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고향(반남박씨)

역대인물: 12세 휘 박응남(朴應男)-남일

월명실 2013. 4. 19. 20:58

순번




시호

관직

123

12

응남(應男)

유중

남일

문정

대사헌

12세 휘 박응남(朴應男)

12세 휘 박응남(朴應男) 1527(중종 22)~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유중(柔仲), 호는 남일(南逸) 또는 퇴암(退庵). 사간 소(紹)의 아들이다.
8살에 어머니를 따라 서울에 와서 유조인(柳祖?)에게 배웠고, 뒤에 성제원(成悌元)?(李仲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53년(명종 8)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수찬과 육조의 참의?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대사헌으로 있을 때 국정을 전단하던 이량(李樑)의 죄를 탄핵하다가 귀양갔으나 왕이 특별히 용서하여 풀려났다
명종이 임종할 때 좌승지로 금중(禁中)에서 숙직하다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 함께 고명을 받아 선조가 왕위를 계승하는 데 공을 세웠다. 심의겸(沈義謙)과 친교가 두터워 조카딸(應順의 딸)을 선조비로 책봉하도록 하였으며, 궁중의 복색을 화사하고 선명한 것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이이(李珥)는 《석담일기 石潭日記》에서 ????고지식하며 말을 과감히 하고 겉으로는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는듯하나 속으로는 시비를 판단하는 기준이 있었다.????고 평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였기 때문에 대사헌 재임중 기탄 없는 논박을 하여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또 왕비의 숙부였으므로 왕의 총애를 받으니 사림(士林)의 큰 힘이 되었고, 그가 죽자 사류(士類)들이 애석하게 여겼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洪鍾필〉
諡號 문정(文貞) <영조8(1782) 3/26>
贈 이조판서 <영조8(1782) 3/26>

12세 휘 朴 應男 1527--1572 (중종22--선조5 9/24 ) 南逸公
《박응남(朴應男) 명종(明宗) 07 (1552) 式年進士)
【합격등위】 3등 0067
【본인거주】 경(京)
【본인구존】 자시하(慈侍下)
【본인전력】 유학(幼學)
【본인문과】 계축(癸丑) 1553 별(別)
【부친성명】 박소(朴紹)
【부친품계】 조산대부(朝散大夫)
【부친관직】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수보덕(守輔德)
【부친관직】 /지제교(知製敎)
【안항(형)】 박응천(朴應川), 박응순(朴應順)
【안항(제)】 박응복(朴應福), 박응인(朴應寅)
박응남(朴應男)
명종(明宗)8년(1553년), 별시(別試) 병과13(丙科13)
생년(生年) 1527년, 정해
자(字) 유중(柔仲)
호(號) 남일(南逸)
본관(本貫) 반남(潘南)
諡號, 封號 문정(文貞)
부(父) 박소(朴紹)
조부(祖父) 박조년(朴兆年)
증조부(曾祖父) 박림종(朴林宗)
외조부(外祖父) 홍사부(洪士俯)
처부(妻父) 윤화(尹和)
제(弟) 박응복(朴應福)
소과(小科) 1549(기유) 진사시
전력(前歷) 진사(進士)
관직(官職) 대사헌&(大司憲&), 호당&(湖堂&



명종8(1553) 별시문과 병과로 급제 --<조선왕조실록>--
명종9 9/16 박응남(朴應男)【검열(檢閱).】이중호의 문하이고, 이중호(李仲虎)【중호는 본래 고명한 자질이 있고 게다가 힘
써 배운 공부가 있어, 이학(理學)의 근원을 궁구하고 탐색하여 깊이 체득한 것이 있었다. 중호는 서얼(庶)이다.】는 조행이 있 을 뿐 아니라 학식도 또한 고명하여 사람들을 교회(敎誨)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이 매우 많고 출신(出身)한 자도 많다고 합니다입시(入侍)하는 신하 중에 이인(李認)【주서(注書).】박응남(朴應男)【검열(檢閱).】이 모두 그의 문하이고,이 외에도 생원?진사 가 된 사람이 거의 40여 명이나 된다니,
명종10 7/9 박응남(朴應男)을 정언으로,
10/2 이헌국(李憲國)을 사간원 정언으로, 박응남(朴應男)을 홍문관 부수찬으로 삼았다.
12/14 상이 소대하였다. 검토관(檢討官) 박응남(朴男)이, 옛날 사람은 자식을 낳아 미리 가르친 다는 말을 논하다가 이어서 아뢰었다.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은 독서(讀書)하는 것으로 구속(拘束)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옛날사람이 말하기를????젊
을 때의 습성(習性)은 천성(天性)과 같고 습관(習慣)이 되면 자연(自然)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양육될 때에 날마다 단아한 사람과 바른 선비와 함께 거처(居處)하게 하면, 익히는 것과 보고 듣는 것이 올바르지 않은 것이 없어서 음탕하고 사특한 것을 끊어 저절로 성취됨이 있을 것입니다. 가의(賈誼)가????예전에 태자(太子)가 태어난 지 3일만에 유사(有司)가 예복을 갖추어 남교(南郊)에서 뵙고 대궐을 지나게 되면 말에서 내린다.????고 하였습니다. 말을 하고 밥을 먹기 시작할 때부터 현명한 사람과 단정한 인사를 접하게 하여 충신(忠信)과 효제(孝悌)를 가르쳐 사악한 행실을 보고 듣지 않도록 하면 저절로 습관이 될것이니 비록 착하지 않은 짓을 하려고 하더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명종11 .8/25 朴應男)을 홍문관 부수찬으로, <부수찬; 종6품>
명종11 10/12 병조좌랑
12 1/29 정언 박응남(朴應男)이 아뢰기를,
명종12 2/13 박응남(朴應男)을 홍문관 부수찬으로 삼았다.
4/8 박응남(朴應男)을 수찬으로, <수찬; 정6품>
5/28 박응남(朴應男)을 사간원 정언으로, <정언; 정6품>
6/8 정언 박응남(朴應男)이 숙배(肅拜)하였다. 전교하기를,
????박응남에게 왕래한 일로(一路)에서 본 평안?황해?경기 각도에 비가 내린 형편을 물어서 아뢰어라.???? 하니, 아뢰기를 대
개 일로에 비가 두루 흡족해서 곡식이 무성했다고 합니다.????하였다.【응남이 수은 어사(搜銀御史)로 평안도에 갔다가 왔다
명종12 7/2 박응남(朴應男)을 사간원 정언으로, .
7/11 박응남(朴應男)을 홍문관 수찬으로 삼았다.
8/27 박응남(朴應男)을 병조 좌랑으로, <병조좌랑; 정6품>
10/28 박응남(朴應男)을 사간원 정언으로
13 5/29 박응남(朴應男)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14 9 25 박응남을 吏曹 正郞으로 삼다 <이조정랑; 정5품>
15 6/11 박응남(朴應男)을 의정부 검상으로, <검상; 정5품>
15 10/4 박응남(朴應男)을 의정부 사인으로,
16 4 2 박응남(朴應男)을 사복시 부정(司僕寺副正)
명종16 4 28 박응남(朴應男)을 사복시 정(司僕寺正)으로, 사복시정
명종16 5 8 박응남(朴應男)을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명종16 6 28 박응남(朴應男)을 內資寺 正으로
명종16 9/28 박응남(朴應男)을 의정부 사인으로
명종16 11/5 박응남(朴應男)을 홍문관 직제학으로
영사(領事:정1품)?대제학(정2품)?제학(종2품) 등은 모두 타관(他官)이 겸임하였으며, 직제학(정3품)도
승정원(承政院)의 도승지(都承旨)가 겸하였고, 응교(정4품)는 홍문관(弘文館)의 관원이 겸임하였다.
명종17 7/21 박응남(朴應男)을 동부승지로, <승지; 정3품 당상관>
명종17 9/5 박응남을 우부승지로
18 박응남(朴應男)을 좌부승지로
18 8/19 정종영(鄭宗榮)을 공조 참판으로, 어계선(魚季瑄)을 한성부 좌윤으로, 윤현(尹鉉)【비록 검약하다는 명성이 있
었으나 실상은 인색하였다.】을 황해도 관찰사로, 박응남(朴應男)을 형조 참의로, 안종도(安宗道)를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사신은 논한다. 이양이 박소립 등을 내쫓은 뒤에 이날 정사에서 다시 강사상을 황해 감사로, 박응남을 함양 군수로, 홍인경을 삼척 부사로, 이후백을 과천 현감으로 삼으려고 하여 그 흉계가 예측 불허한 데 이를 뻔했는데 오히려 공론이 격발하는 바람에 마침내 화를 자초하고 말았으니 이 어찌 통쾌한 일이 아닌가. 만약 이양의 권력이 며칠만 더 연장되었더라면 사류가 다 화를 당했을 것이다.】
명종18 8/28 박응남(朴應男)을 승정원 우승지로,
10/7 박응남(朴應男)을 사간원 대사간으로【특지(特旨)이다.】, <대사간; 정3품>
12/22 박응남【청렴하고 근신하여 마음씀과 행동을 바르게 하려 했지만 고집스럽고
편벽된 잘못이 없지 않았다 지난날 이양 등의 미움을 받아 거의 쫓겨날 뻔했다.] 을 승정원 우승지로,
명종19 2/17 박응남(朴應男)을 좌승지
6/1 박응남(朴應男)을 호조 참의로
7/20 박응남(朴應男)을 우승지로, 우승지
명종20 2/25 박응남(朴應男)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5/21 박응남(朴應男)을 병조 참의로 삼았다.
10/19 박응남(朴應男)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11/17 대사간 박응남(朴應男),【보덕(輔德) 박소(朴紹)의 아들이다. 겸손하고 신중하며 말이 적었다.조행이 단정하며 돈
후하고 검약해 사치를 하지 않았고 취향도 정직했다. 성품이 매우 확고해 남을 따라 좌우하지 않았다. 단지 인색해서 궁핍한 친족이 있어도 돌보아 주지 않아 사람들이 이를 단점으로 여겼 다.】 輔德; 세자시강원에서 경사와 도의를 가르침
명종20 11/18 박응남(朴應男)을 병조 참의로,
21 1/21 박응남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명종21 3/9 사간원 대사간 박응남 등이 상차하기를,
????오늘날의 급무는 성덕(聖德)을 기르는 일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성덕을 기르는 요점은 마음을 바루는 일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습니다. 마음은 한 몸의 주재요 만 가지 변화의 뿌리입니다. 인군의 마음이 바르면 잘못 쓰여진 사람을 탓하거나 잘못 시행된 정사를 비난할 것도 없이 국가가 저절로 치평에 이르고 임금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어진 신하가 비록 등용되었어도 아첨스럽고 간사한 신하가 은미한 곳에 침투하고 좋은 정책이 시행되었어도 강비 제패(糠粃 稗)의 누(累)가 질서를 혼란시켜 마침내 현자가 물러나고 간사한 자가 날뛰며 정사가 문란해지고 나라가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맹자가 맨 먼저 인군의 마음부터 바루려 한 것입니다.
옛 인군을 두루 살펴보면 아무리 어둡고 용렬한 이라도 어찌 그 나라를 망치려 하였겠습니까마는 자신도 모르게 점차 나라를 망치고 몸을 상(喪)하게 되는 것은 그 마음을 바루지 못함으로 해서 그 망하는 까닭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하여 나의 몸에 얻어진 것은 전혀 대중 지정(大中至正)의 도(道)뿐이니 그 선한 본심이 어찌 외부의 침삭(侵 )을 받겠습니까. 다만 조그마한 사욕을 마서 버리지 못하고 항상 한 몸의 병근이 되어 그 밝은 것을 침식하고 참된 것을 무너뜨림으로써, 본시 환하던 하늘에 구름과 먼지가 끼듯 하여 결국 태산(泰山)이 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게 되어서입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성현들이 이 속으로 좇아 극기(克己) 공부에 정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한 마음은 공격하는 적이 많으므로 이것을 이겨내는 법은 주경(主敬)에 불과한 것이며 주경은 존심(存心)하는 요점인 것입니다. 정욕이 발로되기 이전에 존심하여, 이 심체(心體)가 담연(湛然)히 맑아 정욕의 맹동(萌動)에 치우침이 없고, 발로되는 대로 즉각 살펴서 잠시의 쉼도 없게 한다면 이 마음이 언제든지 바르지 않을 때가 없을 것입니다. 선유가 경(敬)자를 해석하기를 ????주일무적(主一無適)???? 또는 ????성성법(惺惺法)????이라하였는데, 그 요점은 사람이 이 마음을 항상 가슴속에 잡아 두어 어둡지도 않고 달아나지도 못하게 하는데 있으며, 일에 임하면 그 주장(主張)이 되어 일을 처리하게 됩니다. 또한 음식 기거와 일동 일정에 이르기까지도 전혀 이 마음을 존양(存養)하고 성찰(省察)하여, 이렇게 하면 도에 부합되고 이렇게 하면 도에 부합되지 않는가를 따져서, 도에 부합되면 행하고 도에 부합되지 않으면 버려야 합니다. 일상 생활에서 생각마다 잊지 아니하여 오래도록 습관이 되면, 자연 천리가 승리하고 인욕이 단절됩니다.
그러므로 선유가 거경(居敬)을 성정(誠正)의 요점으로 삼고 치지(致知)를 진학(進學)의 공부로 삼았던 것입니다. 거경이 아니면 이 마음의 존부를 살펴서 성정의 공부를 착수할 수 없고, 치지가 아니면 시비를 분별하여 사리의 당연한 것을 알 수 없는 것이니 이 두 가지가 서로 발전해 나가면 지혜가 날로 더욱 밝아 지고 지킴이 날로 더욱 굳건해져 성덕(聖德)의 진취가 날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진보되게 될 것입니다. 신들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여마 성색(輿馬聲色)?토목?유렵 등 후세 인군들의 나라와 집을 망쳤던 욕심에 대해 일체 유혹됨이 없으시니 아무리 옛날 욕심이 적었던 성제 명왕인들 어찌 이에서 더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사심에는 끌리기 쉽고 물욕에는 팔리기 쉬우므로 털끝만큼만 살피지 않아도 천양(天壤)처럼 판이하게 바뀌게되는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습니까. 더구나 사람의 칠정(七情) 중에 발로되기 쉽고 제어하기 어려운 것은 노(怒)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더욱더 성찰해야 합니다. 정자(程子)가 이르기를 ????노한 때에 거연히 그 노를 잊고 사리의 시비를 관찰해야 한다.???? 하였고, 고어(古語)에 이르기를 ????갑자기 노하면기를 상한다.???? 하였는데, 대개 기는 마음의 위(衛)이므로, 마음이 동하면 기가 동하고, 기가 동하면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게 됩니다. 고인이 이를, 천균(千鈞)의 쇠뇌로써 새앙쥐를 잡기 위해 발사하는 것에 비유 하였는데 참으로 적절한 말입니다. 경(敬)은 시종(始終)을 꿰고 동정(動靜)을 동일시키는 것이므로 경을 가지되 쉼이 없이 하면 자연 이같은 병폐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학에서 주경(主敬)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심신이 화창하고 편안할 즈음에 신들의 말씀대로 이 마음을 잡아 어둠도 달아남도 없이 언제나 안에서 성성(惺惺)해 있는 것을 위주로 하여 잠심(潛心)하고 착력(着力)해서 날마다 공력을 들이면 양심 양기(養心養氣)가 일체임을 스스로 체득할 수 있어 마음이 절로 바루어지고 몸이 절로 닦아질 것이니 천지가 제 위치를 잡고 만물이 발육되는 공효를 이루는 데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신들이다 무상한 존재로 언직에 참여하였으나 털끝만큼의 도움은 없고, 다만 애군?우국하는 정성으로 정심설(正心說)을 진달하여 만화(萬化)를 새롭게 하는 근본을 삼으시게 하려 하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여기에 유의해 주소서.????【사신은 논한다. 상의 본성이 준급한 데다가 여러 차례 놀라움과 걱정되는 일을 겪어 심기가 화평을 잃었고, 명령을 내리는 사이에 혹 급절한 병폐가 있으므로, 이 차사에서 주경(主敬)?치심(治心)에 대해 주로 다루었고, 더욱 폭노(暴怒)에 대해 경계하였다. 하니, 답하기를,
이 차자를 보니 애군?우국하는 정성을 알겠다. 내가 비록 불민하나 어찌 가납하지 않겠는가. 마땅히 유의 하겠다.????하였다.
명종21 3/28 박응남(朴應男)을 병조 참지로. 좌승지.대사헌.부제학.
6/7 박응남(朴應男)을 이조 참의로, <참의; 정3품 당상관>
11/13 박응남(朴應南)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부제학; 정3품
12/6 홍문관 부제학 박응남(朴應男)【몸가짐을 삼갔고 권세를 좇지 않았으며묵묵히 스스로를 지켰으나 연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22 3/14 박응남(朴應南)을 좌승지로,,
4/20 박응남【입지(立志)가 확고하여 권요에 아부하지 않고 염정으로써 몸을지켰으므로, 사론이 아름답게 여기었다.을 이조참의로,
6/6 박응남을 승정원 좌승지로,
선조0 10/30 박응남(朴應男)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대사헌; 종2품.>
1 4/30 박응남(朴應男)을 대사헌으로 이중호(李仲虎)를 사간으로,
8/12 박응남(朴應男)?을 참찬관(參贊官)으로
10/4 박응남(朴應男)을 대사헌으로,
2 8/23 박응남(朴應男)을 대사헌에
선조4 10/14 대사헌 박응남(朴應男)이 병으로 체직되었다.
4 11/2 박응남(朴應男)을 부제학에,
11/3 박응남?천문도(天文圖)를 하사받았다.
11/25 박응남(朴應男)을 대사헌에,
선조4 9/4 이날 특지로 박근원(朴謹元)을 발탁하여 대사헌으로 삼았다. 대사헌 박응남(朴應男)이 두 번 정사(呈辭)하니 상이 체직(遞職)하기를 명하고, (呈辭);벼슬을사양하거나 말미를 얻고자 할 때, 그원서를 관아에 내는일
선조5 9/24(정묘) 도승지 박응남(朴應男)이 졸서(卒逝)하였으므로 상이 명하였다. ????특별히 부의한 전례를 상고하여 아뢰라.
선조5 9/28 유희춘이 또 아뢰기를, ????박응남(朴應男)은 녹을 받은 때에 임박하여 죽었으니 후임 도승지는 들어왔지만 해조(該曹)에 명하여 명목을 만들어 녹을 주소서 하고, 우승지 박소립(朴素立)도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그 일은 좋은 일이다.????(都承旨); 승정원 6승지 중 수석 승지. 정3품 당상관(堂上官)이 맡았으며,
선수5 9/1(갑신) 도승지 박응남(朴應男)이 졸하였다. 응남의 자는 유직(柔織) 으로 우직하리 만큼 과감하게 말했으며 교유를 함부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겉으로는 시비를 모르는 것 같았으나 속에는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권간이 조정을 혼란시킨 뒤에는 여러 차례 풍헌(風憲)을 맡아 친소(親疏)와 귀천을 따지지 않고 탄핵하니, 사람들이 다 그를꺼려하였다. 그러나 공(公)을 따르고 사심이 없었기 때문에, 깊이 원망하지 않았는데, 卒 하자 사류가 애석해 하였다. 그 뒤로는 일을 논하는 자가 아무리 엄하게 논박하며 공격해도 모두 은원(恩怨)의 혐의를 면치 못하였기 때문에, 사대부들이 다 응남을 추모하여 상고 시대의 유직(遺直)이라 하였다
선수1 1/1 김효원(金孝元)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효원은 갑자년 문과에 장원한 사람으로 그의 문명(文名)이 이미 나타나 있었으나 상조(常調)에 막히었다. 일찍이 형조 좌랑으로서 영남(嶺南)에 황장목 경차관(黃腸木敬差官)이 되어 갈 것을 자원 하여 조식(曺植)과 이황(李滉) 및 그 문하의 명사(名士)들을 두루 찾아 학문을 강론하고 사귐을 맺으니 사람들이 많이 칭찬하였다. 오건(吳建)이 전랑(銓郞)으로 서울에 올라올 때 조식이 효원을 그에게 부탁하였는데, 오건이 조정에 들어와서 는 맨 먼저 청망(淸望)을 열어 그를 지평(持平)으로 삼았었다. 그때 대간이 그를 탄핵하려 하자 대사헌 박응남(朴應男)이 만류하면서 이르기를, ????그는 좋은 선비다. 지금 입대(入臺)한 것도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하였다. 효원이 대랑(臺郞) 으로 들어와서는 자못 풍성(風聖)이 있었고 오래지 않아 이조 좌랑이 되었다

선수5 9/1 < 朴應男의 인품>
박응남이 일찍이 신응시(辛應時)의 문정(門庭)에 손님이 많은 것을 보고 묻기를,????당신은 어찌 손님이 이렇게도 많습니까? 나는
평생 동안 사귄 친구가 두세 사람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가깝게 지낸 적이 없습니다 직책이 대헌(臺憲)이고뜻이 혼탁한 조정을 격양(激揚)시키자는 데 있는데, 이미 그들과 친근히 지내놓고 나서 다시 그들의 죄를 탄핵한다면 원한이 더깊어질 것이니, 애당초 서로 친근하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하였다. 그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잠시라도 한 자리에앉은 적이 없었다. 기대승(奇大升)과 가장 친근하게 사귀었는데 대승이 남쪽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그 상가(喪家)를 찾아가 눈이 온통 진무를 정도로 곡하면서 말하기를,????내가 곡하는 것은국사를 위해서이지 사정(私情) 때문이 아니다.????하였다. 선조초에 바른말 잘하기로 제일 가는 諫官으로 알려 졌다
숙종25 7/8 판결사(判決事) 민진후(閔鎭厚)가 송징은(宋徵殷)이 차자 (箚子)로 자신을 배척한데 대해 진소(陳疏)하기를, ????선묘조(宣廟朝)의 명신(名臣)인 박응남(朴應男)은 곤전(坤殿)의 지친(至親)으로 가장 오랫동안 헌석(憲席)의 장관(長官)을 지내면서, 탄핵이나 자거(刺擧)를 회피한 적이 없었습니다.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가 이를 매우 아름답게 여긴 나머지 특별히 야사(野史)에 기록하였으니, 겸유(謙柔)와 외신(畏愼)이 척속(戚屬)이라 하더라도 자신을 검속하는 방법이고, 항상 집안일을 생각하는 것 또한 신자(臣子)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영조8(1782) 3/26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고 대사헌 박응남(朴應男) 관작과 시호(諡號)를 추증(追贈)하게 하고,
먼저 《명종실록》의 편찬 작업은 선조 1년 8월 20일에 영의정(領議政), 이준경(李浚慶),우의정(右議政) 홍섬(洪暹)이 춘추
관에 나와 다음과 같이 《명종실록》 편찬의 인선(人選)을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총재관(總裁官):홍섬
도청 당상(都廳堂上):오겸, 이황(李滉), 이탁, 박충원,박순, 김귀영, 윤현, 박응남(朴應男), 윤의중
8월 19일 총재관 밑에 3인의 도청 당상과 4인의 낭청을 두고, 그 밑을 3방(房)으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각방의 담당 당상과 낭청을 배정하였다.
삼방 당상(三房堂上): 김귀영, 박응남
삼방 낭청(郞廳): 신응시, 이기(李 ), 구봉령, 유성룡
실제의 수찬 작업은 명종 치세 23년 간을 다음과 같이 차례로 3년씩 띄워서 매 1년분씩을 차례로 분담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