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룡동 - 지명유래]
유래

생룡동동전경
생룡동은 후백제 견훤대왕의 생가마을이라는 설이 있어 생룡이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는데, 생룡 남쪽에는 지내(못안)마을이 있고, 지내
남동쪽에는 장운동으로 가는 순산재, 서남편에는 생룡들에 물을 대는 대야제(大野堤)가 있다.
생룡(生龍)은 본래 광주군 우치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동리(內洞里), 지내리(池內里), 용전리(龍田里), 서작리(西作里)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생룡리라 하였고 1957년 광주시에 편입되었으며 1957년 동제 실시에 따라 리(里)를 동(洞)으로 고치고 우치동의 관할이 되었다가 1998년
9월 21일 건국동으로 통합되었다.
현재 생룡동에는 지내, 생룡, 모산마을과 우치공원 등이 포함된다
소지명
- 못안, 지내, 지내리 : 생룡 남쪽에 있는 마을. 연못 안쪽이 됨.
- 생룡 : 생룡동
- 대야제 : 생룡 들에 물을 대는 역할. 현재 패밀리랜드 옆 저수지임.
[생룡동 - 유물유적]
비
* 복룡사유허비(伏龍祠遺墟碑) : 생룡동 314번지, 1914년 건립
문춘공 복애 범세동을 주축으로 범가용, 범천배,
범기생, 범기봉을 배향한 복룡사를 1825년에 세웠으나, 1868년에 훼철되고 현재 유허비만 남아있다.
이 비는 비각(碑閣)과 함께 현재의
용호재 옆에 위치해 있으며 비각은 서방 1칸으로 정평주초 위에 평주를 세워 3량집으로 만들어졌다.
성지
*생룡동 성지(生龍洞 城址) : 생룡마을, 1894년
생룡마을 뒤에서 죽취봉 쪽으로 가파른 구릉을 따라가면 금성 범씨 여환의
묘와 견훤대라 부르는 돌무더기 꼭대기까지 약 2.5㎞에 걸쳐 토축과 일부 열을 지은 돌들이 폭 2~3m로 길게 뻗쳐 성터의 흔적이 드러나 있다.
<문화유적총람>에는 이 성지를 「우치산 성지로 1894년 당시 국내외 정세에 대비 피난처를 생룡마을의 범경준, 범윤길, 범윤기 등이
축조, 주위 5리쯤 된다」고 하며 전해지는 말로는 견훤대 또는 후백제성이라고도 한다.
이 성터는 자연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토석
혼축성인데 석축은 토축 위에 2~3단의 할석으로 쌓은 흔적이 있다. 중간 중간에는 문주로 보이는 주초석이 보이며 장대석도 있다. 견훤대라 부르는
꼭대기에는 반경 20m를 할석으로 둘러 석축을 쌓았고 생룡과 모산 마을 뒤에는 수많은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들이 논밭에 널려있다. 이들 토기
조각들로 보아 통일 신라에서 조선시대까지 이용된 성곽으로 볼 수 있다.
노거수

<생룡동 당산나무>
* 생룡마을 당산나무 : 생룡동 391(생룡길 121), 수령 약 50년
마을 뒤쪽에 당산나무가 길 어귀에 자리잡아 넓은
들판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연자방아를 이용하여 사람들이 앉아 쉴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당산제는 지내지
않고 있다.
재각

<생룔동 용호재>
* 용호재
용호재는 금성범씨재실(錦城?氏齋室)로써 고려 말엽 정충탁절(貞忠卓節)로 이름이 높던 복애 범세동 선생을 주벽으로
하여 덕행이 높으신 범가용, 학행이 높으신 범천배와 임진왜란 중 진주대첩에서 순국한 범기생, 범개봉 두 분을 배향하던 복룡사를 훼철(毁撤)한
자리에 세운 재각이다. 고려 공민왕조에서 벼슬이 덕령부윤간의 대부후덕군에 이르렀고 고려의 국운이 다할 때 두문동 72현의 한 분으로 전조에
충절을 다한 분이었던 범복애 선생은 조선 순조 때에 포양되어 복룡사를 세우고 향화를 올리다가 고종 4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됨에 따라
그 후예들이 이곳에 용호재를 창건하고 복애선생의 사적을 기록한 유허비를 세우게 되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