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등동 - 지명유래]
유래
장등동 전경
장등동(長燈洞)은 본래 광주군(光州郡) 하대곡면(下大谷面) 지역으로서 사방에 100m 이상의 크고 작은 산들이 있는데 이 때문에 긴등성이
밑이라 하여 장등(長嶝) 또는 장동(長洞)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복정리 일부와 오치면의 문산리 일부, 상대곡면의 용호리를
병합하여 장등리라 해서 석곡면의 관할이 되었다가, 1955년 광주시에 편입되고, 1957년 동제 실시에 따라 장등동과 운정동이 통합되어
장운동회의 관할이 되었다가 1998년 석곡동의 관할이 되었다.
장등동에는 장등마을과 용호마을이 있는데, 장등마을은 일찍이 감남골,
나무쟁기, 한태골, 안골, 오록골, 성적골, 쇠목골, 너무난태골 자드락을 일구고 말리걸들을 기반으로 큰 마을이 되었다. 1986년
한국전력변전소가 들어서 ‘등(燈)’자 땅이름을 실감케 했다.
소지명
- 동펜 : 장등 동쪽에 있는 마을
- 똘뚝 : 장등앞에 있던 똘(도랑) 뚝가에 있는 마을
- 바우배기 : 장등 북쪽에 있는 마을. 등성이에 바우(바위)가 박혀 있음
- 서펜 = 새터 : 장등 서쪽에 새로 된 마을
- 연봉징이 = 용호 : 장등동에 있는 마을
- 장동, 장등 → 장등동
- 용봉장 : 장골 동남쪽 길가에 있는 마을에 섰던 시장
[장등동 - 유물유적]
탑
* 오층석탑 : 국립광주박물관
장등동 폐사지에서 발견된 유물로 밭 주인이 삭토 작업을 하던 중 묻혀 있던 석재들을 발견,
1982년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옮겨져 복원되었다.
발견 당시에는 상륜부가 없는 상태였다. 1층은 비교적 높은 조각이며 2층부터
줄어들었다. 옥개석은 좁아 두터워 보이며 추녀가 직선을 이루다가 전각머리 위에서 반전시킴으로써 무거워 보인다. 1층과 2층의 옥개석 받침은
5단인데, 3층 이상은 3단으로 줄어든다. 이러한 방법과 단층의 기단 시설은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에서 벗어난 고려 초의 작품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재각
<장등동 종묘재>
* 종묘재(宗墓齋) : 장등마을 입구, 1884년
천안 전씨 문중 재각으로 현재의 건물은 1975년도에 중건되었으며, 제당
앞에는 종묘재중건비(宗墓齋重建碑)가 서 있다.
건축형태는 콘크리트 기단 위에 정평 주초를 놓고 원주의 기둥을 세웠으며 정면 4칸, 측면
1칸의 평기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주두에는 평주와 평주를 가구한 창방과 소로 장혀를 결구하여 굴도리를 가구하였으며 내부는 대청 1칸,
온돌방 2칸으로 되어 있다.
천정은 연등 천정이며 사다리꼴 판대공을 종보 위에 올려 그 위에 종도리를 가구한 5량집으로 되어
있다. 창호는 좌우에 2분합문을 내고 청판을 달았으며 중앙 2칸은 들쇠를 두어 들어열개의 4분합문으로 되어 있으며 띠창살이다. 상인방 위에는
봉창이 있다. 담장은 없으나 대문은 소슬대문이며 홍살을 꽂았다. 기둥 전면에는 연꽃을 조식한 후 후세의 귀감이 될 만한 글귀를 새겼다
* 사성재(思誠齋) : 장등동 산 170-2(탑골길 35), 1970년
사성재는 나라 정씨 문중 재각으로써 장등 저수지 및
정구 신도비와 함께 위치해 있다. 건축형태는 콘크리트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았으며 그 위에 원주(圓柱)를 세워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일식기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서까래 각 모서리에는 4개의 활주를 세웠으며 처마는 홑처마로 되어 있고 양철물받이를 달았다.
전면에
창방과 소로 장혀 굴도리를 결구하고 내부는 대청과 다락이 달린 온돌방 2칸을 내고 분합문으로 구획하였다. 마루는 장귀틀과 동귀틀을 짜 맞춘
귀틀마루이다. 대청 뒷편은 판문 1개를 달아 출입구를 만들었다.
창호는 온돌방 좌우측에 2분합 경문을 달고 중앙 1칸은 들쇠에 의해
들어열개의 4분합문이며 청판을 달은 띠창살으로 되어 있다. 인방 아래는 머름을 두었으며 상인방 위에는 봉창을 내었다. 온돌방 뒷편에 함실을
두었고 대문은 평문이며 좌우측 벽에는 산수화를 그려 놓았다.
* 삼덕재(三德齋) : 장등동 643(탑골길 47), 1967년
삼덕재는 파평 윤씨 재각으로써 삼각산과 윤씨 가운데
덕(德)자를 인용하여 삼덕이란 재실명을 붙였다 하며 제일(祭日)은 음력 10월 19일이다.
건축형태는 화강석 두벌 대기단을 조성한
후 신발돌 4개를 놓고 덤벙 주초 위에 원주 기둥을 세워 정면 4칸, 측면 1칸의 일본식기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처마 밑에는 4모서리에
활주를 세웠으며 처마는 양철물받이를 달은 겹처마이다.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내부는 대청 1칸, 좌측에 온돌방 1칸을 배치하였다. 천정은
연등천정으로서 판대공을 종보 위에 올려 종도리를 가구한 5량집으로 되어 있다. 대청 뒷편에는 2분합문이 달려있고 온돌방 뒤에는 함실과 좌측에
다시 2분합문을 내었다. 주두에는 창방 소로 장혀 굴도리를 가구하였으며 창호는 3분반합 겹문으로서 들쇠가 있고 띠창살으로 되어있다. 인방
하부에는 머름을 설치하였고 창호에는 청판도 달려있다. 대문은 평문이며 담장이나 재기(齋記)는 보이지 않는다.
[장등동 - 민속문화]
당산제
용호마을 당산제
이 마을의 당산은 모두 3곳으로 큰 당산, 큰 마누라 당산, 작은 마누라 당산으로 불리워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곳은 큰 당산 하나 뿐으로 마을 윗쪽 18번지에 있다. 이 당산나무는 400년 된 느티나무로 밑둥은 고목이 되어 구멍이 뚫려 있다. 이 나무에는
옛날 마을에 도둑이 들어 소를 훔쳐 갔으나 밤새도록 나무 주위만 돌다가 잡혔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나머지 두 당산은 마을 앞 동쪽에
있었는데 모두 비슷한 시기에 죽고 없다. 이 마을의 당산제는 음력으로 정월 맨 처음 정일(丁日)에 제(祭)를 모시는데 만약 설날과 겹치면 그
다음 정일(丁日)로 바꾸었다고 한다.
제관은 집관 1명, 축관 1명, 유사 1명 등 3명을 선정했는데, 특히 유사로 뽑히면 모든
정성을 다하여 모셨다고 한다. 유사는 섣달 스무날 정도에 마을 어른들이 모여 선정하는데, 일단 유사가 선정되면 상가(喪家)나 산고(産故)든 곳은
가지 않았으며 궂은 음식은 먹지 않는 등 제가 끝날 때까지 가리는 것이 매우 많았다.
금줄과 금토는 제일(祭日)의 일주일 전에 하는데
마을 입구와 당산 주변에 했으며 이 기간에는 다른 마을 사람의 출입을 금했다.
제물은 일반 가정에서의 방안 제사 수준으로 준비하고 특히
돼지는 통으로 진설한다. 또한 제물의 준비는 깨끗하게 하며 맛을 본다거나 특별한 양념은 하지 않고 소금으로 간만 약간 했다. 진설은 큰
당산에서만 했고 할머니 당산에서는 술잔만 올리고 굿을 친다.
이 마을의 굿은 초저녁에 마을을 돌며 굿을 치다가 시간이 되면 유사 집으로
가서 제물 등을 가지고 당산에 오른다. 제물은 준비한 그대로 진설하기 때문에 특별히 제물 등은 준비하지 않고 자리는 유사 집에서 가져와
사용했다.
큰 당산에는 제관들과 농악대만 참여하는데, 이 때 제관들의 옷은 깨끗하게 손질한 평상복을 입었다. 소지와 간단한
음복(飮福)이 끝나면 당산 옆에 헌식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진설된 음식을 조금씩 덜어 백지에 싸서 묻는다. 당산에서의 제(祭)가 끝나면 나발을
불어 제의 끝을 마을에 알렸다. 제가 끝나면 십여 일 정도 걸궁을 치고 2월 1일(초하룻날)에는 당산제, 걸궁 등을 총결산하고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한다. 이 관행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2월 1일에 마을 회의를 한다. 용호마을의 당산제는 일제말(日帝末) 대동아 전쟁 때 일제의 억압 때문에
잠시 사라졌다가 해방 후부터 1993년도까지 지냈다고 한다.
전설
옛날 이조 시대에 이 마을에 ‘박학’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 사람이 “장등리 앞으로 쇠바퀴가 구르고 거미줄이 쳐지면 마을을 떠라”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마을 어르신들은 그 말이 딱 맞아 떨어졌다고 입을 모으곤 한다. 여기서 ‘쇠바퀴’란 일제 시대의 우리 나라의
곡식이나 가축을 이송해 가는 열차를 의미하고, ‘거미줄’이란 최근에 장등마을 앞에 변전소가 생기면서 하늘을 빽빽이 뒤덮은 전기 줄을 의미한다고
한다.
* 제보 : 고재학, 장등동 596번지
세시풍속
장등마을에는 매년 정월 초하룻날이면 마을에 합동 세배식이 있다. 이 날에는 합동으로 차례상을 차려 두고 조상님께 세배도 하고, 마을
어르신들께도 합동 세배한다.
또 매년 2월 초하루 날에는 마을에서 제일 큰 행사인 마을 총회를 하는데, 이 회의에서는 한 해 농사에
대해서 전반적인 계획도 세우고 마을의 대소사(大小事)에 대해서도 논의한다. 이 날을 ‘콩(나락)을 볶아 먹는 날’이라고도 하는데, 그 의미는
콩(나락)을 볶아 먹음으로써 벼멸구를 없애기 위함이다.
이 날 회의가 끝나면 마을 잔치가 벌어지는데, 이 때 농악놀이를 하면서 한 해의
풍년 농사를 기원한다.
* 제보 : 고재학, 장등동 596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