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문화재

보물-노인 금계일기

월명실 2013. 4. 28. 16:18

금계일기(錦溪日記)

  • 문화재명
    노인 금계일기
  • 지정번호
    보물 제311호
  • 지정일
    1963/01/21
  • 시 대
    1599년(조선시대 선조32년)
  • 소유자
    노준채
  • 주 소
    광주광역시 동구 경양로247번길 27(계림동)
  • 재 료
    저 지
  • 규 모
    세로 33.4Cm, 가로 23.5Cm
  • 관리기관
    노준채
소개내용 :
저자 魯認(1566∼1623년)이 丁酉再亂 때 南原城 전투에서 倭兵에게 붙잡혀 일본에서 2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다가 명나라 사절단의 배로 도주하여 북경을 거쳐 귀국하게 된 경위를 쓴 일기문으로 선조 32년(1599) 2월 22일부터 그 해 6월 27일까지 약 4개월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당초에는 남원성 전투에서 왜병에게 붙잡힌 경위부터 귀향 때까지의 기록이었으나 내용의 앞뒤가 유실되고 그 일부만 남았다. 이는 용사부의록(龍蛇赴義錄)과 주환록(周還錄)으로 미루어 알 수 있으며, 200년 뒤 그의 7世孫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金溪集 속에 이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일기는 책의 앞뒤가 없어지고 글씨도 훼손이 심하여 읽기가 힘들어 대체적인 情況만 알 수 있는데, 내용의 시작은 그가 和泉堺(지금의 大阪)의 땅에 연금되어 있던 1599년 2월부터이다. 마침 명나라 사절단이 와 있음을 알게되어 그 일행인 陳屛山, 李源證과 탈출을 모의하는 내용에서부터 탈출에 성공하여 福建省 獐州에 도착하고, 그 곳에서 사절단의 안내를 받아 1400리 떨어진 福州 軍門에 도착하여 大司馬, 布政司, 軍門坐營司, 總兵坐營司, 監察御使들과 만나 극진한 환대를 받고, 이어 이 곳의 少壯學者들과 交遊하면서 우리나라 문화를 소개하고 서로 詩歌를 나누고 洪秀才 집에 초대되어 八曲屛 詩文을 썼다는 내용들이다.

魯認의 자는 公職, 號는 錦溪이다. 1566년 羅州 荷衣里(현재 나주시 문평면 북동리)에서 아버지 魯師會와 어머니 전주이씨 사이에 태어났다. 14세에 栗谷門下의 南塘 金光運에게 수학하여 17세에 進士試에 올랐으며 20세에 內需司別提로 官界에 나갔으나 이듬해 부모님 봉양을 위해 휴가를 얻어 귀향하였다. 27세때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그는 곧 鄕兵을 모아 光州牧使 權慄將軍의 휘하로 들어가서 梨峙와 珍山에서 승리를 하고 幸州戰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1597년 丁酉再亂이 일어나자 都元師 權慄장군을 따라 河東에 머물렀으나 잠시 고향의 부모님을 뵈러갔다가 倭兵의 추격을 받고 그 총칼 앞에서 양친을 감싸안고 지키려함을 본 왜장이 그의 효성에 감격하여 \"勿害孝子\"라는 標書를 주면 다른 왜병이 해치지 못하게 하였다. 위급을 모면한 그는 다시 軍陣으로 돌아가 대구 팔공산을 지키던 중 남원성이 위태하다는 소식을 듣고 구원병으로 가서 싸우다 화살을 맞고 부상을 당하여 포로가 되었다. 순천 防沓浦로 호송된 그는 안골포, 대마도를 거쳐 伊豫州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그의 학문에 탄복한 왜장으로부터 각별한 우대를 받지만 탈출을 기도하다 발각되자 和泉堺로 옮겨진 것이다.그가 北京을 거쳐 귀국한 것은 그 해 12월이었고, 宣祖를 만나 일본의 사정과 복수책을 상신하였다. 1603년 나라에서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宣傳官을 除授하고, 이어 所江節制를 임명하였다. 고종 20년(1883년)에 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訓鍊院事를 追贈하였다.
- 노인 금계일기(魯認 錦溪日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