철로가 동성을 갈라놓고 있는데 역앞, 북문로와 태봉로 쪽에는 북광주전신전화국, 구
중앙고속 터미널과 함께 여관들이 많다. 역뒤 순환도로쪽 전남대 입구에는 학원과 상가가 밀집되어 있다.
소지명
- 자미 : 자산, 저메, 재메 : 신안동에서 으뜸가는 마을
- 들자미 = 들재메 : 자미 남쪽, 들가에 있는 마을
- 청계 : 자미 북쪽에 있는 마을
- 멧저메 : 자미 북쪽, 산 밑에 있는 마을
[신안동 - 유물유적]
태실
<신안(매곡) 태실>
* 태봉산 태실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앞뜰
태봉산은 광주시가지의 북쪽 신안동(구 서방면 중흥리) 광주역 옆에 위치하였던 해발
52.5m, 넓이 약 1정보쯤 되는 무덤같이 둥글 납작한 산이었다. 이 산은 1967년 광주시의 시가지 정리 계획에 의하여 경양방죽을 메우면서
헐어 버려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 태봉은 조선조 인조(1623~1649)왕이 '이괄의 난' 으로 공주에
피신(1624)하고 있던 중 왕자를 낳아 태를 묻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1928년 7월 하순 심한 가뭄이 계속되자 주민들이 태봉산에 암장한
무덤을 파헤치다가 우연히 태실(胎室)과 함께 많은 유물을 발견하게 되었다. 태실에서 화강석으로 된 절구모양의 평방형으로 직경이 130cm,
높이가 62cm인 석분(石墳) 1개, 그리고 백청자(白靑磁)로 태를 담은 태합 1개, 길이 3척 1푼, 너비 1치 1푼 5리, 무게 한돈
5푼짜리 금박(金箔) 한 개와 납석질로 된 다갈색 명기석반(銘記石盤)이 나왔다.
명기석반에 새겨진 내용은 <皇明天啓四年 九月初
三日 辰時誕生 王男大君 阿只氏胎 天啓五年 三月 二十五日藏(황명천계사년 구월초 삼일 진시탄생 왕남대군 아지씨태 천계오년 삼월
이십오일세장)>으로, 천계(天啓) 4년은 1624년(인조 2년)으로 태실의 조성 연대로 보인다.
[신안동 - 민속문화]
전설
*용의 여의주 태봉산 전설
옛날 사람들은 광주의 지형을 이무기가 용이 되어 여의주를 물고 하늘에 오르려는
‘화룡승천(化龍昇天)’ 의 형국이라 했다.
무등의 영봉은 광주시가 쪽으로 두 지맥으로 뻗고 있는데 그 하나는 원효사 뒤의 화암봉을 지나
지산동 쪽으로 장원봉을 이루고 또 하나는 증심사 뒤에서 제 1수원지 뒤를 거쳐 전남대학교 부속병원 뒤까지 뻗어 있다.
이 두 산맥은
두 마리의 뱀형국으로 옛날에는 실제로 지산동을 편방 또는 단사동 즉 붉은 뱀골이라 했다 한다. 이 뱀들은 오랜 세월을 사는 동안 이무기가 되고
용이 되어 여의주를 물고 하늘에 오르는 법인데 그 여의주가 바로 태봉산(胎奉山)이라는 것이다.
이 태봉산은 높이 해발 52.5m 안팎에
3천평 가량이 둥글고 아담해서 마치 여의주와도 같은 모습이었으며 광주시민에게는 마을앞 동산과도 같은 친근한 산이었다. 이 산이 태봉이라 불리우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1624년 평안병사 이괄이 인조에게 반정을 도모하여 서울로 쳐들어오고 있었다. “이런 무례한 놈, 그 놈이
나를 배반하고 난리까지 일으켜…” 인조는 분을 참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함께 반정을 일으켰던 이괄(李适)이 인조
2년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인조 임금께서는 이괄을 믿었던 만큼 그에 대한 실망도 컸던 것이다.
그러나 인조가 임금에 오른지 2년째
되는 해라 아직 국가 기틀이 잡히지 않아 사회의 민심은 혼란했으며 모든 것이 안심할 수가 없는 정황이었다. 그래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김류 등
여러 신하들의 권유로 인조 임금은 공주로 난을 피하게 되었다.
인조임금과 함께 공주로 피난 온 인렬왕후는 태기가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10개월이 지난 후 왕후는 옥동자를 낳았는데 그가 아지대군(阿只大君)이다. 피난중이지만 아들을 얻게된 인조 임금은 물론 함께 피난 온 신하들까지
모두들 기뻐하였다.
왕자 아기를 순산한 후 태를 태합(胎盒)에 담아 계룡산의 좋은 자리에 정성껏 묻었다. 그런데 갓난 왕자 아기가 자주
앓기만 하는 것이었다. 왕후는 왕자 아기를 안고 약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어린 아이이기에 항상 몸에 품고 근심만 하였다. 그래서 왕후는 절에
가서 부처님께 왕자 아기의 건강을 위해 불공을 드리기로 마음먹었다. 왕후가 정성을 다해 불공을 드린지 며칠이 지났다.
그날도 불공을 드리기
위해 몸을 단정히 하고 부처님 앞에 나가려고 하는데 방문이 소리없이 열리는 것이었다. 왕후는 깜짝 놀라 방문쪽을 보니 백발이 성성한 노승이 붉은
도복을 입고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왕후는 깜짝 놀라면서 “아, 어인 일로 노스님께서…”
아무리 스님이라도 왕후가 홀로 있는
여자의 방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것이었다.
이때 노승은 왕후 앞에 머리를 숙이며
“소승은 계룡산에 있사온데 마마께옵서 왕자로
인하여 심려가 많으시다고 하여 여기까지 왔사옵니다” 하는 것이었다.
“소승이 생각하기에는 태어나신 왕자께옵서 이 세상에 나오실 때
시(時)를 잘못 잡으셔서 액상이 미친 것으로 아옵니다”
이런 노스님의 말에 왕후는 이상이 여기면서도 왕자의 일이기에 다시 물었다.
“그러면 스님, 어떻게 하면 액상을 물리쳐 왕자께서 건강하시겠습니까?” 애원하듯 왕후는 노스님에게 묻는 것이었다.
“지금 이대로
놓아두면 왕자께서는 돌을 넘기기가 어렵겠습니다. 왕자님의 태를 묻은 지금의 장소가 연에 맞지 않으니 왕자님의 태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합니다.
왕자님의 태를 묻기에 가장 좋은 곳은 무등산(無等山)이 있는 무등벌이온데 그곳은 옛날에 도선국사께서 절터로 잡아 두었던 곳입니다. 그 표식으로
도선국사께서 은행나무 한 그루를 그 곳에 심어 놓았는데 해마다 붉은 은행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 은행나무를 베어내고 그곳에 왕자의 태를 묻으시면
왕자님은 오래오래 수(壽)를 누리실 것이며 무등산의 지맥을 얻어 영특하심이 뛰어날 것입니다”
이렇게 일러주고 노스님은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왕후는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뒤따르며 “스님, 스님의 성함이 뉘시옵니까?”하고 물었으나 문을 열고 나간 노승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참 이상도 하다. 어떻게 노스님께서…”
왕후는 이러한 사실을 인조임금께 말했다.
“그러하오나 이같은 노스님의
말씀은 부처님의 지시라고 생각됩니다. 곧 지리에 밝은 사람을 무등산 밑 무등벌에 내려보내 사실을 알아보는 것이 좋으실 것 같습니다. 스님의
말대로 그곳에 붉은 열매가 열리는 은행나무가 있다면 그 곳이 길지(吉地)임에 틀림없습니다”
왕후의 이야기를 듣고 기이하게 생각한 인조
임금은 바로 지리에 밝은 세 사람의 신하를 불러 무등산 밑 고을로 내려보냈다. 며칠 후 이 일행들은 무등고을에 도착하여 이곳 저곳을 세밀히
살피기도 하고 은행나무에 대해서 묻기도 하여 그 은행나무 있는 곳을 찾아내었다. 과연 무등산 밑 한 마을에 수백 년이 묵은 은행나무가 서 있는데
마을 사람들의 얘기가, 붉은 은행이 매년 주렁주렁 많이 열렸다는 것이다.
이 일행들은 은행나무 있는 곳을 확인하고 말을 재촉하여
인조임금이 계신 곳에 도착하여 “스님의 말대로 무등산 아래 고을에 붉은 열매가 열리는 은행나무 있는 곳을 확인하고 왔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인조임금께서는 매우 기뻐하시고 바로 계룡산에 있는 왕자의 태를 파서 그곳으로 옮기기로 하고 스님이 일러준대로 은행나무를 베어낸 다음 흙을 모아
작은 산을 만들기로 하였다. 그리고 인부를 시켜 계룡산에 가서 왕자의 태합을 캐냈는데 석분(石分=태합을 넣는 돌함지로 절구모양의 직경 4자 정도
된다)이 꺼멓게 죽은 이끼가 끼어 있었으며 수많은 개미떼들이 붙어 있었다. 태를 파는 날 또다시 왕후에게 그때의 노스님이
나타났다.
“소승이 일러드린대로 왕자님의 태를 옮기시게 되어 다행이옵니다. 그러하온데 태합을 새로 묻으실 때 반드시 손바닥만한 금을 함께
묻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땅 속의 잡귀를 물리치기 위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왕비는 즉시 명하여 왕자의 새 태무덤엔 손가락만한 금괴를 함께 넣게
되었다.
태를 묻은 후부터는 왕자는 아무탈 없이 잘 자랐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괄의 난이 평정되고 임금의 일행은 다시 서울로 올라가서 이
왕자는 장차 성군의 재목으로 잘 자랐다고 한다.
이 태무덤은 오랜 세월 전설로만 전해져 왔는데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자 이 지방
사람들은 태무덤 때문에 가뭄이 심하다고 생각하고 그곳을 파헤친 일이 있었다. 그러자 태무덤에서 여섯구의 시체가 나왔다. 이것은 이 태무덤이
명당자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몰래 매장한 것이었다.
제
지금으로부터 50년 전까지 신안동 재매마을에서는 평소에 맞초상이나 사고가 잦았던 관계로 마을에 들어오는 액운을 막기 위해 매년 음력 2월
1일날 마을의 정결한 장소라 여겨지는 동, 서, 남 3곳에다 꼭대기에 기러기 모양의 나무 조각을 단 진대(긴 막대)를 세워두고 진대 밑에서
제사를 지냈다. 제사 음식은 3곳의 정결한 집을 정해 금줄을 치고 부정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여 정성을 다했으며, 깃대 둘레에는 황토를 뿌려
잡귀의 접근을 차단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마을의 도시화로 인해 행해지지 않고 있으며 깃대도 찾을 수 없다.
* 제보 :
박용현 (80세), 신안동 73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