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문화재

5.18의 역사의식 이해(발생과정-전개과정-5.18이후)

월명실 2013. 6. 15. 10:16

  • 발생배경

 

프롤로그
박정희 대통령의 일인독재체제로 일관된 유신정권 하에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철저하게 무시되어졌다.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제반 정치적 자유권을 박탈한 긴급조치와 같은 강권통치로 인해 수많은 민주인사와 지식인ㆍ학생들이
옥고를 치르며 탄압받았다. 때문에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10.26사건)에 따른 유신체제의 갑작스런 붕괴는
그동안 민주화를 갈망해 온 모든 국민들에게 큰 위안과 희망이 되었다.
물론 유신체제의 붕괴는 단순하게 김재규의 대통령 시해에만 기인하지는 않는다. 유신체제가 중대한 위기에 봉착했다는 뚜렷한 징후는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한편 유신체제의 종말과 함께 민주화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던 국민들은 여전히 불안하였다. 최규하 과도정부는 조속한 민주화 일정의 실천을 지연시켰으며 국회에서 합리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헌법 개정에 관한 논의가 정부에 의해 독점되었다.
이원집정부제 등과 같은 불투명한 정치 논의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2.12 군사반란을 통해 소위 ‘신군부’의 정치
개입이 가시화 되자, 민주화를 기대하고 있던 국민들은 최규하 정부가 보다 신속하게 민주화 일정을 제시 · 실천하여 국민적
합의에 따른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을 더욱 강경하게 요구하게 되었다. 이에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 학생들의 각종 집회가
계속되었다.
79년 10월
- 4일 여당 단독으로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제명
- 13일 신민당의원 66명 통일당의원 3명, 의원직 사퇴서를 국회에 제출
- 18일 마산 민주 항쟁 학생시위와 관련 부산에 비상계엄령, 마산서 대학생 시민시위
- 19일 미국 위싱턴 포스트지, 한국정치 관련 민국이 대한차관 자동승인 보류라 보도
- 20일 학생,시민시위와 관련 마산,창원에 위수령
- 26일 박정희 대통령 피살
- 27일 전국비상계엄령 대통령 권한대행에 최규하 총리 취임
- 28일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김재규 정보부장에 의한 계획 범행이라고 박대통령 살해사건 1차 수사결과 발표
- 28일 미 박대통령 살해사건과 관련 신예조기경보기 2대를 한국에 급파 한국해역으로 이동
- 31일 감시위해 소 정찰기 2대와 미기동함대가 대한해협을 통과하여 활동
79년 11월
- 3일 고박장희 대통령 국장
- 6일 계엄사, 김재규 단독 계획 범행으로 박대통령 시해사건 전모 발표
- 8일 정승화 계엄사령관, “군의 국토방위 조속복귀를 희망한다.”는 담화발표
- 10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담화발표
- 14일 여야 원내총무회담, 헌법특위 구성 등 국회일정에 합의
- 16일 계엄사 포교령, 19일부터 대학휴교해제
- 24일 YWCA 위장 결혼식 사건 : 주체국민회의의 해산, 거국내각의 구성을 주장 계엄사에 96명 연행, 재야 지도부 큰
   타격을 줌.
- 26일 국회, 헌법특위 여야동수로 결정키로 의결 서울 · 부산 등 통금 예전대로 환원
- 28일 부산 · 경남 계엄군 재판소, 부산 · 마산 민주항쟁 관련 20명에 2~5년의 실형선고
79년 12월
- 1일 국회 긴급조치 9호 해제 건의안 통과, 10대 대통령 선출을 위한 통일주체 국민회의 6일 소집을 공고
- 3일 국회헌법특위 첫모임, 위원장에 김태수 의원(공화)선출
-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10대 대통령에 최규하 선출
- 7일 국무회의, 긴급조치 9호 해제 결의, 0시 기해 긴급조치 9호 4년 7개월만에 해제, 구속자 석방
- 12일 12.12 군사반란 발생 전두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을 비롯한 신군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강제 연행
- 13일 김재규 범행관련 혐의로 12일밤 정승화 참모총장 연행
- 18일 이희성계엄사령관 군의 정치 불간여 방침 담화 발표
- 20일 육군보통군사재판, 박대통령 살해범 김재규 사형 선고
- 21일 최규하 10대 대통령 취임
- 23일 정부, 최대통령취임 맞아 긴급조치위반 33명 포함, 1,646명을 특별사면
- 24일 국방부, ‘12.12사태’ 수사결과 발표, 정승화는 김재규 범행에 묵시적 동조
80년 01월
- 14일 “우리 정계, 종교계 인사 11명을 만나고 싶다”는 요지의 편지를 북한이 12일 판문점을 통해 보내왔다고 발표
- 18일 최대통령, ‘남북총리회담 용의 “복권 검토” 평화적 정부 이양 선례 만들겠다’등 언급
- 19일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을 박대통령 시해 사건과 관련, 김재규 등의 내란을 방조한 죄명으로 18일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송치했다고 발표
- 22일 박대통령 시해사건 고등군사 재판, 김계원 피고인에게 1심에서 적용했던 ‘내란목적살인’을 ‘단순 살인’으로 공소장 변경
- 25일 수경사 보통군법회의,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의 윤보선에 징역 2년 함석헌에 1년 징역 등 선고
- 28일 수경사령관, 형량 확인에서 윤,함 피고에 형집행 면제
80년  02월
- 11일 휴즈 태평양지구 미공군사령관, 북한 남침 때 B52기 즉각 투입하겠다고 밝힘
- 15일 국무회의, 한도호국단 간부 선거제, 군대식 편제, 호칭 없애는 등 학도단 운영 개선방안 의결
- 18일 최대통령,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회담
- 22일 모스크바올림픽을 거부하는 미 입장에 동조키로 결정
- 25일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3김, 인촌기념회관에서 회동하고 개헌ㆍ복권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관용ㆍ이해를 다짐
- 27일 최대통령 정치일정은 예정대로 실천하겠다고 다짐
- 28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 관훈클럽 연설서 ‘보복없는 정치기초 이룩’ ‘재야는 신민당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고 역설
- 29일 정부는 윤보선, 김대중 등 687명에 대한 복권조치 단행, 정치인 22명, 종교인 42명, 학생 373명, 교직자 24명,
  언론인 9명, 기타 217명, 반공법등 경합범은 제외
80년 03월
- 1일 김대중, 복권후 첫 기자회견서 정치목표는 반공안보 태세강화, 자유 민주주의 실현 등이라 언명
- 4일 서울대교수협의회의, 총학장의 교수회의서의 선출, 교수재임용제의 폐지 등을 결의코 문교부에 건의하였으나
   문교부에서는 난색 표명
- 5일 김종필 공화당 총재와 김영삼 신민당 총재 회담 갖고 정국전반에 걸쳐 의견 교환
- 7일 서울대, 71년 이후 긴급조치위반 등 징계학생은 총 429명으로 이중 390명이 복학했다고 발표
- 13일 정부, 대통령 직속 자문기관으로 ‘헌법개정심의위원회’ 발족, 국방부 계엄보통군법회의, 정승화 전육참 총장에
   내란방조죄 적용 징역 10년 선고
- 27일 전북대 교수협의회, 학생들의 과열소요사태를 협의하고 교권수호 결의
80년 04월
- 2일 서울대, 학칙 중 학도호국단 설치, 단비 학호단 소속 학생들의 단체조직시 문교부장관의 사전 승인 등 3조항 삭제
- 3일 세종대생, 학장/대학원장의 사퇴 요구로 학장실 점거 농성
- 4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 김대중 회담. 범민주권 통합에 이견
- 9일 서울 평화시장 등 8개 기장의 피복근로자 160여명 임금인상, 퇴직금제실시 등 요구 농성
- 14일 최대통령.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전두환을 임명 특별담화 발표 ‘최근 학원가의 소란은 매우 유감’이라고 말함
- 18일 문교부, 최근 학원 사태 누계 자료에서 휴강 19교, 철야농성 24교, 어용교수퇴진 요구 24교, 시설확충 요구
   11교, 학원자율요구 29교로 밝힘
- 21일 사북 노동자 투쟁, 강원도 정선 사북읍에서 광부 700여명이 임금 소폭인상과 어용노조 대항하여 집단 시위
- 24일 서울 종합대학교수 361명, 교수재임용철폐, 학원민주화 촉구 등 학원사태에 관한 성명서 발표
- 25일 제철노동자들 임금인상 요구하며 농성 투쟁
- 28일 서울대 학장회의 현군사교육제도의 조속 개혁을 당국에 건의키로 결정
- 29일 전두환 중정부장 서리, 기자회견에서 중정의 조직을 축소정비하고 국민의 신뢰받도록 하겠다고 밝힘
- 30일 계엄사령군지휘관 회의, 노사분규, 학원소요의 폭력에 엄단키로 결의함.
80년 05월
- 2일 서울 형사지법,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의 이재문, 신향식, 안재구, 최선진에 사형 선고
- 3일 한국노총 ‘노동 기본권 학보 궐기대회’를 개최
- 6일 대학가시위, 학원자율화ㆍ입영훈련철폐 요구에서 시국과 사회문제 거론하며 가두진출 시작
- 10일 최대통령, 중동 방문위해 출발
- 13일 서울 광화문 일대 67개 대학 2,500여명 ‘계엄철폐’시위
- 14일 전남대 1만여 학생들 가두진출 시도하여 경찰과 치열한 대치 경찰 저지 각개돌파로 뚫고 도청앞 광장에 시위대 집결
- 15일 서울, 지방도시 대학생들의 가두시위 절정에 달해, 시위 저지하던 군경대원 1명 사망, 경찰서 등 방화
   광주는 경찰의 별다른 저지없이 전남도청까지 시위 ‘민주화 성회’개최
- 16일 최규하 대통령 중동순방 중단 귀국, 서울역 앞 학생 10만명 가두시위 : 24개 대학 학생 대표 당분간 시국추이 관망키로
   결정
- 16일 15:00 광주, 전남도청앞 광장에서 학생 3만여명 결집 ‘시국성토대회’후 횃불시위
- 16일 15:30 이화여대에서 전국 55개 대학 참가 ‘제1회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 회의’
- 17일 21:40 정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전현직국가원수 비방금지, 정치활동중지, 대학휴교 등 계엄포고 10호 발표
- 18일 5.18민중항쟁

전개과정

  • 항쟁초기 
    5월 18일

00:05 정동년, 김상윤 등 복적생과 전남대 총학생회 간부 연행작전

01:00 광주일원 공수부대 투입

01:45 무장한 제33사단 병력을 계엄군으로 국회의 사당에 배치, 점거 국회의원들의 출입을 통제

02:00 전남대, 조선대, 광주교대 적령 학생 112명 체포

03:05 2군 사령부 지시 사항 : 예비군 무기고 안전책 강구
         광주 소재 31사단 주요 조치 : 광주시내 직장예비군 무기 및 탄약 회수
         군부대 보관, 무기 고 접근자 발포승인 31사에 건의, 복무규울에 의거 지휘관 재량 실시 (31사단 전투상보 발췌)

07:20 노태우 지시로 김영삼 당시 신민당총재 가택에 수경사 헌병배치

09:00 전남대학생들 등교 시작

10:00 전남대 정문 앞에서 시위

10:20 전남대생 5백명 공수부대와 충돌 전남대생 계엄철폐를 외치며 도청으로 진출

10:30 전남대 후문에서 시민 연행

10:50 광주역 앞에 전남대생 200명 집결

11:00 금남로 3가 가톨릭센터  연좌시위

11:00 충장로 파출소에서 대치

11:30 가톨릭센터 에서 대치

11:49 한일은행 앞 시위대 600여명 가톨릭센터로 진출

11:50 한일은행 앞 시위대와 합류 가톨릭센터 “비상계엄 해제하라”는 플랜카드 들고 시위, 경찰 최루탄 발사 해산

12:45 7공수 33대대 가톨릭센터 앞 데모대 진압 명령 수령

13:00 공수부대 시내 투입, 시위 진압 및 시위 시민 연행 수창국교 앞 고수부대 차량 20여대 집결

13:20 학생회관 앞 페퍼포그차 1대 불지름

14:15 유동 삼거리, 불로동 쪽에서 온 3백여명 해산됨

14:42 도청 앞, 금남로 일대에서 1,500여명, 충장로 일대에서 1,600여명의 군중운집 시위 시작, 시위가 격렬해져 진압에 실패

15:00 계엄군 (7공수) 시내 진압 작전 실시 시위군중 체포(337명)

15:30 충장로, 광주공원일대 3~600단위로 운집시위 : 연행된 시민들 팬티만 입혀 구타

16:00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로 시위양상 전환 : 동명동, 지산동, 산수동 파출소파괴, 공용 터미널에서 시위대 공수부대와
         충돌, 공수부대 계속적인 대검 사용

17:00 농장다리 근처에서 경찰 20~30명 시위대에 포로로 붙잡힘 노동청 일대에서 시위대 시위
         - MBC방송국 앞에서 공수부대와 충돌

18:00 계림동 광주고등학교 부근 시위대 300여명 공수부대와 충돌

19:00 한미 연합사령관 위컴 미국에서 급히 귀임

20:15 충장로 한일은행 앞, 가톨릭센터 앞에서 시위

20:20 노동청 앞 등 시가지 2,000여명 산발적 시위

21:00 통행금지 시간을 밤 9시-04시까지로 연장


5월 19일

00:05~05:20 11특전여단의 광주도착과 진압군의 재편성

08:00 계엄사, 민주인사 및 항색 549명 검거(전국 총계), 금남로 교통 완전 차단

09:00 금남로에 군중들 운집 시작, 북동성당에서 가톨릭농민회 농민대회 예정이었으나 취소됨 계엄군 수십명 가톨릭센터 뒤
         미도호텔 난압

09:50 33연대를 시위진압에 투입

10:00 헬기동원하여 수천명의 시위 군중에게 해산 종용

10:00 대동고생 교내 시위

10:20 경찰 및 공수부대의 진압에 화염병으로 시위

10:40 충장로, 광주은행 앞, 도청 앞, 광남로 사거리 등 다발적시위 발생 계엄군 - 장갑차 4대, 군용트럭 30여대로 시위대포위

10:52 군용트럭으로 시위대 조선대로 연행

11:00 시위진압에 탱크 동원 진압투입 공수대 구타, 다방, 여관, 건물, 민가 연행, 총검 사용, 체포된 시위대를 발가벗겨
         무릎을 꿇게 한 뒤 머리를 땅에 박게하고 군화로 전신 구타,시내 국민학교 수업중단 조치, 중·고등학교 귀가조치

11:30~13:00 시위대 107명 연행

12:00 수업받던 학원생까지 연행

13:00~15:00 가톨릭센터 앞 시위, 드럼통 불을 붙이고 대형 화분, 공중전화 박스 등으로 바리케이드 설치, 차량 4대
         불붙여 바리케이트로 이용,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공수부대 6명 시위대에 잡힘

14:00 연행자 조선대, 전남대 운동장으로 연행

14:50 일반 시민들의 합류로 시위대 급증 화염방사기를 시위 진압에 사용

15:00 금남로 배치 경찰 최류탄이 소진되어 저지선에서 몸으로 막고 있음

15:14 조선대에서 전차 1대, 장갑차 1대, 트럭 22대에 병력을 싣고 도청으로 옴

15:15 CBS 시위대에 점거 되어 파괴, 차량 4개 불탐

15:20 장갑차를 앞세운 공수부대에 의해 가톨릭센터 옥상의 청년들 살상됨

15:30 격렬해진 시위대 관광호텔 방향으로 진행

15:55 35대대 도청에서 금남로 쪽으로 시위진압, 광주천 불로교에서 계엄군 1명 학생들에게 구타당하고 총기 빼앗김

16:00 양동 복개상가 앞에서 여고생의 가슴을 대검으로 난자함

16:40 공용터미널 앞 2천여명 시위대 시위

16:50 최초의 발포 광주고와 계림파출소사이 고장난 장갑차 1대에 1위대 150여명이 접근하자 장갑차에서 발포,
         4명 중상 일부는 계엄군이 싣고감 - 시신에서 뽑아 낸 총알들, 당시 계엄군들이 사용했던 총알 중에는
         전쟁중에서 사용이 금지된 납탄 총알이 발견되었다

17:30 광주일고 앞 시위대 40여명 연행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 500여 시위대 계엄군과 대치 - 광주역 앞
         500여 시위대 계엄군과 대치, 가톨릭센터 부근 시위대 계엄군과 대치, 금남로에서 시위군중 1,500~2,000 재집결

17:40 시위대 완전분산

18:00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주차장에 시체 7~8구 목격됨, 광주공원 시위대 수천 “전두환 타도” 외침

18:30 광주공원 대학생 8명을 팬티만 입혀 원산폭격기합을 줌

19:20 시외버스공용터미널 2,000시위대 해산됨

19:40 광주고속버스터미널 앞 시위대 1천명 경남 번호판 화물트럭 방화

19:45 유동에 세워진 대형아치에 방화

20:00~22:00 시위대 누문동 파출소 검거, 임동파출소 방화, 전소, 역전 파출소 점거, 북구청사 유리 파손 양동파출소 파괴

23:08 특전여단 광주에 투입, 40 시위대 완전분산


5월 20일

01:00 제 7여단 계엄군 서로 지역대를 편성

04:00 시민 궐기문 3만~4만장 뿌려짐

07:00 3공수여단 16대대 전남대, 12,15대대 광주역, 11대대 금남로 배치, 아침 라디오에서는 ‘공수부대는 철수했다.’고 방송됨

07:20 서2동 전남주조장 공터에서 대검으로 난자, 살해된 월산2동 김행부(36)가 변사체로 발견됨

09:30 계엄군이 증원 배치, 상가는 절반가량 철거

10:00 대인시장 앞, 1천여명 시민 집결, 탱크를 앞세운 공수부대에 의해 해산, 치안본부 18, 19일 광주에서 연행 517명,
         경찰 부상6명 중상1명이라고 발표

10:20 금남로 3가 30여명의 젊은 남녀가 팬티와 브래지어만 걸친 알몸으로 붙잡혀 기합받는 것이 목격됨

12:50 11공수여단 병력 출동 대기, 시청에는 250명 10대 차량에 대기

14:20 서방 삼거리 공수대 화염방사기에 사망, 부상자 발생, 광주역 부근 택시기자 20여명 대응책논의
         -금남로 일대 제3공수 11대대 15만 군중에 포위 당함

14:45 계림동 파출소 앞 대치 무등경기장앞 영업용 택시 집결

15:30 하교중이던 중학생 300여명 공수부대에 투석

15:55 금남로 수천 군중집결

16:00 광주은행 앞, 금남로, 전일빌딩, 가톨릭센터 등지에서 1천여명 단위로 시위대 및 시민들 적극적 참여, 상점
         주택가에서는 물을 제공하고 리어카와 자전거로는 돌과 자갈을 실어 나름, 여성들은 물수건과 치약 준비하여 나눠줌

16:18 CBS앞 시위대 증가

16:20 가톨릭센터, 광주고, 충장로, 금남로 등지에 시위 확산 시위대는 도청을 향하는 5개 방면 모든 도로에 밀어닥침

17:00 계엄군 최루탄을 쏘며 진압, 계엄군 후퇴하면 바로 시위대 재집결

17:10 충금 지하상가에서 ‘계엄해제, 살이나 전두환 물러가라, 군은 38선으로 귀환하라’등을 외치며 시위

17:50 충장로 시위대 육탄으로 경찰과 충돌 ‘광주시민을 적으로 취급하는 군과 사생결단을 낼테니 경찰은 비켜달라’ 협상시도

18:00 택시기사 200명 무등경기장 집결

18:20 택시기사 시위참여, 택시 100대가 3줄로 광주역쪽으로 진출 트렁크에 돌을 싣고 광주역 쪽으로 진출

18:40 전남대앞 500m지점, 계엄군 1명 사망 광주역쪽에서 택시, 화물트럭을 앞세운 시위대 시외버스공용터미널로 집결

19:00 7시 뉴스에 전남북 계엄분소 명의 보도문 방송 ‘부상학생은 정성껏 치료중이며 중상자는 없다’는 내용에 시민들 분개,
         산수동 오거리에서 광주역으로 시위대 이동 계엄군과 공방전

19:15 광주고속 앞 택시 50여대 집결

19:20 버스 6대 앞에서우 도청향해 진격

19:45 도청 광장의 공수대 각 방면의 시위대에 의해 포위됨, 시위대 버스 8대, 대형트럭 1대, 택시 50여대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도청으로 진격

20:00 시위대 MBC 방송국 점령 체포된 시위대 도청으로 연행, 소방서 시위대 점령, 2~3대의 소방차 도창앞 600M지점까지
         돌진, 계림동 시위군중 1~3만 증가(도청 진격) 전남대병원 앞 1만 증가(도청 진격)

20:10 전남대 앞 공수부대와 시위대 대치, 시내 각 지역에서 차량으로 시위대 이동,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시위대에 화학탄 발사

20:50 시위군중 시청 점령

21:00 도청 차고 불탐, 라디오 방송 중단, 외곽지역 주유소에서 화염병 제작, 노동청앞 시위진압 경찰 돌진한 시위대 버스에
         의해 4명 사망 (운전사 배용주, 재판에서 사형 선고 받음, 82년 12.25 석방)

21:13 군인 일부와 경찰 담양 방면으로 철수

21:20 7여단 33대대, 조선대로 철수

21:25 20사단 광주 파견 결정, 병력 이동 지시, 85/1,560명 열차로 이동

21:30 시위대에 의해 광주역 포위됨, 계엄군 공포탄 쏘며 대항, 2천여명 광주역 쪽으로 횃불시위

21:40 MBC방송국 전소

22:00 심야까지 광주시내 모든 거리는 시위군중 10만명 이상의 운집, 광주역에 투입된 31사단 병력 퇴각,
         금남로 3공수 11대대 고립상태

 

 무장항쟁기

5월 21일

00:00 조선대 정문 앞 2천여 시민 공수부대와 대치

00:35 노동청 쪽 길에서 2만 군중이 경찰 저지선과 격돌

00:36 조선대 정문 차량 3대의 공격에 공수부대 수류탄으로 대응

00:45 광주세무서 앞 지나던 시위대에 공수부대 사격으로 시민 3명 부상 이에 분노한 시위대 군용트럭에 불을 붙여
         돌진시켜 세무서 공수부대 공격 세무서 안의 공수 M16 난사로 많은 사상자 발생, 광주세무서 전소

01:00 31사 화염방사기 소대(33명, 화염방사기 10대) 출동

01:10 서울 용산역에서 서울소재 각 대학에 주둔하던 20사단 병력 광주 이동 명령

01:25 전남도청 차고, 전남도청 유류고, 광주세무서 부속건물 불탐

02:00 1만 5천여 군중 도청 앞에 집결

02:10 3여단, 광주역에서 전남대로 퇴각(공수부대 1명 사망, 5명 부상)

02:13 시외전화 불통으로 외부와의 연락 두절 광주지역 일반 전화선 단선

02:30 20사단 사령부 및 62연대 107/1540명 용산역 출발

02:45 31사단 병력 광주교도소 점령

03:00 시위군중 3천명, 11공수가 방어하고 있는 도청 앞 공격

04:00 광주역에서 계엄군 철수

05:00 KBS방송국 방화

05:40 계엄군 철수한 광주역에서 구타에 의한 시체 3구 발견, 시위대, 2.5톤 트럭에 시체를 싣고 시내 돌아다니며
         시민 궐기 호소

05:50 광주역에서 출발한 시위대 1천여명 광주은행 본점앞에서 시체2구를 리어카에 싣고 연작농성 아침 계엄사령부
         최초로 광주에서 유혈충돌 발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발표

06:06 광주공단 입구 바리케이드 설치하여 차단

07:00 곤봉과 쇠파이프로 무장한 수만명의 시위대 시위 계속, KBS전소됨

08:00 시위대 당국과 협상 시도

08:30 광주 주둔 31사단 지역 방위병 출동 준비 및 무기고 탄약고 경계 강화 지시

08:45 각 지역 예비군중대 무기 및 탄약부대로 집결 지시

08:45 20사단 병력 광주진입 저지, 군트럭 14대 시위대에 빼앗기고 계엄군 도주

08:45 시위대의 광주시 전입 및 타지역으로의 이동을 봉쇄하기 위한 작전

08:50 광주교도소 기습, 자진 철수

08:58 20사단 사령부 송정리 도착

09:00 아세아자동차 공장 진입, 태형버스 22대, 장갑차 3대, 군용트럭 33대, 민간 트럭 20대를 몰고 나와 도청으로 진격,
         외곽에서 도청으로 시민들 수송 군인의 과잉 진압사과 요구, 현정부 규탄

09:20 한국은행과 가톨릭센터 사이 5천이상 군종, 시체2구 손수레에 싣고 마이크로 ‘계엄군은 시체 인도하라’고 주장

09:49 장갑차를 이용해 도청 공격시도

09:50 시민대표 전옥주(32,여), 김범래(27,조선대 법과1)등 3명과 장형태 도지사의 협상, 요구 사항(유형사태 도지사
         공개사과, 연행서민 전원석방, 계엄군 21일 정오까지 철수) 협상 결과 5분후  도지사가 나와 사과키로 함,
         도지사는 이를 수락했으나 약속 불이행, 시민군과 진압군 충돌 총격

10:00 각종 차량에‘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플래카드 붙이고 시위, 공수부대 공격, 공수부대 시민에 발포,
         시위군중은 점차 증가, 10만이상 운집

10:10 도청 광장 쪽 공수부대에 1인당 10발씩 실탄 지급

10:48 군헬기에서 ‘공수병력 철수시키겠다’ 방송/도지사, 시장도 설득 방송

11:00 시위 군중 계속 집결 광천동에서 윤상원, 박용준, 전웅호 등에 의해 ‘시민 피해상황’을 중심으로 한 ‘투사회보 제 2호’
          제작

11:00~12:00 동별로 시위대에게 음식 제공

11:12 금남로에 시민 30만 육박

11:30 전남지역 학생총연맹 명의로 ‘오후 2시 도청앞에서 도민 궐기 대회를 갖자’는 전단 배포

11:50 가톨릭센터 앞 벽보 부착 ‘때려잡자 전두환 물러가라 최돼지, 사라져라 신현확 비상계엄 해제하라 칼부림이 왠말이냐
         너와 나 형제 지방색 배격’

12:00 12시까지 퇴각하겠다던 계엄군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분노한 시민들이 차량을 앞세우고 도청으로 진격

12:10 시위대의 장갑차에 계엄군이 4,5명 쓰러짐, 장갑차 위의 태극기 든 청년 총에 맞음, 계엄군은 살상을 예고한 듯 분수대
         앞에 횡대로 도열

12:30 분노한 시민, 각목을 든 채 도청을 행해 돌격 비무장 시민에게 발포 시위대 맨 앞의 503벤츠 고속버스가 군경의
         저지선으로 돌격하자 계엄군쪽에서 LMG기관총 난사, 차에 탄 시위대 20여명 사살 당함

12:40 버스 4대가 화순, 중앙파출소에 방화, 주민합세 후 무기 탈취

12:43 도청공격을 위해 트럭 2대가 돌격

12:55 도청앞 YMCA앞에서 도청에서 군이 난사하여 수십명 살상

13:00 무장을 시작한 시위대의 시위차량이 해남읍에 도착, 약 3천여명의 군중이 해남교육청 앞에 집결 시가 행진, 시위대
          카빈 3백정으로 무장

13:30 도청 주변에서 사망자, 부상자 속출

14:20 비아, 영광, 나주, 영산포, 무안, 영암, 화순, 장성둥지 무기고, 화학고에서 카빈, M1소총, 수류탄, 다이너마이트로 무장,
         효덕동 파출소 무기 탈취, 전남대에 주둔한 공수부대를 공격하자 발포

14:53 무장시민군과 계엄군의 무력 충돌 남평지서에서 무기를 확보한 무장시위대 광주은행 사거리 도착

15:00 시민군, 저공비행 헬기에 사격, 계엄사의 연행자 석방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시민들 더욱 흥분, 시내종합병원, 개인병원
         중상환자들로 가득참

15:16 화순에서 탈취한 무기, 학동에서 지급

15:20 도청앞 총격전, 시민 1,000여명 무장

16:00 무장시민군 특공대 11명, 전남대의대 부속병원 12층 옥상에 LMG 기관총 2정 설치, 5백 미터 벌어진곳을 향해 조준

16:15 금남로에서 계엄군과 교전

16:30 광주지역 공수대원 철수 명령

16:45~50 전남방직, 일신방직, 연초제조창 무기고 탈취

17:00 광주공원 광장에서 시민들 총기교육 후 지역방위대 6개조 60여명 편성

17:15 전남도경 도청 상황실 폐쇄

17:18 전남도청에 남아 있던 경찰병력 철수

17:25 화순광업소에서 다이너마이트 1대분 싣고 와서 국민은행 앞 대기

18:20 20사단 병력 외곽에 배치 남금동 구시청앞 발포

18:30 25대대 철수 준비

18:50~19:00 계엄군 외국 봉쇄, 광주-목포간 도로 차단위해 송암동 투입, 송정리 확보, 톨게이트 봉쇄

19:00 광주역에서 시청쪽으로 군부대 트럭 질주(철수), 남평-효천간 계엄군 집단 발포

19:20 광주교도소 앞, 지방시위 중이던 시위대에 발포, 2명 사망

19:50 광주역에서 총격전

21:00~22:00 학운동 지역방위대 편성, 1개조 12명씩 11개조 편성 배치 숭암동 군병력 배치, 광주-목포간 도로 시민군
                    경계근무

21:15 백운동지역 자체경비대 편성

22:11 효천지역, 시민군과 계엄군 접전, 광주로 진입하려던 잔남 도민 차량에 발포

 

해방광주

 

5월 22일

00:40~00:50 교도소 앞 통과 시민들에 대한 학살

04:55 계엄군 증원병력 광주도착(20사단 60연대)

05:00 매복중인 계엄군의 사격으로 일가족중 사망 1명, 부상 3명

6:45 광주 공원에서 각 차량에 번호와 임무 부여

7:00 광천동 공단입구에 시민군 지역방위대 배치

7:30 전남대 교정에서 암매장된 고교생발견

8:10 도청간부 수습대책 논의

8:20 외곽에 배치된 계엄군, 시민탑승 차량에 발포, 교도소 앞 계엄군이 차단

8:40 미국방성 대변인 발표 : 한국군 이동 승인

9:20 광주교도소 총격

9:30 피난행렬에 집중 사격

10:00 고속도로에서 계엄군과 교전, 광주지역 재야 인사들 남동천주교회에서 모임. 대책위원회 구성 합의, 녹두서점에서
         검은 기본 제작 시민들에게 나누어 줌

10:50 도청앞 궐기대회 준비하면서 국무총리 도착 기다림
11:00 군사령부 광주 완전 차단 작전 지시

12:00 도청앞 5만 시민궐기대회 개최 ‘5.18수습 대책위원회’결성, 자위권발동지시라는 제목으로 된 계엄훈령 제11호를 하달

12:00~15:00 수습위원, 계엄사 방문 협상 결렬, 시민군 작전상활실 설치하고 기동순찰대, 홍보반, 치안대, 환자수송반 조직

12:30 종합병원에 사망자 인상착의를 적은 벽보 부착

14:00 목포역 광장 시민궐기대회, 미국 백악관에서 고위정책조정회의, 조기경보기 2대. 항공모함 코럴시 파견

14:30 광주시장이 비행기에서 호소전단 살포

15:00 도청앞 시민궐기대회 개최, 매일 오후3시와 9시 2차례 도청앞 분수대에서 궐기대회 개최 결정

15:18 관위에 태극기를 덮은 시체 18구 도청분수대에 안치 추도식 거행

16:00 부상자를 위한 모금운동

16:10 영암 미암지서 무기고 습격

16:30 영암지역 무기회수 시작

17:00 도청앞 광장에서 계엄사와의 협상 결과 보고, 무기반납에 대한 이견 공개적으로 표출

18:00 쌍촌아파트 교전 : 시민 4명 중상, 계엄군 1명 중상

18:35 계엄군 광주 도로봉쇄선 설치

19:00 계엄사령부 ‘광주사태’에 대한 발표문 발표 : 무기,탄약 자진 반납시 요구 검토

19:10 사망자 56여명, 도청앞 광중에서 관을 놓고 추도식

20:00 학생수습위원회 구성-장례반, 차량통제반, 무기수거반, 홍보반 구성, 곳곳에 방치되어 있던 무기 1,500여정 회수,
         도청상황실에서 증명서 발급

20:00 담양에서 광주로 진입하는 차에 계엄군 발포, 도청 광장 군중 대부분 귀가하고 청년들 도청에 남아 치안 담당

22:00 수습위 회의 : 무기회수를 둘러싼 내부 대립 심화



5월 23일

 

00:40 지원동 숙실 부탁(조대 뒷산)에서 계엄군과 총격전

01:00 해남 우술재에서 교전, 시위대 20명 이상 사망 다수 부상

02:00 신군부 황영시 충정작정 계획 건의

06:00 광주시 안정 회복, 남겨 고교생 700명 시내전역 청소, 상가 영업 시작, 장례반, 총기회수만, 차량통제반으로 구분
         도청 중심으로 대자보, 시민군 용어 등장, ‘민주시민강령’선포

         1. 시민은 시민군을 믿고 적극 협조합시다.

         2. 시민군은 위장된 계엄군 및 불순분자를 주의합시다.

         3. 질서회복에 힘씁시다.

         4. 평소 생활로 복귀합시다.

08:00 교도소 앞 공수부대 총격

09:00 녹두서점에 모인 교수, 학생 시민궐기대회 계획

09:35 도청에 학생수습위원회 본부 설치

10:00 수습대책위원회 조직 개편

10:15 수습위원회 무기회수 시작

10:30 남녀고교생 동료 시신을 앞세우고 ‘우리의 소원을 통일’을 부르며 시위

10:40 도청 내 시신 가운데 화염방사기로 그을린 듯한 시신 여러 구 발견

11:00 부녀자, 시위대에 식사 공급

11:50 학운동에서 민간인으로 위장한 공수대원 2명 체포

12:00 800여명 총기 회수, 차량 통제반 차량 단속, 국군통합병원 앞에 계엄군탱크 2대 앞세워 바리케이드 설치 시민군과 대치

12:30 신군부 황영시 김기석 전교사 부사령관에게 무장 헬기 및 전차를 동원하여 시위대를 조속히 진압할 것을 지시

13:00 계염사 연행 학생 34명 석방

14:00 주남마을 양민 학살, 18명 사망, 수습위원 10명 계엄군의 반응을 살필 의도로 무기 100정 반납

14:10 영암읍에서 시민군에게 실탄 지급

15:00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장례준비 모금운동전개 1백만원 대책위에 전달, 디원동 버스 종점에서 총격전,
         계엄사 ‘경고문’을 전역에 살포

16:00 지원동 민가에 계엄군 난입, 피난가는 시민을 향해 난사, 학운동 자위대 수습위에 무기 반납 자위대 해체

16:30 희생자 시체 30여구 도청앞 상무관에 안치, 저녁 투사회보 제6호 배포

17:00 시민군 소속 차량 등록 : 219호까지 등록됨

19:00 교도소 앞 교전

21:00 목포역 시국 성토대회, 5만여 횃불시위



5월 24일

08:00 광주시내 생필품 품절, 무기자진 반납 시한 12:00까지 연장

09:00 작전을 위한 계엄군 배치

09:25 학동대치 지역에서 총격전

10:30 계엄군간의 오인으로 인한 사격, 31사단 96연대 3대대와 기갑학교 병력 사망 5명, 중상 11명, 경상 11명

10:35 정호용 특전사령관 교도소 방문

12:00 시체 3구 암매장 계엄군 무선교신 도청

13:00 계엄사, 무기 반납 시한을 18:00연장

14:05 계엄군의 오인사격, 효천역 전방 1KM지점 11공수와 보명학교 병력간 전투 군인 사망 9명, 부상 27명,
         민간인 사망 2명, 부상 7명, 장갑차 1대, 지프차 8대 파손, 진월동 양민학살 2명 사망

15:00 수백의 공수대 송정리 비행장에서 이동, 송정리에서도 헬기 기총 소사, 제 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시민들
         동네별로 모금한 쌀, 부식, 상금 등을 모아 도청에 전달

16:30 도청앞 상무관에 미확인 시체 40여구 안치

17:30 궐기대회 준비를 위한 집행부 구성

18:00 기동순찰대 활동 (출동 준비중인 시민군 기동타격대)

21:00 민간인으로 위장 계엄군 시내 투입



5월 25일

08:00 수습위 분열을 노린 ‘가짜 독침 사건’발생

09:50 시위차량으로 외곽지역 주민, 도청으로 수송

11:00 학생, 청년수습위, 민주인사 의견 수렴을 위한 회의 개최

11:05 기독교계 초교파적인 모금운동, 시신 120구로 늘어남

12:15 “신군부” 국방부내 육군회관에서 회의 ‘27일 00:01 진압키로 결정’

12:35 목포 비상구국기도회 열림

13:00 군통합병원으로부터 각병원에 산소공급

13:35 피난가던 청년 2명 산속에서 사망

14:00 남동성당 수습위, 도청으로 합류

14:30 계엄사 탄약 검사반 도청 침투 : 도청 지하실의 TNT조사

15:00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궐기대회 후 검정리본 패용, 가두시위, 궐기대회 후 YMCA에 학생 1백여명 모여
          김상집이 주도하여 조를 편성하고 지도부는 회함을 가져 도청에 들어가 투쟁적인 지도부 구성할 준비를 함

18:10 최규하 대통령 중 상무대 도착

19:00 광주시 당국 양세민에게 가구당 5,000원씩 지급, 정부미 6,000가마 방출

22:00 도청 수습위 투쟁 방향 둘러싼 토론 결과 ‘계속 항쟁’주장파 대세 장악

23:00 도청내 취사부가 나가버리자 송백회 여성들을 중심으로 3개조의 취사부 편성



5월 26일

04:00~06:00 외곽지역 주둔 계엄군 농성동까지 진입 (시민군 차량용 연료 차단 목적)

05:00 시민수습대책위 “17명이 총알받이로 나가 계엄군을 막자”고 결의, 진입현장에서 탱크앞에 드러누워 계엄군의 시내진입 저지

07:20 계엄군의 시내진입을 알리는 방송

09:00 수습위의 계엄분소 방문, 4시간 30분 대화

09:30 미국 항공 모함 코럴시호 제주도 남방 2백마일 해상회보 9호 배포

11:30~13:00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투사회보 9호 배포

14:00 광주시장에게 9개항 요구하여 보장 받음

          1. 1일 백미 1가마씩 제공하라

          2. 부식 및 연료를 제공하라

          3. 관 40개를 제공하라

          4. 엠브란스 1대를 지원하라

          5. 생필품 보급을 원활케 해 달라

          6. 치안문제는 경찰이 책임져라

          7. 시내버스를 운행하도록 하라

          8. 사망자 장례는 도민장으로 하라

          9. 장례비를 지원하라

15:00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궐기대회 후 농성동 계엄군과의 대치지점까지 가두시위후 돌아옴

16:00 김성용 신부를 추기경에게 보내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로 하고 탈출 시킴

19:00 외국인 207명 광주에서 철수

21:00 전교사 문관 도청 잠입, TNT뇌관분리제거 후 복귀, 특전대 하사관 사복 차림으로 시내 정찰

23:00 시민군 병력 배치, 계림국교, 유동삼거리, 덕림산, 전일빌딩, 전대병원옥상, 서방시장, 학동, 지원동, 학운동,
         계엄군 침투작전 개시

23:50 도청 상황실에서 서울 중앙청 상황실과의 “여기는 광주 도청이다. 오늘 밤 계엄군은 시내로 진입할 것인가?”
         “모르긴 하지만 안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만약에 계엄군이 들어오면 우리는 다이너마이트로 자폭한다.”는
         동화를 마지막으로 시외통화가 끊김, 도청 안의 모든 전등을 끄고 전투에 대비함

 

항쟁말기

 

5월 27일

00:00 시내전화 끊김, YMCA의 시민군 도청으로 들어가 무장한 후 주요 지점 배치, 계엄군의 진입을 알리는
         박양순(여, 21, 송원전문대 2)의 가두방송에 호응하는 시민들 도청으로 집결하여 무장하고 전투준비

02:30 농성동에서 시민군과 총격전, 도청내 청년, 학생들 비상태세 돌입

03:00 계림국교 앞 교전 탱크 앞세운 계엄군, 지원동 서방 한전입구 일제히 진입

03:30 계엄군 광주 기습 (외곽 3개소에서 총격전)

04:00 도청 앞 완전 포위, 금남로를 중심으로 시가전, 계엄군이 항복 권유하자 시민군 쪽에서 쏜 총알이 서치라이를 맞추어
          박살냄, 계엄군 일제사격 개시

04:10 도청 뒤쪽 수비하던 40여명의 시민군 불안하여 앞쪽으로 이동, 제3여단 특공대 공수부대 뒷담을 넘어 시민군 사이로
         섞여 들어오며 난사

04:30~04:55 도청 민원실 2층에서 윤상원 등 항쟁지도부 간부들과 40~50명의 청년, 학생들 엎드려 사격,
                  - 시민군 실탄이 바닥나고 사기가 떨어지면서 ‘항복!’ 외침, 항복한 시민군을 ‘극렬’, ‘실탄 10발’,
                  ‘권총 소지’등으로 분류하여 연행함 - 3공수에 의해 도청 완전 점령됨

04:40 YMCA격전,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 접전, 헹기로 군방송시작

05:00 계엄분소장 담화발포, 군의 진입을 알리는 방송 계속됨

05:04 11공수 관광호텔, 전일빌딩 점령, 공설운동장, 광주천변, 백운동 장악

05:06 7공수 광주공원 완전점령, 광주시 주요 공공기관 점령

05:20 도청시민군, 전원 연행

05:23 광주시 계엄군 완전 점령

06:00 KBS를 통해 ‘폭도들은 진압됐다. 시민들은 위험하니 집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방송 실시 (영어로도 방송됨)

07:00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 도청 인계

07:30 공무원 출근 종용, 도청 옥상 스피커에서 군가 울려퍼짐

07:30~09:30 기갑학교 전차 14대 APC 1대 무력시위, 금남로 - 도청 - 학동 - 시민회관 - 광주구역 - 부대,
                    공무원 근무개시, 시내전화 개통

09:00 계엄군 가택수색으로 청년들 연행

10:00 주영복 군방장관 광주방문

10:50 국방장관, 육군참모차장, 2군사령관, 계엄분소장 등 브리핑 받고 철수

11:00 목포 시민들 제5차 민주헌정수립을 위한 목포시민 궐기대회

14:35 전 학생수습위원장 김창길, 도청에 자진 출두

18:00 계엄사 2차 발표

22:50 목포시민, 3,500여명 횃불시위



5월28일

04:00 계엄군, 목포역 점거 시위대 체포, 연행

16:00 광주 시외 전화 소통



5월 29일

11:15 희생자들의 시신을 도청 소속 쓰레기 청소차에 실어 망월동으로 운구



5월 31일

계엄사령부 ‘광주사태의 전모’ 발표

민간인 1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 등 170

 

  5.18이후
프롤로그
1980년 광주시민들이 목슴을 걸고 싸웠던 5.18민중항쟁 정신은 민주주의와 정의의 정신이다.
우리 한국인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이 공유해야 할 인류 최고의 가치를 광주에서 구현하고 실천했던 것이다.
이 숭고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광주시민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모든 국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군부독재에 맞서 싸웠고, 결국 문민정부를 만들어냈으며, 드디어 1998년에는 국민의 정부를 출범 시켰다.
해방이 된 후 가장 떳떳한 역사를 창조한 주역이 된 것이다. 광주항쟁은 한국 민주화운동, 나아가 아시아 민주주의의 승리의 길에 획기적인 이정표를 세운 것이다.
엄청난 희생을 치루었던 유가족과 부상자, 구속자들은 점차 명예를 회복하였고, 5.18은 1997년 국가 기념일로 제정되었다.

80년대
1980년
5월 29일 : 5월영령 망월동 안장 - 126구의 시신을 쓰레기차에 실어 제 3묘역에 안장함
5월 309일 서울 연지동 기독교회관 6층에서 “학살정권 타도”를 외치며 김의기 열사 투신
6월 9일 서울의 신촌 사거리에서 노동자 김종태 열사 분신 (95년 망월동으로 이장)
9월 1일 전두환 11대대통령 취임
12월 9일 광주 미문화원 방화


1981년
3월 3일 전두환 12대 대통령 취임
5.18 민중항쟁 1주기 추모식 - 광주민중항쟁 1주기 추모식 경찰에 의해 원천 봉쇄로 열리지 못함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문화원 방화
10월 12일 박관현 열사 옥중 사망
12월 15일 5.18희석용 조직 - 전남지역 개발 협의회 창립

1983년
11월 12일 레이건 방한 - 반미시위로 전개됨

1984년
5.18 민중항쟁 4주기 투쟁, 11월 18일 민정당사 점거 시위

1985년
5월 23일 서울 미문학원 점거
8월 15일 금남로에서 노동자 홍기일 열사 분신
12월 2일 광주 미문화원 점거

1986년
이재호 김세진 열사 분신 - 반미분신항거
11월 광주 직할시 승격 - 전두환 정권의 선심공세

1887년
3월 미국무장관 솔츠의 방한을 반대하며 광주 출신의 표정두씨가 분신
12월 노태우 광주유세에 돌팔매, 최루탄 공세

1988년

4월 총선, 민화위 광주문체 성격 규정 - 국회사상 최초 여소야대 정국 형성
11월 국회 광주 특위 및 정문회 가동

1989년
5월 10일 이철규 열사 변사체 사건 발생

90년대초
1990년
2월 6일 3당야합, 민자당 출현

1991년
4월 26일 - 학생시위에 대한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강경대군 사망
5월 25일 - 박승희 열사의 장례식이 도청 앞에서 20만 인파가 모인 가운데 진행됨

1992년
3당야합으로 김영삼이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지목되고, 대통령에 당선

1993년
3월 18일 - 김영삼의 망월동 참배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저지

1995년
7/14 - 5.18 학살자 처벌을 위한 공동대책 위원회 구성
7/18 - 검찰 5.18 학살자들에 대한 공소권 포기 발표 - 각계각층에서 비난성명
7/19 - 5.18 유족과 부상자 등 150여명 명동성당 농성 시작
7/20 - 민변, 위중협의로 전두환, 이희성등 7명을 극회위중죄로 고발
7/21 - 광주지역 조찬회동으로 [5.18 학살자 재판회부를 위한 공동 대책위원회]를 결성, 기자회견
7/24 - 정동년 5.18민중운동연합 의장 등 5.18고소인 322명이 헌법소원 제출
7/25 - 김상근 5.18국민위원회 상임대표와 정동년 5.18민중운동연합 의장 고소인 322명과 고발인 294명을 대표하여 항고제출 (7월 28일 기각됨)
7/28 - 5.18국민위원회와 광주전남 공대위 공동주최로 장충단 공원에서 2차 국ㄱ민대회 개최

 

7/29 - 대검에 재항고장 재출, 다시 기각됨
7/31 - 고려대 교수 131명 ‘검찰수사와 결정에 대한 우리의 견해’발표
8/3 - 오후 7시부터 “5.18학살자 처벌 특별법 제정을 위한 범국민서명운동”전개
8/11 - 한총련소속 학생 60여명 명동성당에서 [5.18학살자 처벌을 위한 단식농성]돌입
8/11 - 정동년 등 303명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 14명을 직무유기 협의로 고소
8/14 - 민교협 교수, 농성돌입(16일까지 진행됨)
8/21 - 전국연합과 민노총(경찰의 5.18대회장 불법난입, 기자구타, 폭력진압 규탄대회)개최
8/23 - 서울시 의회 5.18특별법 제정 결의문 채택
8/24 - 전국의 서명교수 [5.18내란 주동자 구속기소 및 특별법 제정촉구를 위한 전국서명교수 결의대회]를 개최하고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등에 관한 법률(안)]과 [헌법파괴적 범죄등의 공소 시효에 관한 법률(안)] 임법청원

8/25 - 교수대표단 헌법재판소를 방문하여 검찰의 5.18학살자 불가소처분에 대한 헌법소원청구와 의견서 제출
8/26 - 조계동 스님과 집행간부 471명 5.18학살자 심판촉구 성명발표
9/4 - 예장 목회자 550여명 5.18내란주동자의 처리에 대한 긴급 기자회견
9/5 - 기독교 장로회 총회에서 5.18결의문 채택하고 특별법 서명운동에 나서기로함
9/11 - 5.18국민위원회, 전국연합, 민변 등 정기목회 개원에 즈음한 5.18성명서 발표
9/21 - 도청앞 5.18학살자 처벌 특별법 제정을 위한 시민학생 결의대회
9/22 - [5.18국민위],[광주공대위],[전국연합]28만5천여명 서명과 5.18특별법 제정을 위한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 - 새정치국민회의, 5.18관련 3개법안 국회제출 - 전남지역 교사 4백 7명 5.18관련성명발표

9/23 - 민주당, ‘12.12군사반란 및 5.18내란사건 처리를 위한 특별조치법’확정 국회제출, 5.18특별법제정을 위한 영호남 청년학생 한마당(24일까지)
9/26 - 전북지역 천주교와 원불교등 전북지역 4개종단 연합 대표자 14명, ‘전북지역 종교 지도자 선언문’을 발표
9/28 - 서울지역 초.중.고교 교사 1천5백여명 ‘5.18특별제정을 위한 서울 교사 선언’발표
9/29 - 한총련, 29~30 양일간 ‘5.18총궐기 동맹휴업’
9/30 - 서초동 변호사 회관에서 ‘5.18내란주동자 구속기소 및 특별법 제정촉구를 위한 전국대학 서명교수 모임’ (전국 6천4백여명)발족식
10/6 - 경기지역 교사 1367명, 5.18선언
10/10 - 노태우의 ‘5.18은 중국문화혁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는 망언 이후 시민사회단체 일제히 규탄성명발표
10/12 - 시민사회단체, 정오부터 서울 11군데 등 전국 공동가두서명을 진행

10/13 - 전남지역 농민 2천여명, 5.18선언발표
10/14 - 대학로에서 5,000여명 참석한 가운데 [김영삼 정권 실정규탄과 민주개혁쟁취를 위한 국민대회] 개최
10/16 - 한총련 [5월 학살자 전두환, 노태우 처벌과 특별법, 특별검사제 도입을 위한 구국결사대] 13명, 민자당사 기습점거 후 전원연행됨
10/16 -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120여명, 5.18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촉구를 위한 거리시위 및 가두서명
10/17 - 서울시 의원 1백명, 5.18특별법 제정과 책임자 기소촉구 시한부 (~19)농성 돌입
10/19 - 캐나다 한국청년연합 30여명, 캐나다 방문중인 김영삼대통령 숙소 로얄요크호텔앞에서 2시간동안 침묵시위
10/20 - 김광현 여수시장 등 여수지역 인사 172명, ‘5.18특별법 제정촉구시국선언’발표 후 거리행진

10/21 - 인천시의회, 5.18특별결의문 채택, 전국 42개대학 법학교수 127명, ‘5.18관련헌법소원에 대한 법학교수 의견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
10/24 - 제주지역 초.중.고 교사 173명, [5.18관련자 불가소처분과 관련한 성명]
10/25 - 서울지검 공안1부, 민변이 7월 21일 ‘전두환, 이희상 등 7명이 88~89년 국회청문회에서 5.18관련해 위중했다’며 고발한 사건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림
10/26 - [5.18학살자 처벌 특별법제정 범국민비상대책위원회]제출
10/30 - 전교조 제주지부 등 제주지역 30여개 단체, ‘5.18특별법 제정을 위한 제주지역 공동대책위원회’결성
11/3 - 4.19와 6.3세대 4백여명, 5.18관련자의 즉각구속과 노태우 재산몰수 대통령 부정축재시국선언문발표
11/4 - [5.18학살자 처벌 특별법 제정 범국민 비상대책위원회] ‘노태우 구속과 92년 대선자금 공개, 5.18특별법 제정 제 6차 국민대회’와 ‘제 1차 국민행동의 날’개최
11/7 - 금융권과 공공부문 1백여개 노조가 참여하는 ‘5.1학살자처벌 특별법 관철을 위한 노조대표자 서명추진위원회’, 연대성명을 발표하고 노조대표자 1천명돌입
11/11 - 5.18특별법 제정, 노태우 구속과 92년 대선자금 공개 촉구 7차 국민대회
11/16 -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안충석, 문규현, 장용주 신부등 1백여명), 7시 30분 명동성당에서 ‘정부 도덕성 회복촉구와 5.18광주사태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을 위한 시국기도회’가짐(5.18특별법제정을 위한 국민투표 실지 제안)
11/24 - 김영삼대통령, 5.18특별법제정을 민자당에 지시
11/25 - 5.18특별법제정, 김영삼대선자금공개촉구 제 8차 국민대회 개최
11/29 - 5.18범국민비상대책위원회, 국회의원회관에서 5.18특검제 공청회 개최, 5.18헌법소원제출자, 헌법소원취하
11/30 - 검찰 [12.12 및 5.18사건 특별 수사본부] 발족
12/2 - 전두환 전 대통령, 검찰소환 조사에 불응하는 대국민성명 발표 후 고향인 합천으로 도주 전두환씨에 대해 사건구속영장 발부, 12.12사건에 대해 노태우씨 1차 서울구치소 방문 조사, 전국연합 오후 3시 종묘공원에서 [5.18특별검사제도입촉구 및 공안탄압규탄 결의대회]개최
12/3 - 전두환 전 대통령, 합천에서 감찰수사관에 의해 구속이 집행되어 수감, 안양교도소에 1차 방문조사
12/5 - 5.18범국민비상대책위원회, 5.18범국민단일안 마련 발표

12/6 - 80년 계엄포고령 위반구속, 피해자모임, [80년 민주화운동관련 계엄포고령 피해자 협의회(의장 이우재)]구성
12/9 - 12.12, 5.18 관련자 전원처벌 특별검사제 도입촉구 제 9차 국민대회 개최
12/15 - 헌법재판소, 5.18 헌법소원발표(검찰의 공소권없음결정을 부당)
12/16 - 최규하, 대국민담화를 통해 검찰의 조사를 공개적으로 거부
12/19 - 5.18범대위, 국민회의,민주당과 특별법의 올바른 제정을 위한 회담, 국회 여야 합의로 5.18특별법제정
12/20 - 전두환씨 국립 경찰병원에 이송
12/21 - 5.18범대위, 5.18특별법제정 운동 성과보고대회 개최
12/22 - 5.18공대위 기자회견(특별법 제정에 대한 입장)
12/27 - 검찰의 현지수사에 대한 입장발표(검찰수사 의견서 제출)
12/31 - ‘95’광주시민 송년한마당 (5시 YMCA)

1996년
1/4 - 검찰수사 실무대책위 구성
1/10 - 김동원 교수 등 5.18 교수 구속자, 가혹행위로 당시 함수부 고(광주지검)/기자회견
1/16 - 오전 9시 / 5.18공대위 기자회견 오전 9시 30분 / 5.18여성계 피해자 기자회견, 고소(광주지검)
1/17 - 오전 9시 / 5.18당시 학생팀 -정동년 외- 기자회견, 고소(서울지검) 12시 / 5.18당시 남만 피해자 (박상철, 김유성, 손제선씨)변주나교수 주선으로 치료자 미국으로 출국
1/17 - 12.12, 5.18특수부 : 이학봉, 유학성, 황영시 구속/ 장세동, 최세창 구속 연기 전두환 5.18특별법 위헌이라며 [위헌여부심판제정신청서]를 서울 지법에 냄
1/18 - 서울 지법 형사 합의21부 김문관 판사, 위헌제청에 대해(12.12는 이유 있다며 받아들여)
1/20 - 전두환씨 변호인 “5.18 재수사” 헌법소원을 냄, 5.18공대위 [5.18진상규명과 학살자 전원 처벌 촉구대회] 오후 3시 YMCA 무진관에 모여 학살자들 전원 처벌할 것을 촉구
1/20 - 전국연합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5.6공 청산 집회]가져 민변 지난 7월 검찰이 내린 결정에 대해 서울 고법에 재정신청을 내
1/22 - 노태우 [5.18 재수사 헌법 소원], 현재 [5.18 특별법 위헌 심판 사건] 및 [5.18 재수사 헌소] 심리 착수
1/23 - 전,노씨 등 5.18관련자 8명 내란협의 기소, 5.18공대위 검찰 1차 기소에 대한 논명 발표
1/24 -이수성 총리에 면담요구 서한발송(2차), 공대위 개편과 사업방향에 대한 토론회(오후6시)
1/26 - 공대위 대표단(강신석상임위원장 등)검찰정 항의방문(오후 2시)
1/31 - 공대위 대표단 서울지검 항의방문(오후 2시), 공대위 대표단 현재에 5.18 위헌 소송에 대한 의견서 제출
2/26- 전두환 비자금 1차 공판
3/11 - 12.12, 5.18 1차 재판
8/5 - 27차 공판, 1심 결심 및 검찰 구형
8/26 - 28차 공판, 1심 선고
10/7 - 항소심 첫 공판, 최규하 전대통령 등 33명 중인채택
10/14 - 2심 2차 공판, 증인신문 개시
10/28 - 2심 7차 공판, 최규하 전대통령 증인 불출석, 재소환 결정
11/11 - 2심 10차 공판, 최 전대통령 강제구인 결정, 검찰 및 변호인측 7대 쟁점 구두변론
11/14 - 2심 11차 공판, 최 전대통령 강제구인, 항소심 결심 및 검찰 구형
12/16 - 2심 12차 공판, 항소심 선고
12/26 - 대법원, 전노사건 형사 1부 배정

1997년
4/17 
- 대법원 전두환 무기징역
- 노태우 17년 형 최종 확정
- 황영시ㆍ허화평ㆍ이학동 징역 8년
- 정호웅ㆍ이희성ㆍ주영복 징역 7년
- 허삼수 징역 6년
- 최세창 징역 5년
- 차규헌ㆍ장세동ㆍ신윤희ㆍ박종규 징역 3년 6월
- 국무회의 5.18 민중항쟁 국가기념일 제정

이후
1999년 
5/4 5.18 자유공원 준공(영창, 법정 이전)

2000년
5/18 정부주관 5.18민중항쟁 20주년 기념식

2001년
4/27 5.18기념문화관 준공

2002년
1/26 광주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제정 공포
7/10 국립5.18묘지규정 공포
7/15 국립5.18묘지규정시행규칙 공포
7/26 광주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법률 시행
국립5.18묘지 승격(5.18묘지 -> 국립5.18묘지)

 

 

'남도 문화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래마을 엣집 체험  (0) 2014.08.14
중흥산성쌍사자석등  (0) 2014.07.13
생룡동의 지명유래  (0) 2013.06.15
효령동의 지명유래  (0) 2013.06.15
충효동의 지명유래  (0) 2013.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