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화동 - 지명유래]
유래
각화동동전경
본래 광주군(光州郡) 두방면 지역으로서 삼각산(三角山)아래 동네라서 각화(角化)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치면(傲侈面)의 문산리(文山里)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각화리(角化里)라 해서 서방면(瑞坊面)에 편입되었다가 1955년 7월 1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리(里)를 동(洞)으로 고치고, 1957년 동(洞)제 실시에 따라 각화동이라 하고, 1986년에 문흥동과 함께 행정구역상 문화동의 관할이 되었다.
소지명
- 각-화(角化) : 각화동(角化洞)으로 변경.
- 각홧-들 : 각화 서쪽에 있는 들.
- 강력-골 : 각화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 군-버들 : 각화 북쪽에 있는 들.
- 꼬시랑-골 : 각화 동쪽에 있는 골짜기.
- 낡은솥-골 : 꼬시랑굴 동쪽에 있는 골짜기.
- 뒷-동산(세자봉) : 각화 뒤에 있는 동산.
- 들싼-재, 들싸릿재, 들쏘드릿재, 들싸드릿재 : 각화동 남쪽에서 청풍동으로 가는 고개.
- 마갈-재 : 각화 동북쪽에서 망월동으로 가는 고개.
- 무숫-솔 : 마갈재 북쪽에 있는 골짜기.
- 바래-봉 : 북당골 남쪽에 있는 산.
[각화동 - 유물유적]
고분
1) 각화동 석실분(石室墳) : 백제후기
이 고분은 발견 당시 중장비에 의해 남벽 전체와 연도부분, 동서벽 2/3가량이
유실되었고 남쪽 바닥은 드러난 채 방치되어 있었다고 하며, 돌방의 장축 방향은 동서향이고 연도는 서쪽에 두며 침향은 동쪽으로 추정된다. 봉토의
높이는 지표에서 4m, 직경 15m이며 덮개돌에서부터 봉토의 두께는 40~50cm이다. 이곳에서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황갈색 토기 조각 2점,
흑회색 백제토기 조각 2점을 비롯하여 장식용 유리제 소옥 8점, 병구연부 조각 1점, 흑색항아리저부 조각 1점, 철 조각 23점, 이 가운데
철촉 1점 등이 출토되어 광주시립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현재는 잡초만 무성한 상태로 무등건설 소유의 건설현장으로 되어있다.
2) 각화동 봉토분(封土墳) : 각화정수장 앞, 백제시대
이 고분은 광주광역시 상수도 공급지인 각화정수장 정문 우측 구릉지대에
있으며 해발 290m에 해당된다. 고분의 봉토는 원형으로서 주위에는 20~30년생 청송이 사방에 심어져 있고 둘레를 고분 정상부에 매끄럽게
치장한 흔적이 보인다. 봉토의 크기는 직경 13m, 높이 4.5m의 원형분이며 이미 1982년 전에 파괴되어 없어진 이웃 두암부락 앞에
<말무덤>이라 부르는 고분과 함께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고분은 각화동 1호 석실분과 불과 500미터 거리에 있으며 이곳
일대가 고분군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며 현재는 고분은 있으나 잡초와 나무만 무성한 상태이다.
노거수
<각화동 당산나무>
1) 당산나무 1호 : 각화동 각화마을, 약 300년
당산나무라는 그 본뜻은 마을의 풍요을 기리는 것으로 제를 지내기도 하나
이 마을에서는 특별히 그런 당산제는 지내지 아니하고 논농시대에 맞게 휴식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나무를 심었다 한다. 현재는 큰 나무 1그루와
후일에 심은 큰 나무 종자인 작은 나무 2그루가 정자와 함께 있다. 동광주IC사거리에서 제2순환도로쪽으로 오다가 순환도로와 각화마을 갈림길에서
각화마을로 가면 순환도로밑에 버스회차지에서 왼쪽길로 마을로 곧바로 10m정도 앞에 당산나무가 있다.
* 제보 : 문윤상(80), 각화동
291-1
2) 당산나무 2호 : 각화동 각화마을, 약 90년
본래는 여러 그루의 귀목나무가 유상각이라는 정자와 함께 있었으나 현재
정자는 소실되고 작은 나무 1그루만이 쓸쓸히 남아 있다. 당산나무 1호를 보고 큰길로 나와 동광주IC사거리로 15m정도가면 길가에
광주농협각화포도작목반이 나오고 그 옆에 있다.
*제보 : 문윤상(80), 각화동 291-1
[각화동 - 민속문화]
기우제
우리 나라의 자연숭배 가운데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기우제라 할 수 있다. 고대로 우리 나라는 농사를 국본(國本)으로 삼아왔다. 국가나
국민의 경제는 모두 농산물에 의지하였다. 그런데 이 농산물의 잘되고 못된 것을 순전히 자연에 맡겨왔고 농민은 다만 하늘에 의지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 기상은 대륙적이므로 우량(雨量)이 그다지 풍부하지 않고 장기간에 걸쳐 비가 오지 않는 일도 허다하다. 그것이 곡물의 성장기인
봄, 여름에 계속된다면 일년 농사를 망쳐 버린다. 이른바 흉년이 드는 것이다. 따라서 농민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가뭄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늘에서 비가 내리도록 할 힘은 누구에게도 갖고 있지 않다. 인력으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여기서 천신(天神)을 생각했고 지신(地神),
산신(山神)도 생각하게 되었다. 하늘에 비는 것을 거의 본능적으로 행하게 되었고 땅과 산천에도 빌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누군가 하느님을 노하게
만든 죄를 범했다고도 생각했다. 우리의 기우제는 이러한 여러 가지 복합적 의의를 가진 제사임에도 불구하고 과학 문명의 발달과 농업의 현대화에
따라 과거의 하늘만 바라보고 농사짓던 때와는 달리 이제는 매우 찾아보기 힘든 제의(祭儀)가 되고 말았다.
1980년대 후반에
농업용수의 해결을 위해 국가에서 재정을 지원하고 개인의 노력을 합해 관정(官井)을 판 뒤로는 물 걱정이 없어져 기우제는 다만 추억 속의 행사로만
기억될 뿐이다. 기우제는 당산제가 정기적인 반면 농사가 위협을 느낄 때 올리는 임시제(臨時祭)의 성격을 가진다.
각화동의 각화마을에서는
33년 전인 기해년(1959) 음력 7월에 가뭄이 혹심하여 문화동 인근의 농민들이 두암동 군왕봉(무제등)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로 합의하고, 기우제
비용으로 각 호당 50원씩을 각출했다.
기우제를 지낼 때 화주와 제관의 금기와 몸가짐은 당산제를 지낼 때보다 더 엄하다고
한다.
기우제의 순서는 확실히 밝힐 수 없으나 유교식 祭(제) 절차로 분향-진설-강신-헌작-배례-독축-소지-헌식 순이다. 정결한 한복에
갓을 쓴 제관들이 동서남북 방향에 비를 내려 주십사는 배례와 천제에게 비는 기우제문을 간곡하게 읽은 뒤 헌식으로 생돼지머리를 땅에 묻고
산꼭대기에 불을 피웠더니 과연 3일 뒤에 비가 내렸다는 것이다.
기해년 가뭄의 원인은 신성한 군왕봉 정상이 명당으로 소문이 나
누군가 몰래 묘를 썼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농민들과 여자들이 앞장서서 군왕봉 정상을 파헤치자 양림동 최부자집 모친 것으로 보이는 명정이 나오자
이에 격분한 주민들이 준비해 간 오물을 사방에 뿌리고 산을 내려오자 곧바로 비가 쏟아졌다고 한다. 그 후 파묘(破墓) 문제로 소송이 생겨
기우제(祈雨祭)를 주관했던 제관 등이 파출소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르기도 했으나 긴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려 기우제의 덕을 본 각화동
하성대(작고) 씨의 주도로 기우제를 지낸 제관(祭官)과 화주(化主) 등을 위로하는 행사를 갖기도 하였다.
각화마을 자체내에서는 동네에 묘를
쓰면 병이 돈다는 속설이 있어 의부나 우제단을 세워 지내는 것으로 말들이 전해진다. 우제단에서는 떡, 돼지머리, 과일, 삼실과(밤, 대추,
은행)를 넓이 1㎡의 단 위에 위와 같은 음식을 놓고 어르신들께서 몸을 단정히 하고 지냈다 한다.
* 제보 :
문윤상(80), 각화동 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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