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문화재

중흥동의 지명유래

월명실 2013. 6. 15. 08:52

 

[중흥동 - 지명유래]

유래
중흥동 전경

중흥동 전경

중흥동은 중가리와 신흥리의 이름에서 비롯됐다. 조선 후기에는 광주군 경양면에 속했으며, 1955년부터 중흥동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1957년 122개 동을 51개 운영동으로 축소함에 따라 풍향, 우산동과 함께 효죽동이 되었고 1986년 광주광역시 북구 중흥 1·2·3동이 되었다.
이 지역에는 한 복판에 간뎃골, 동편에 모롱골, 북녘에 진고살마을이 있다. 모롱골 북녘에는 시냑골, 병문리마을이 있었다. 1625년 인조 때의 왕자 태를 장사 지냈다는 태봉산(52m) 북녘 기슭에 태봉마을이 있었는데 1967년 태봉산을 헐어 경양방죽 매립에 이용했으므로, 지금의 광주역 서편 도로에 있던 태봉산의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중흥 3동은 조선시대에 조성되었으며, 이 지역에 많이 있던 비석은 서동의 향교로 옮겨갔다. 또한 우리 마을 고장 이름이라 해서 경양 9골이라 했는데, 큰샘골·솔댁골·관댁골·점모실·신악골 등이 있었다. 당뫼는 중흥 3동 동사무소 쪽이고, 큰잔릉은 동신고 있는 쪽이며, 범두고개는 동신고에서 효죽동우체국 사이라고 한다.
중흥동은 이웃 우산동 383번지에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경양역을 기반으로 형성된 큰 마을이었다. 구한말 일제에 의해 역의 기능(驛機)이 상실되면서, 광주 외곽의 근교 농촌이었다가 1969년 광주 철도역이 옮겨오면서 역전 시가지가 조성되었다. 지금은 역전 통인 중흥 1동과 역 뒤 중흥 2·3동이 철길에 의해 갈라져 있다.
중흥 1동은 전남일보, 동부교육구청, 광주교육회관, 한나라당사, 중흥시장 등이 있어 부도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중흥 2·3동은 북구청 앞 교차로와 전남대 후문 통에 즐비하게 들어선 학원, 상가와 주택 지구로 오치 방면의 주 통로가 되고 있어 러시아워 때 병목 현상이 일어난다.

또한 광주역이 자리하고 있어 교통의 요충지이다. 건물의 대형화와 더불어 통신, 건축 자재, 언론, 금융, 보험, 자동차 부품상 등 다양한 상권이 형성되어 있고, 거주 지역의 주택 등의 노후로 상주 인구의 지속적인 감소에 비해 경제활동 인구는 급증(야간 공동화 현상이 뚜렷함)하고 있다.

소지명
  • 간뎃걸 = 간뎃골 : 중흥동 복판에 있는 마을.
  • 모른걸 : 모롱골, 모롱리(毛弄里) : 간뎃걸 동쪽에 있는 마을.
  • 병문(屛門)안 = 병문리(屛門里) : 시냑굴 북쪽에 있는 마을.
  • 사랫몰 = 사른물 : 가랫몰 북쪽 들에 있던 마을.
  • 시냑굴 = 시낙골 : 모른걸 북쪽에 있는 마을.
  • 신중흥(新中興) : 중흥동옆에 새로 된 마을.
  • 진고샅 : 간뎃걸 북쪽에 있는 마을. 긴 고샅 옆이 됨.
  • 태봉(太峯, 胎峯) : 태봉 밑에 있는 마을.

[중흥동 - 유물유적]

기타

○ 병문

중흥동 13(병문2길 24)~우산동 271번지

병문의 설치시기는 1600년대 말 병문리 형성기로 추정된다. 이것의 규모는 폭 3m, 높이 3.5m이다. 병문은 외부로부터의 재앙을 막고 장수와 복(福)을 기원하기 위한 장소(음력 2월 1일)였다.

이곳의 옛 이름은 병문마을로 조선시대 선조 때(1600년경) 한씨가 이곳 산자락에 터를 잡고부터 점차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이 마을에 동서로 누워있는 산언덕은 옛 병문마을을 병풍처럼 둘러 있어 북풍을 막아주고 풍수지리학설로는 와우(臥牛 : 소가 누워있는)터로 인심이 순후하고 화재나 질병 등의 재난이 없는 살기 좋은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마을 주민들은 이곳(중흥동 13번지 ~ 우산동 271번지) 산자락에 울타리와 병문(일명 도대문(盜大門))을 설치하여 외부로부터의 재앙을 막아왔으며, 매년 음력 2월 1일에는 마을 공동으로 주변을 정화하고 담장과 지붕을 보수한 다음 지신(地神)께 제물을 올려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병문은 지금 남아 있지 않으며, 제례의식 또한 소실되었다.

○ 경양방죽

“장차 광주가 대도시로 발전할 때를 대비해서 경관이 수려한 풍치 지구로 아름답게 보존되어야 한다” 이는 1935년 경양방죽 매립 계획이 알려지자 「경양방죽 매립 반대 투쟁 위원회」가 밝힌 매립 반대 이유이다.

경양방죽은 원래 경양지, 경호(鏡湖), 연지(蓮池), 영지(影池) 등으로 불렀다. 경양방죽은 증심사와 능주 쌍봉사를 중수하고 증심사 오백나한을 조성한 김방(金倣)이 세종 22년(1440년) 세종의 중농 정책을 받들어 2년여의 공사 끝에 완공한 인공 호수이다. 광주고등학교·계림초등학교·광주상업고 세 학교의 정문 앞에서부터 부채꼴 모양으로 벌어진 남서쪽 일대에 펼쳐졌던 연못으로 면적이 4만 6천여 평, 수심이 10m에 달했다. 경양방죽은 5백여 년 동안 광주 고을의 생명수였던 셈이다.
수원(水原)은 광주천, 불로동과 금동의 경계 지점에 취수구를 만들어 불로동, 황금동, 충장로, 대인동, 계림동을 거쳐서 경양방죽까지 물길을 내서 물을 끌어 들였다. 이 물로 1,150마지기의 논에 물을 댐으로써 가뭄과 홍수를 막아내는 광주 인근 평야의 젖줄이었다.

호수 주변에는 2백~3백년 된 거목들이 큰 숲을 이루어 여름이면 그 그늘에서 땀을 식히곤 하였다. 팽나무, 귀목나무, 왕버들나무, 수양버들이 즐비해 지역민들에게는 낭만의 공간이었다.
호수에는 두 개의 섬이 있었으며 맑은 물에는 잉어, 붕어, 가물치가 많아 먹이를 주면 펄쩍 물위로 뛰어 올랐다. 봄이면 북, 장구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울려퍼지고 풍류객들이 찾아 들었다. 이렇듯 경양방죽은 광주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경양방죽은 두 차례에 걸쳐 매립되어 이제는 그 위치조차 가름할 수 없는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첫 번째 매립은 일제 시대에 극비리에 추진되었다. 당시의 야지마 전라남도지사가 중심이 되어 일본 건국 기원 2천 6백년(1940년) 기념 사업으로 이전의 광주상고와 계림초등학교 뒷산인 경호대 일대를 헐어내고 그 토사로 방죽을 매립, 저렴한 값으로 일본인 집단 거주지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광주 시민들은 최흥종 목사를 위원장으로 「경양방죽 매립 반대 투쟁 위원회」를 결성, 반대 투쟁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런 투쟁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경양방죽의 2/3를 매립해 버렸다.

해방 이후 1966년 광주시는 수원으로서 기능이 약화되고 수질 오염이 심각하다는 이유로 방죽의 나머지까지 매립하여 시가지를 조성했다. 태봉산을 헐어 토석을 충당했는데 이때 시민들은 「경양방죽과 태봉산의 두 아름다운 경관을 한꺼번에 잃게 되었다」고 안타까워했다. 매립 공사는 2년만에 완공되었고, 매립지 한쪽에는 지금의 광주 시청이 들어섰다. 경양방죽은 이렇게 사라지고 우리에게 아쉬움과 그리움을 남겼다. 그리고 자연의 소중함도 남겼다.

 

[중흥동 - 민속문화]

전설

* 경양방죽 전설

광주고을 효천면에 김부자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김부자는 고리대업을 하여 더욱 부유해지고 인근 농민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큰 흉년이 든 어느 해 효성이 지극한 박경양이라는 젊은이가 어머니를 위해 김부자를 찾아와 곡식을 빌려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러나 김부자는 곡식을 주려고 하지 않았고 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이 와중에 그만 김부자는 박경양을 죽이고 말았다. 박경양의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에 충격받아 죽고 말았다. 그후 죽은 박경양의 노모가 밤마다 김부자의 꿈속에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참다못한 김부자가 회개하고 박경양의 노모가 시키는 대로 마을사람들에게 품삯을 주고 그의 넓은 농토에 큰 연못을 만들었다. 이 공사로 인해 받은 품삯으로 마을사람들은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못은 총각귀신 박경양의 넋이 깃든 연못이라 하여 경양방죽(경양지)이라 부르게 되었다.
경양방죽에 대해서는 이런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광주의 서방(瑞坊)에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는 형편이 어려웠지만 마음씨는 아주 착하였다. 어느 해였다. 이상하게도 그해에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이 닥쳤다. 마을사람들은 농사걱정에 안절부절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런 근심을 씻어주기라도 하듯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사람들은 시원히 내리는 비를 보기 위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이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씨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물위에 이상한 것이 떠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는 곧 그 물체를 건졌다. 그건 개미집이었고 흙더미에 개미들이 우글거렸다.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지만 이씨는 개미집을 땅에다 잘 두고 먹을 것을 놓아주었다. 그런 일이 있은 며칠 후 이씨는 아침에 눈을 떴는데 이상한 일을 겪었다. 마당에 한 섬 가량의 쌀이 누가 퍼다 부은 것처럼 있었다. 다음날 또 그 다음날에도 그런 일이 계속 일어났다. 이씨는 잠을 자지 않고 지켜본 적도 있었지만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몇해가 지났다. 가난했던 이씨는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때쯤에 흉년이 들어 고을에 식량난이 극심하게 되었다. 관가에서는 이에 대처하기 위해 모아 두었던 의창이라는 곡식 창고의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의창의 문을 열자 곡식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관가에서는 곧 범인을 잡기 위해 수소문하였다. 그러자 빠른 시일에 부자가 된 이씨가 불려갔다. 이씨는 자신이 모은 재산의 과정을 설명하였다. 그랬지만 관가에서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씨는 곧 매를 맞았고 맞으면서도 주장하였지만 허사였다. 그때였다. "죄없는 이에게 매를 거두시오."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였다. 그런 정체불명의 소리를 들은 관가측은 확실한 증거없이 매질을 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음을 느끼고 이씨를 풀어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날 밤 이씨의 꿈에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집 마당에 개미떼가 잇달아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물에 떠내려 가는 개미집을 구한 것에 대한 감사였던 것이다. 그 개미들이 의창의 쌀을 하나씩 물어 이씨의 집에 옮겼던 것이었다. 그 후 이씨는 쌀이 의창의 쌀인 것을 알고는 고을에 베풀려 하였다. 그는 먼 훗날에 다시 가뭄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방죽을 쌓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방죽을 짓게 하고는 그 댓가로 쌀을 나눠주었다. 비록 그의 쌀은 다 없어졌지만 그 후 고을은 풍족하게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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