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문화재

일곡동의 지명유래

월명실 2013. 6. 15. 09:38

 

[일곡동 - 지명유래]

유래
일곡동 전경

일곡동 전경

일곡동이 지명으로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1789년 <戶口總數>에서이다. 본래는 큰 마을이라 하여 ‘한실’이라 부르다가 마을 이름을 한자로 바꾸면서 ‘一曲’이라 했다.
본래 광주군 석제면 지역으로 1792년까지는 一曲(일곡)이라 하였고, 1795년부터는 一谷(일곡)으로 1801년에 日谷(일곡)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一洞(일동)리를 병합하여 日谷(일곡)리라 하고 본촌(芝山)면에 편입되었다. 1957년에 광주시에 편입되었고, 1957년 동제 실시에 따라 본촌동의 관할이 되었다가 1985년 10월 8일 서산동의 관할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광산 노씨(光山 盧氏)이다. 22세손인 흔동(欣東)이 현 우치공원 맞은편에 있는 모산마을에서 이주해 와 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의 아들인 희서(希瑞 : 1558-1592)의 묘가 일곡마을 뒷산 초장골(超葬洞)에 모셔져 있어 이때부터 대대로 터전을 마련했던 것 같다. 이보다 약간 늦은 시기에 광산 이씨(光山 李氏) 11세손인 남(楠 : 1603-1653)이 목포 달동네에서 옮겨와 광산 노씨와 함께 마을을 이루면서 살았다.

소지명
  • 가마보-재 : 일곡에서 내지(동물원)로 넘어가는 고개
  • 거시-갱변 : 다리걸 위에 있는 들. 냇가에 있음
  • 건너-물(마을) : 일곡에 있는 동쪽에 있는 마을 일부분
  • 구레-실 : 일곡마을 앞에 있는 들.
  • 구상-골 : 아홉무덤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
  • 노린적-굴, 황적-곡 : 선산홍굴 아래쪽에 있는 들.
  • 황적곡논 : 큰말 앞에 있는 들. 누런 모랫벌이 있음.
  • 늑두-굴(골) : 소소리 동쪽에 있는 골짜기.
  • 다리-걸(들) : 삼각동에서 일곡동으로 오는 입구에 있는 다리 옆들.
  • 당산이-재 : 일곡 동쪽에 있는 재
  • 모룡-동 : 모룡대 옆에 있는 마을.
  • 서남쟁이(들) : 심바골 동쪽에 있는 들. 정자나무인 서나무가 있었음.
  • 서-촌(마을) : 일동
  • 소소릿-재 : 일곡에서 소소리로 넘어가는 고개.
  • 소소리(골), 우성곡 : 일곡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쇄소-골 : 노린적굴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수랑-골 : 서남쟁이 동쪽에 있는 들. 수랑이 많음.
  • 아랫-고개 : 청가메등 위쪽에 있는 고개.
  • 청가메-등 : 아랫고개 동쪽에 있는 등성이.
  • 억산이-재 : 일곡에서 용두동으로 가는 고개
  • 잉어-등 : 가래들 동쪽에 있는 등성이. 잉어같이 생겼음.
  • 장군대록-골 : 노린적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큰 바위에 발자국이 있는데 장군이 지나면서 디딘 것이라 함.
  • 장잿-재 : 솔청등에서 본촌 공단으로 넘어가는 고개.
  • 진-골 : 일곡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초장-등 : 소소리 남쪽에 있는 등성이. 옛날에 초분이 있었음.
  • 큰갯-재 : 내촌으로 가는 고개.
  • 큰-몰 : 일곡마을 중앙이 됨.
  • 한새-봉, 한시몰랭이 : 일곡 북쪽에 제일 높은 산.
  • 일-곡, 동촌 : 일곡동에서 으뜸되는 마을.
  • 일-동, 서촌 : 일곡 서쪽에 있는 마을.

 

[일곡동 - 유물유적]

누정

* 모룡대(慕龍臺)
일곡동 살레시오고 입구 정류장 뒷산 근처에 위치, 1934년

모룡대(慕龍臺)는 암반전면에 [谷隱盧公 勳奎之阡]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모룡대는 곡은(谷隱)의 아들 노종구가 부친의 유적을 기념하기 위해 축조한 건물이다. 내부에는 모룡대 기문을 비롯하여 많은 기문이 현액되어 있다. 관련 문헌에 의하면 모룡(慕龍)의 ‘龍’ 은 임금을 상징한 것으로 주역에 명문이 있고 또 이 지역의 산세가 여러 신하들이 임금을 모시고 사를 의논한 형국으로 되어 있어 이른바 ‘군왕봉’이라는 산맥이 높이 솟아 임금의 위치로 군림하여 있고 그 밑에 조그마한 산봉이 군왕봉을 둘러 옹위하고 있다는 풍수지리에 근거하여 모룡(慕龍)이라 한 것이다.

☞ 교통편
6, 7, 9, 12, 14, 26, 29, 34, 51 운수연수원 근처산

사우
일곡동 만주사

<일곡동 만주사>

1. 만주사(晩洲祠)

일곡동 515번지, 1959년

만주사는 연제(淵濟) 송병선(宋秉璿), 소해(蘇海) 노종용(盧種龍)을 배향(配享)하는 사우(祠宇)이다.
연제 송병선(1836-1905)은 굵직한 벼슬이 내려져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을 정도로 당당한 선비로서 오로지 저술과 강학에 힘썼고, 상서(上書)를 올려 신하로서의 도리를 끝까지 잊지 않으면서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연제는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학덕을 이어받은 정통주의적 도학(道學)이념을 한말 시대상황 속에서도 실천한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노종용(盧種龍)은 원풍정의 건립자 아들로서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고 송병선과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 문하(門下)에 들어가 수업하고 학문이 독실함에 스승과 문하생들로 추중(推重)을 받았다. 공(公)은 스승인 연제 송병선이 자결한데 뒤이어 면암 최익현이 일제에 잡혀 대마도에서 순절하니 통곡(痛哭)으로 예장(禮葬)을 마친 후 스승의 유지를 받들고 척사위정(斥邪衛正)의 대의로서 누차 상소(上疏)를 올려 오적(五賊)을 물리치고 나라를 보전하려고 하였으나 되지 아니함에 따라 스스로 세사(世事)를 끊고 광주 일곡동에 내려와 도의(道義)의 교(交)를 맺어 학문을 논하는 한편, 후진양성에 힘쓰다 소해문집(蘇海文集)을 남기고 1940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일곡동 만주사 경의재

<일곡동 만주사 경의재>


2. 만주사 경의재(景義齋 = 蘇海亭)

이 정자를 소해라 명명한 것은 주인 노종룡이 그의 아호인 '소해?를 본따서 붙여진 것이며 1930년에 준공된 건물로서 소해에서 경의재(景義齋)로 바뀐 것은 1965년 을미년(乙巳年)에 노종룡의 아들 노진영이 이 정자를 경내에 있는 만주사의 강당으로 헌납했기 때문에 경의재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경의재란 선친의 절의를 숭모(崇慕)한다는 의미로서 이 정자의 용도가 유락휴식(遊樂休息)처가 아닌 강학처소(講學處所)로 변한 것이다.






일곡동 만주사 농암정

<일곡동 만주사 농암정>

3. 만주사 농암정(聾岩亭 = 願豊亭)

1817년 노재규에 의해 건립되었으나 1912년 여름의 태풍으로 건물 전체가 붕괴되었가 이듬해에 다시 중건하였다. 원풍(願豊)이라 명정한 것은 나라를 위하여 풍년(豊年)을 원한다는 주자의「憂國題豊」의 뜻을 취해 지은 것이며?聾岩(농암)?이라 한 것은 건립자의 아호가 농암이기 때문이다.
농암은 어지러운 이 세상의 온갖 시비를 아니 듣기 위해 고의로 귀먹은 농자처럼 행세하며 세상을 등지고 살아간다는 뜻으로 붙인 하나의 별칭이다.

☞ 교통편 시내버스 7, 12, 29, 34 좌석버스 666

일곡도서관옆 일곡근린공원에서 서쪽(본촌동 방향) 건너편 마을로 들어가면 마을 끝에 있다.

일곡동 절효사

<일곡동 절효사>

4. 절효사(節孝祠)

일곡동 567(일곡2길 89), 1398년에 창건. 1986년에 복원

절효사는 노준공(盧俊恭 : 1340-1397), 노희서(盧希瑞 : 1558-1592)를 배향(配享)하는 사우(祠宇)로서 조선 정종때 '절효'라는 시호를 내리고 정려를 짓도록 하여서 창건되었다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다시 복원되었다.
노준공은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병환이 있으면 단지(斷指)를 하여서 치료하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친이 사망하자 당시에는 상례가 크게 무너져 부친상에는 백일 탈상이 관례였으나 홀로 3년상을 하였다. 공의 효성에 세상 사람들이 감복하였고 호랑이까지도 찾아들어 공을 지켜 주었다고 한다.
또한 국상(國喪)을 당하여서도 부친상을 당한 것과 같이 매월 삭망(朔望 :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망배(望拜)하고 3년 동안을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망곡하였다고 한다.

일곡동 절효사 일신재

<일곡동 절효사 일신재>

고려가 망하게 되자 태조는 노준공의 명성을 듣고 누차 불렀으나 서석산 세심계(洗心溪)에 은거하면서 "나는 李民의 巨民이 되지 않겠다"하고 한 평생을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채 시(詩)를 짓는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 후 정종은 "노준공은 옛부터 내려오는 좋은 풍속을 어김없이 지켜 왔을 뿐더러 추호도 간사하지 않고
능히 충효를 다하였으니 참으로 표창할 만하다"하고 '節孝'라는 시호를 내리고 효종 기해년(1659)에는 일곡동에 절효사를 중건케 하여 사림들이 춘추로 제향했다는 기록이 있다.

☞ 교통편 시내버스 7, 12, 29, 34 좌석버스 666
일곡도서관옆 일곡근린공원에서 서쪽 건너편 마을로 들어가면 마을 끝에 있는 만주사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기와집이다.

전통가옥

* 송해당(松海堂) : 일곡마을 입구, 1860년

송해당(松海堂)은 노문규가 당시의 어지러운 세태를 비관하여 자신의 종적을 숨기기 위해 전려로 돌아와 지냈던 휴양처(休養處)이다. 노문규는 향시(鄕試)에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대과(大科)에는 실패하였다. 한말에는 향약을 세우고 관찰부 주사를 지냈으며 기우만과 교류하였다.
송해(松海)라는 의미는 그의 뜻이 솔처럼 곧고 그의 마음이 바다처럼 넓다는 뜻으로 붙인 것이다.

송해당은 현재 민가(民家)로 사용되고 있으며 주초 위에 사각기둥을 세운 정면 4칸, 측면 1칸의 평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다. 건물 정면에는 송해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기둥마다 판각 주련(珠聯)이 부착되어 있으며 당내에는 40여 개에 달하는 당시 유림(儒林)들의 찬미시문들이 있다.
송해당의 건립 시기는 1860년도에 해당되며 1906년(고종10년)에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노문규의 이자석정(二子錫正)은 경술국치를 슬퍼하여 항일 독립 투쟁을 전개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7년 옥고를 치룬 당시의 우국자이다.

☞ 위치: 절효사에서 마을쪽으로 은행나무와 동백나무가 있는 집인데, 현재는 붉은 기와로 번와하고 집앞으로 도로가 나면서 송해당 정원의 많은 부분을 잃고정원의 은행나무와 동백나무, 송해당 현판과 기둥의 판각 주련이 남아있어 옛 자취를 느낄 수 있다.

정자

일곡마을 처항(處項)골 아미산 상봉, 1971년(일곡동 살레시오고 입구 정류장 근처 산)
영원정은 춘망(春罔) 노문영(盧文永)의 만년 휴식을 위해 노씨 문중의 공동 성금으로 지어진 정자이다. 노문영은 학행(學行)을 겸비한 한말(韓末)의 선비로서 노씨 문중에 기여한 공이 지대하여 문중에서 정자(亭子)를 건립하여 그의 노고에 보답한 것이다.

 

[일곡동 - 민속문화]

당산제

일곡마을은 오치에서 우치공원 중간쯤에 있는 일곡마을 진입로를 따라 1㎞정도 가면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하며 높지 않는 구릉성 산들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풍수지리상 저울대 형국인 일곡은 광산 노씨, 광산 이씨, 광산 김씨가 주된 성씨로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다.
이 마을의 당산은 마을의 동쪽과 서쪽 두 곳에 있었으며 동쪽은 큰 당산, 서쪽은 작은 당산이라 했다. 동쪽의 큰 당산은 일찍 고사(枯死)하여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서쪽의 작은 당산은 화재로 소실되어 버렸다.
제보자에 의하면 정월 14일 밤에 당산제를 모셨는데 비용은 가구당 거출하나 산고(産故)가 있거나 상(喪)을 당한 집은 제외했다. 굿을 치기 위하여 상쇠를 담양에서 모셔 왔다 한다.
당산제가 끝나면 보름날 아침에 줄을 만들어 남녀 편을 갈라 마을 앞 공터에서 줄다리기를 하여 여자 편이 이기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마을 사람들은 큰 당산의 잎이 나는 것을 보고 모낼 시기를 결정했는데, 잎이 일찍 피면 모를 일찍 심고 잎이 늦게 피면 모를 늦게 심는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마을 어른들이 자주 모이는 일신재(日新齋)라는 학당(學堂)에서는 명절이나 마을 내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가끔 풍물을 치곤 했는데 당산제가 사라지자 현재는 노인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세시풍속

1) 1月

설날은 한 해가 시작하는 날로서 모두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하루를 보낸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설빔으로 갈아입고 정성껏 준비한 음식으로 조상께 차례를 올린다. 차례가 끝나면 자손들은 부모에게 세배(歲拜)를 하며 부모는 ‘공부 열심히 해라’, ‘올해엔 소원성취를 해라’, ‘금년엔 시집가거라’, ‘무병건강하라’ 등의 덕담(德談)과 함께 세뱃돈을 준다.
설날 아침에 먹는 음식을 세찬(歲饌)이라고 하는데 세찬으로 맨 먼저 준비하는 것은 떡국이다. 떡국에는 가래떡을 동전만큼 잘게 썰어서 넣고 꿩고기나 닭고기, 쇠고기 등을 넣는다. 이를 먹어야만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도 하며 어른들은 세주(歲酒)라 하여 청주(淸酒)를 한 잔씩 마시기도 한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조상의 산소를 찾아가 성묘(省墓)를 하는데 오가는 길엔 조상들의 업적 등을 이야기하며 후손으로서 자세를 가다듬기도 한다. 섣달 그믐날 밤에는 조리 장수들이 조리를 한 짐씩 메고 다니며 ‘복조리 사시오’라 외치는데 마을 사람들은 날이 새기 전에 남보다 먼저 이것을 사야 복이 온다고 믿어 한 쌍씩 사서 안방의 문 안쪽 위에 걸어 두고 좋은 문서같은 것이 올 때에 여기에 담아 두기도 한다.
(1) 十二支日
정초에 오는 12支日은 동물과 결부지어 금기(禁忌)하는 풍습(風習)이 있다. 이 곳에서는 이 중 쥐날이나 소날, 호랑이날, 뱀날 등을 지켰다.
쥐날(上子日)에는 쥐가 곡식을 갉아먹는 것을 막기 위해 칼이나 낫, 가위 등을 쓰지 않고 바느질도 하지 않는다
소날(上丑日)에는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고 여물을 듬뿍 주어 배불리 먹인다. 이 날에는 칼질 등 연장을 다루는 일을 하지 않는다.
호랑이날(上寅日)에는 호랑이가 나타난다고 하여 산에 가지 않고 멀리 출타하는 것도 금하며 일도 안하고 쉰다.
뱀날(上巳日)에는 뱀이 집 안에서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뱀입춘축’을 붙인다. ‘의방’이라고 써서 거꾸로 붙이기도 하고 <靑龍, 白龍, 黑龍, 赤龍, 黃龍>등 손바닥의 글씨를 종이에 써서 장독이나 부엌, 샘 등 뱀이 나올 만한 곳에 거꾸로 붙여 놓기도 한다.
(2) 정초(正初)의 놀이
정초에는 윷놀이를 즐긴다. 탱자나무 등으로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윷을 깎아 멍석을 펴놓고 그 위에서 놀이를 하는데 네 개의 윷짝을 깍정이에 담아 흔들다 휙 뿌려 나오는 도, 개, 걸, 윷, 모에 따라 말판의 말을 써서 하는 놀이이다. 이는 주로 남성들의 놀이이며 여성들은 널뛰기를 주로 하는데 짚이나 멍석을 말아 그 위에 폭 50cm, 길이 2m정도의 널판지를 놓고 양쪽에 한 사람씩 타고서 굴러 높이 솟구치는 놀이로 여인들의 방한용 체조로 적당하다 또한 아이들은 세뱃돈으로 돈치기를 하여 따먹기도 하며 연날리기, 제기차기를 즐기기도 한다,
(3) 입 춘(立 春)
입춘은 연초에 오는 경우가 많다. 이 날엔 입춘축문을 붙이는데 일곡에서는 주로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국태민안 가급인족’(國泰民安 家給人足), ‘개문만복래’(開門萬福來), ‘요지일월순지건곤’(堯之日月舜之乾坤) 등의 글씨를 써 대문, 기둥, 방문 위에 붙이곤 한다.
(4) 正月 대보름
① 오곡밥
정월(正月) 대보름엔 오곡으로 밥을 한다거나 또는 찹쌀을 쪄 찰밥을 만든다. 성주상을 차려 차례를 지내기도 하고 곳간에도 상을 차려 곳간신을 모시기도 한다. 또 이 날엔 여러 종류의 나물을 만들어 먹는다. 호박, 무우, 도라지, 감자대, 토란대, 고사리, 가지, 버섯 등의 묵은 나물이 그것이며 여러 성씨(姓氏)의 밥을 얻어먹으면 일년 내내 건강하다고 믿어 아이들은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밥을 얻어먹는다거나 또는 찰밥을 도둑질해서 먹기도 한다.
② 부 럼
보름날 아침에는 호두, 잣, 밤이나 무 등을 깨물어 먹는 풍습이 있다. 이를 ‘부럼 깨물기’라고 하는데 딱딱한 과일을 깨물어 먹으면 피부도 이처럼 단단해져 부스럼이 나지 않는다고들 믿고 있다.
③ 더위팔기
보름날 아침에는 더위팔기의 풍습도 있다. 일찍 일어나 먼저 본 사람에게 이름을 불러 대답을 하면 ‘내 더우’라고 한다. 그렇게 하면 나에게 올 더위가 그 해 여름엔 그 사람에게 간다고 믿었다. 그래서 대문 밖에 나가 누가 자기의 이름을 부르면 대답을 않거나 먼저 ‘내 더우 ’라고 말해버리곤 한다.
④ 불 지르기
정월 열 나흗날 밤에 논두렁이나 밭두렁에 불을 지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논밭둑이 더 여물어지고 병충해가 없어져 그 해 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믿는다.
⑤ 매구치기
정월(正月) 보름날엔 매구를 쳐서 액막이를 한다. 상쇠에 노병은(69세) 씨, 장구에 노병규(58세) 씨, 징에 노봉섭 씨 등 10명 내외로 농악대가 구성되어 있는데 마당굿, 샘굿, 조왕굿, 장광굿, 풍장굿, 당산굿 등을 한다. 이렇게 액막이를 하면 각 가정에서는 돈을 내놓거나 쌀 담은 그릇에 촛불을 꽂아 샘, 부엌, 장독 등에 놓아두기도 하는데 ’93년도엔 액막이 모금액이 30만원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거출이 된 돈은 마을 공동 경비로 쓴다.
⑥ 노두제웅 놓기
정월 열 나흗날 밤에 자식이 귀한 집에서는 있는 자식의 무병장수를 빌기 위하여 노두에 제웅을 놓는다. 지금 외출교(外出橋)가 있는 곳이 바로 그 자리로 20여 년 전에는 다리가 없이 그냥 노두만 놓여 있었다. 이 노두에 오장치란 섬을 짚으로 만들어 그 속에 흙과 곡식, 돈을 넣어 올려 놓았다. 그러면 이튿날 아침 마을 아이들은 그 오장치를 헤치고 속에 든 돈을 꺼내가곤 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액운이 다 없어진다고 믿었다.

2) 2月

(1) 하레드렛날
음력 2월 1일을 여기에선 하레드렛날이라고 부르며 머슴들이나 일반 가정에서는 쉰다. 콩, 보리 등의 오곡을 볶아 먹기도 하는데 이렇게 하면 노래기가 없어지고 쥐가 곡식을 축내지도 않는다고 믿는다. 또 아이들은 산에 올라가 물이 오른 칡을 캐먹기도 하며 머슴들의 새경을 정하기 위해 당산에 있는 들독들기를 하여 上, 中, 下 등급을 매기기도 한다.
또 이 날에는 온 집안을 깨끗이 청소한다. 초가 지붕이나 담벼락 등에서 노래기(싸내기)라는 벌레가 나와 악취를 풍기는 것을 막기 위해 ‘香娘閣氏速去千里(향낭각씨속거천리)’란 노래기 부적을 써 붙이기도 한다. 또 늦가을에 지붕을 이을 때는 노래기가 많이 생기는 참나락짚으로는 지붕을 올리지 않는다.
(2) 경칩일
경칩일에 남자들은 인근의 들이나 산으로 가서 개구리알을 먹기도 하는데 이를‘미룡알 떠먹기’라 한다. 이 알을 소주와 함께 마시면 해수병에 걸리지 않고 양기를 돋우는데 좋다고 한다.

3) 3月

(1) 삼짇날
음력 3월 3일을 삼짇날이라고 한다. 이 날엔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오고 온갖 수목에 물이 오를 때이므로 산으로 화전 놀이를 가기도 한다. 아이들은 송키를 벗겨 먹기도 하고 버들로 피리를 만들어 불기도 한다. 또 처음으로 보는 동물에 따라 그 해의 운수를 점치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개미를 처음 보면 한 해 동안 부지런해지고 나비를 먼저 보면 사치스러워지며, 멋을 부린다고 믿는 것 등이다.
(2) 한식일
전에는 추석, 설, 단오 등과 함께 큰 명절 중의 하나였으나 근래에는 별다른 풍습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이 날을 특별히 쇠는 집안에서는 차례를 모시기도 하는데 보편적으로 청명과 겹치는 이날 마을에서는 산일(이장, 사초 등)을 하기도 한다. 신이 이동하지 않는 신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4) 4月

◈ 초파일
음력 4월 8일은 석가모니 탄신일로 불도들에게는 가장 큰 명절이다. 마을에 교회가 들어온 지 100년이 넘었지만 교인의 수는 아직 마을민 전체의 절반을 넘지 못한다. 그래서 초파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인근의 생룡리에 있는 모산사 등으로 가서 등(燈)을 달아 놓고 가족의 건강과 성공을 기원하곤 한다.
1993년도에는 일신재(日新齋 : 현재 노인당으로 사용)에서 마을 회의를 해서 농악을 한바탕 치며 이 날을 보내기도 했다.

5) 5月

◈ 단 오
음력으로 5월 5일이 단오날인데 이 날은 양수(陽數)가 겹치는 날로 일년 중에서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이라 하여 명절로 치지만 일곡마을에서는 이에 얽힌 풍습은 별로 두드러진 것은 없다. 다만 익모초나 쑥을 뜯어다 밥맛 없을 때 입맛 당기라고 달여 먹기도 한다. 또 창포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으면 윤기가 난다고 하여 창포를 뜯어 와 물에 삶기도 한다. 그네뛰기나 씨름은 하지 않았다.

6) 6月

◈ 복 날
일이 바쁜 때여서 유두일은 특별한 풍습이 전승되는 것이 없고, 복날은 초복, 중복, 말복으로 나누어 쇠는 경우가 있다. 일년 중에서 가장 더운 때이므로 사람들이 모여 추렴을 해서 개를 잡아먹는다거나 닭을 삶아 먹기도 한다. 땀을 많이 흘려 쇠약해진 몸을 보한다는 의미인데 이를 ‘복달음’이라고도 한다.

7) 7月

◈ 백 중
음력으로 7월 보름을 말하는데, 이때쯤엔 농사일이 거의 끝나고 추수만을 기다릴 때이므로 농가에서는 호미씻기를 하고 놀며 간단하게나마 선조와 성주께 상을 올리고 구당산이 있던 공터에서는 씨름을 한다. 또한 농사가 제일 잘 된 집에서는 술과 음식을 장만해 내놓기도 한다.

8) 8月

(1) 추 석
음력으로 8월 15일은 우리의 최대 명절로 가위, 한가위, 가배, 중추절이라고도 부른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새 옷으로 갈아입고 조상께 햇곡식으로 준비한 음식으로 차례를 올린다. 햅쌀로 밥을 하고 송편을 만들며, 술을 빚기도 하는데 이 술은 신도주(新稻酒)라고 부른다. 차례가 끝나면 조상의 산소에 성묘를 한다. 벌초는 추석 며칠 전에 미리 해 둔다.
추석엔 온갖 과일이 풍부하고 곡식 등이 풍족하기 때문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라는 말도 있다. 또 이 날에 갓 시집 온 새댁들은 음식을 장만해서 친정으로 근친(覲親)을 가기도 하며 부녀자들은 휘영청 밝은 보름달 아래서 달빛을 받아 가며 강강술래를 하기도 한다.
(2) 올게심리
추석이 가까워져 오면 벼 이삭 중 잘 익은 부분만을 골라 훑어서 솥에 넣고 찌는데 이를 이 마을에서는 ‘올게쌀’이라고 부른다. 또한 이 쌀로 조상께 차례를 모시기도 하는데 일종의 수학제(收穫祭)로 추수(秋收)에 대한 감사의 뜻을 담고 있다. 먼저 올게쌀을 만든 집에서는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기도 한다.

9) 9月
◈ 중구절
음력으로 9월 9일은 중구절(重九節), 중양절(重陽節)이라고도 하는데 이날 부유한 집에서는 국화로 술을 담기도 하고 단풍 구경을 다니기도 하나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한창 농사일이 바쁘기 때문에 별다른 행사를 갖지 않는다.

10) 10月

◈ 시제(時 祭)
10월에는 농가에서는 추수도 끝나고 비교적 풍족하면서도 한가한 때이므로 조상께 시제를 한다.
이를 시제(時祭), 시정(時享), 산제(山祭)라고도 부르며 일곡마을의 광산 노씨들은 10월 5일, 14일, 16일, 19일, 20일이 시제일이고, 일동마을의 광산 이씨들은 10월 11일, 13일, 15일, 16일에 시제를 모시고 있다. 이 날은 후손들이 모두 모여 문중사를 논하기도 하고 조상의 덕을 기리기도 한다.

11) 11月

◈ 동짓날
동지(冬至)는 일년 중 밤이 가장 긴 날로서 작은 설, 곧 아세(亞歲)라고도 한다. 이 날엔 찹쌀로 새알심을 만들어 넣어 팥죽을 쑤는데 동지죽이라 부르며 이를 먹어야 만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 여긴다. 또한 이 팥죽을 마당, 대문, 부엌, 담벼락, 장독 등에다 뿌리기도 하는데 이는 잡귀를 물리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일종의 축사(逐邪)의 행위로 옛날 중국의 홍공씨(共工氏)가 살았는데 그의 재주없는 아들이 팥을 두려워하다가 동짓달에 죽어 악귀가 되었기 때문에 그를 쫓기 위한데서 유래한 풍속이라고 한다. 요즘은 이사만 해도 집안 곳곳에다 이 팥죽을 뿌리기도 한다

12) 12月
(1) 제 야(除 夜)
12월 30일은 일년의 마지막 날로 섣달 그믐, 제야(除夜), 제석(除夕)이라고도 하는데, 한해를 마무리하는 날로 한 해 동안 진 빚이 있으면 갚고 빌려 온 물건이 있으면 돌려준다. 또한 남에게 빌려준 것이 있어도 이 날 안으로 받아야 하는데 해를 넘기면 연초에는 받으러 다니기 어렵기 때문이다.
(2) 수세(守 歲)
섣달 그믐날에는 방안, 부엌, 마당, 곳간, 변소 등에 불을 환히 켜 놓고 모두 잠을 자지 않고 새해를 맞는데 이를 수세(守歲)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다음 날 일찍부터 차례를 모시고 성묘와 세배를 다녀야 하기 때문에 자정쯤에 자리에 드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13) 윤 달

우리 조상들은 태양력(太陽曆)보다는 주로 태음력(太陰曆)을 사용해 왔으므로 계절의 흐름을 정확히 알기가 어려워 4년에 한번씩 윤달을 두어 맞추었다. 다른 이름으로는 윤월(閏月), 공달, 여벌달, 덤달이라고도 했으며 아무리 궂은 일을 해도 탈이 없는 달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도 윤달에는 묘 이장을 한다거나 연만하신 부모의 수의(壽衣)를 짓기도 하고 비석을 세우기도 하며 집을 고치기도 한다. 또한 따로 길일(吉日)을 맞출 필요가 없으므로 이사도 마음대로 한다. 다만 죽은 이에게는 좋은 달이지만 산 사람에게는 해로운 달이라 하여 결혼식 같은 행사나 회갑연 등은 일부러 윤달을 피하는 경우도 있다.
이상에서 이 마을의 세시풍속(歲時風俗)을 조사하여 소개하였는데 현재의 풍속보다는 마을 고노(古老)들의 기억을 더듬어 몇십 년 전에 행해졌던 것들을 주 조사대상으로 삼았다. 굳이 시행 연대를 말한다면 193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가 되겠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운 시대였던 만큼 농사일 외에 유희적(遊戱的) 성격이 강한 풍속은 그리 발견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다. 또한 도시 근교인 까닭에 대부분의 풍속이 도시화, 기계화에 밀려 원형을 찾아보기가 힘든 상태이다. 그래서 요즘은 주(週) 단위로 생활의 양상이 바뀌어 가고 있고 정월 보름이나, 단오, 백중, 중구절보다는 국정 공휴일인 3·1절, 제헌절, 개천절 등이 명절이 되고 있으며 크리스마스나 석가탄신일 등 종교적 휴일에 얽힌 새 풍습들이 더 많이 생겨나고 있다.

설화

○ 할미당

우리 마을 안고랑에는 할미당이 있어요. 그것도 유래가 묘히여.
얼른 들으면 할머니 할미당이라 허기 쉬운디 그렇지 않고 그런디 그곳 할미당 자리에 지금은 수녀들이 살고 있지요. 그래서 요즘에는 사람들이 맞다고들 그러제. 할미당이니 수녀들이 살게 되었다고도 이야기 허제.
그 자리가 어디인고 허니 여그 106번 종점가는디 사레지오 고등학교 앞이여 특별한 유래를 들은 적은 없고 수녀들이 살게 되어서 이름 지대로 되었다 그리지요.

○ 시암과 와우형국

우리 마을의 이름은 日洞이라고 불러요. 지금은 日谷洞 日洞이지요 원래는 날일자 日洞이 아니라 편안한 ?일?자 逸洞이었어요.
우리 마을에는 샘이 많어요, 요 마을 아래 개시암이 있어요. 얼마 전에 부락에서 긁어 매워부럿제 거 개같이 생깃다던가 개가 물을 잘 묵어서 그렇게 개시암이라고 부른가는 모르네.
개시암뿐 아니여 여그 동네 아랫쪽에 말시암도 있어. 동네 뒷산에 바우에 말 발자국이 있는디 지금도 볼 수 있어. 선명허제. 그때 말이 물을 묵었다 해서 말새암이라 부른가 보제.
또 조개시암도 있었어 조개시암 유래는 잘 모르것어 아참 개시암은 그 곳에 가면 개소리가 난다고 히서 개시암이라 불렀다는 이 얘기도 전해오고 있어.
샘 뿐아니어 여그 산에는 이름이 많어요 여그 동네가 와우형국(손으로 앞의 산등성이를 가리키며)이라서 근갑디다.
와우형국에 대한 비슷한 이름이 많어요.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제. 소가 여물을 묵을 때 여물을 묵는 구시시암도 있고 또 아래 우리 논 있는디는 소정제(쇠정제)라고 힛써요. 소 죽을 쑤는 정제라 해서 그렇게 불럿든가 봅디다.
젯봉이 잇고 여물봉이 있고 우리 마을 뒷산은 높지는 않지만 와우형국이라서 소에 엄켜있는 이름이 많은가 봅디다. 또 여그에 어덕도 있어요.
우리는 옛날부터 소를 많이 키워 왔서마는 특별히 소가 잘 된지는 잘 모르것어요. 우리들은 일들만 히묵고 산께.
그저 어른들은 말시암이세, 개시암이세, 구시시암이세, 시암이 많어 그런가는 모르지만 농사는 잘 되었제 아니제 그것이 와우형국이라 소도 잘 되어서 그렇것제. 농사짓는데 물은 많었어요. 물이 작어 농사를 못 짓지는 않었응께, 그것도 시암이 많다면 그 때문이것제.

※ 제보자의 이야기를 발음 그대로 적었기 때문에 현재의 맞춤법과 다소 상이한 점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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