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월동 - 지명유래]
유래
망월동동전경
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형국, 즉 옥토망월(玉?望月)형국이라 해서 망월동이라 했다. 본래 광주군 상대곡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분토리와 하대곡면의 복정리 일부와 창평군 서면의 죽곡, 죽월산리 일부를 옥토망월형의 명당이 있다 하여 망월리라 해서 석곡면에
편입되었다.
1955년 7월 1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리(里)를 동(洞)으로 고치고, 1957년 동제 실시에 따라 청옥동회의 관할이
되었으나, 1998년 9월 21일 석곡동 관할이 되었다.
망월동은 무등산 자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석곡천가에 자리잡고 있다. 망월동
분토마을에는 선사시대 유적인 고인돌이 있고 옥토망월형(玉?望月形) 명당이 있다. 또한, ‘씹새암’이라는 신앙 자료가 있는데 인근에서는
영천(靈泉)으로 알려져 있다. 망월동은 모두 개발제한구역과 공원지구로 지정되어 있어 수려한 자연경관을 간직하고 있다.
소지명
- 가장굴 : 대실 북서쪽에 있는 마을. 가장터였음.
- 대실, 대곡, 죽곡 : 분토 북쪽에 있는 마을. 대나무가 많았다 함.
- 분토(奔兎), 분토(粉土)동 : 등촌 북서쪽에 있는 마을. 분토가 났음. 정지 장군의 산소가 있음.
- 아랫대실, 하대곡, 하죽곡 : 대실 아래쪽에 있는 마을.
- 웃대실, 상대곡, 상죽곡 : 대실 위쪽에 있는 마을.
- 월산(=새테) : 대실 북쪽에 새로 된 마을.
- 핑녕굴, 핑룡굴 : 가장굴 북서쪽에 있는 마을.
[망월동 - 유물유적]
고분
* 원형고분 : 점제라 부르는 구릉지대
점제(옹구제)라 부르는 구릉의 김성곤 씨의 선산에 14기의 고분이 산재되어 있다. 이들
중 중앙에 위치한 2기는 비교적 큰 편인데 직경이 5.7m, 높이는 1.4m이다. 이외의 고분 상당수는 봉분이 작아 고분으로 보기 어렵다. 고분
주변에 경질토기편이 산재되어 있고, 개배 2점이 수합되었다. 개배는 직경 10.2cm, 두께 2.1cm로 회백색 경질토기이며 기벽이 거칠고
내부에 녹로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전체기형이 납작한 후기 형식이다.
묘제
* 망월동 분토 지석묘 (支石墓) : 월동 분토마을 동초교 북쪽 도로변
이곳은 제4수원지에서 흘러내리는 조그마한 천변에
협소(狹小)한 평지가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다.
지석묘는 광주 동초등학교 북쪽의 도로변 평지에 8기의 지석묘가 산재(散在)되어 있으며
그 중 5기는 형태나 규모를 알 수 있으나 2기는 매설 또는 파괴되어 있다.
분포상태는 40m의 범위 안에 있지만 6기는
20m안에 밀집되어 있고, 그 배치는 인근의 하천과 도로방향과 같은 대개 남북향으로 3열을 이루고 있다.
1기에는 <碑墓>라
음각되어 있다. 6기 모두 지석은 보이지 않지만 지석묘 중에서 가장 크고 괴석형 상석을 한 1호의 경우 발굴 조사되면 지석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망월 정지장군예장묘소>
* 정지장군 예장묘소 : 경렬사 뒷편 구릉, 지방기념물 제2호
경렬사의 뒷편 구릉에 있는 정지장군 예장묘소는 1986년 11월
1일 광주광역시로 이관되어 지방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었다. 예장이란 국가에서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는 것으로 왕비의 부모, 빈, 귀인, 대군,
군, 공주, 옹주 등 종친의 종2품 이상, 문무관 정1품 이상 및 공신에 대한 장례로서 국장의 다음가는 국가장이라 할 수 있다.
정지의 예장묘는 평면 사다리꼴에 가까운 모난 모양으로서 석축 기단 위에 1m 높이로 호석을 쌓았다. 묘역은 1,100평에 이르는데
묘의 남쪽 가운데에 묘비와 상석이 있다. 묘비에는 <高麗 禮儀判書鄭景烈公地之墓 郡夫人 密陽朴氏(고려 예의판서정경렬공지지묘 군부인
밀양박씨부)>라 하여 부부합장묘임을 알 수 있다. 묘역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있으며 그 밖의 석물로 돌거북이 있고 예장묘 외에 정지의 아들
정경(鄭耕, 1369-1421)과 그 부인 광산 김씨의 묘 등이 있다.
재각
<망월동 휘정재>
* 휘정재 (輝精齋) : 북구 망월동 산 176번지, 1986년
휘정재(輝精齋)는 경렬사 입구에 있으며
하동정씨경렬공파종회소(河東鄭氏景烈公派宗會所)이다.
건물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기와 팔작지붕이며 홑처마로 되어있다.
창호(窓戶)는 2분합문이며 내부에는 편액이 없다. 내부는 대청마루와 온돌방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천장은 대들보 위에 종보를 올리고 마름모꼴
판대공과 보아지를 결구하여 종도리를 받치게 한 5량집이다. 마루는 장귀틀과 동귀틀을 짜맞춘 형태이며 처마에는 양철물받이를 달았다. 귀기둥은
평주보다 약간 높게 하여 귀솟음이 특징이며 건물 뒷편은 함실아궁이를 내었다.
대청 뒷편에는 출입이 가능하도록 2개의 판문을 달았다.
대문은 소슬대문으로 되어있으나 최근 1986년에 세웠다. 담장은 일부만 되어있고 관리자는 별도로 살지 않고 있다.
사우
<망월동 경렬사>
경렬사 (景烈祠) : 망월동 산 16번지, 1981년 복원
제4수원지 아래쪽에 펼쳐지는 협곡에 분토마을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
뒷산에 고려말의 용장 정지 장군(鄭地 將軍)을 모신 경렬사가 있다. 경렬사는 1644년(인조 22년)에는 지금의 동구 동명동 74번지에 있었는데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고 그곳에 유허비만 세워졌었다. 지금의 경렬사는 ‘정지 장군 유적보존회’에서 1978년
복원을 시작하여 1981년에 완공했다.
1644년 당초에는 경렬공만을 모셨다가 1718년 그의 9대손(금남군 정충신,
1576~1636)과 몇 분을 더 추가하여 배향했다. 건물은 사우, 내삼문, 외삼문과 관리실로 구성되어 있고 경내에는 동명동에서 옮겨온
<경렬사 유허비>와 <유적정화 기념비> 등이 있다.
정지(鄭地, 1347~1391) 장군의 본관은
하동(河東)이며, 시호가 경렬(景烈)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인물이 뛰어났고 성품이 너그러웠으며 큰 뜻을 품고 독서하기를 좋아했다. 19세에
사마장원, 20세에 문과 급제, 1374년(고려 공민왕 23년) 28세 때에 중랑장(中郞將)이 되었고 왕을 모신 속고지(速古志)로 있으면서
왜구토벌책 및 토적책 10조를 왕에게 올려 전라도 안무사(全羅道 按撫使, 지금의 도지사)가 되어 왜구의 토벌에 공을 세웠으며 수군 창설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1377년(우왕 3년)에 순천 낙안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웠다. 그 후 전라도 순문사를 거쳐 36세 때 제해도
도원수(諸海道 都元帥, 해군 총사령관)를 역임하면서 왜구를 무찔러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양광·전라·경상·강원도 도지휘처치사(江原道
都指揮處置使, 4도의 육군 사령관)를 겸임하기도 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1389년, 공양왕 1년)에 종군하여 적을 토벌하는 한편
전지(田地)의 경작장려와 성곽수축 등을 맡아 처리했다. 그러나 그 해 11월 우왕복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나주로 귀양갔으며, 윤이(尹彛),
이초(李初)의 옥사에 연좌되어 또 청주옥에도 갇혔었으나 수재(水災)로 인해 죄를 면했다. 1391년 위화도 회군의 공으로 2등 공신이 되어 광주
장원봉 아래에 물러가 있다가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그해에 병으로 세상을 떴다.
의복
* 정지 장군 환삼(環衫) : 광주시립 민속박물관 內, 보물 제336호
정지 장군이 왜구의 두목 왜산지를 무찌를 때 입었던
것이라 전해지는 갑옷으로 보물 제336호이며, 고려 때의 갑옷으로는 달리 유례가 없는 귀중한 것이다.
이 환삼은 원래 정지 장군의 20대
종손의 집에 보관해 왔던 것이다. 이것을 1955년 당시 전남대학교 박물관장이 발견하여 전남대 박물관에 보존했었는데 이를 다시 하동 정씨
종중에서 인수하여 광주시립박물관에 기탁한 것이다.
환삼의 크기는 길이가 70cm, 너비가 79cm이며 소매 길이 30cm, 철판
한 장의 길이 9cm, 철판 너비 4cm, 쇠고리 지름 10cm, 소매 너비 22cm, 소매깃 35cm 등이다. 이것은 여러 장으로 된 철편을
고리로 연결하여 상반신을 화살과 창검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전복 밑에 받쳐입었던 것 같다.
이 갑옷은 다른
데서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미루어 정지 장군이 특별히 고안해서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환삼과 함께 정지 장군이 썼던 칼이 보존되어
왔는데, 칼은 임진왜란 때 집안의 외손인 김덕령이 거사(擧事)할 때 가지고 가서 없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환삼과 칼에 대한 일화로는
‘김덕령 장군이 의병을 일으킬 때 정지 장군의 갑옷을 입고 그 묘소 앞에서 제를 지냈는데 차고 있던 칼이 홀연히 풀어져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라는 내용이 『광주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노거수
<망월동 분토마을노거수>
노거수(老巨樹) : 분토마을 보호수, 망월동 280(분토회관길 6)
이 나무는 분토마을 280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수령은
약 200여 년 된 팽나무로 나무높이 15m, 나무 둘레 3.4m로 1982년 11월 3일 마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이 나무에 얽힌
일화로는 마을에 술주정꾼이 있어 마을이 시끄러웠는데 나무신령님이 꾸짖은 후 마을이 평온해 졌다고 한다.
* 제보 : 문태경,
망월동 997번지
[망월동 - 민속문화]
분토 당산제
망월동 분토마을 당산나무
1) 분토 당산제(粉土 堂山祭)
마을의 당산은 2곳인데 할아버지 당산은 마을의 우산각 옆(망월동 391번지)에 있는 수령
500년 정도의 귀목나무(느티나무)로 이곳에 제(祭)를 모시고 있으며, 할머니 당산의 당산나무는 고사하고 그 터만 남아 있다.
분토마을 당산제는 일제시대 이전에는 성했으나, 해방이후부터 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오래전에 당산제를 지냈을 때 마을의
한 유지분이 당산제가 미신이며 지낼 필요가 없다 하여 지내지 않게 되었다.
그 후로 번성했던 마을이 빈농으로 변해가고 점점 쇠퇴해졌다고
하며, 당산제를 지내지 못하게 했던 이 마을의 유지분은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소문에 의하면 그 집에 좋지 못한 일만 생겼다 한다.
이후 이 마을의 당산제는 2~3년전부터 극소수의 부녀자들이 당산제를 모시고 있는데 김처녀라 할머니를 주축으로 마을의 여성들이 주가
되어 당산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가정의 평안을 기원한다. 1998년 당산제 때는 여러 사람들이 도와주셨다고 한다. 이곳의 당산제 준비는 정월
12일경에 황토와 선죽, 금줄을 치는 것부터 시작된다. 여기에 쓰이는 황토는 마을 뒷산에서 깨끗한 흙으로 마을 입구와 당산나무 근처의 길목에
뿌린다. 제물 장만에 쓰이는 비용은 제를 모시고자 하는 사람들만 돈을 내서 마련하며, 개인적으로 음식을 장만하기도 한다. 제물의 종류로는 떡,
메, 대추, 곶감, 사과, 배, 도라지, 고사리, 국(마른명태두부국)을 준비하며 음식에는 마늘, 고춧가루 등은 넣지 않고 간을 보지
않는다.
정월 14일 저녁 8시쯤에 화주 집에서 여러 사람이 제물과 제기를 하나씩 들고 당산나무로 가서 돗자리를 깔고 상을 편 후,
음식을 진설한다. 진설할 때 특이하게도 메와 국은 통째로 올려 놓는다. 또, 당산제에 쓰이는 그릇은 김할머니가 매년 보관하고 계셨다가 깨끗이
닦아서 다시 사용하고 있으며 제는 진설-분향-강신-독축-소지-헌식-음복의 순으로 진행된다. 제를 다 지내고 나서 헌식을 하는데 당산나무옆 개울에
상에 올린 음식을 조금씩 떼어 흘려 보내고 남은 음식은 그 자리에서 나누어 먹는다.
* 제보 : 김삼순(82)
죽곡 당산제(竹谷 堂山祭)
망월동 죽곡당산나무
죽곡마을은 대실마을이라고도 불리워지고 있는 마을로 무등산의 북동쪽으로 뻗어내린 산자락 사이의 계곡에 형성된 농촌이다.
이 마을은
청옥 사거리에서 광주 제4수원지 쪽으로 3㎞쯤에 위치하는데 길을 따라 마을이 길게 형성되어 있고 집들은 서쪽 산을 뒤로 하고 있어 모두
동향이다. 마을은 약 60호쯤 되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며,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사는 혼성촌이다.
죽곡의 당산제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정월 14일 밤 11시쯤에 시작하여 12시쯤에 끝이 난다. 제관의 선정은 촌계라고 하는 마을총회에서 결정한다. 촌계는 부부동반으로
참여하는 마을의 대동계로 음력 섣달 10일에 개최한다. 이때 유사 2명 및 제관을 결정한다. 유사는 깨끗한 사람을 가려서 뽑으며 제가 끝나는
정월 보름까지 산고(産苦)든 상가(喪家) 등은 가지 않는 등 철저하게 가린다고 한다. 그리고 유사로 결정되면 거절할 수 없다. 제비(祭費)는
가자전(제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마을 자금을 각 가정에 일괄적으로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의 이자로 충당하였으며, 돼지머리, 환육(소고기),
삼실과(대추, 밤, 은행), 떡(백설기, 인절미), 탕, 나물, 피문어 등을 준비한다. 금줄은 제일 일주일 전에 당산주변에 치고 금토는
당산주변과 유사집 앞에 뿌려 부정의 출입을 막았다. 음식의 준비는 제삿날(祭日) 낮에 하는데 음식 준비시 양념은 넣지 않으며 비린 생선 등은
전혀 마련하지 않는다. 제는 제관과 농악대만이 참여하며 여자들은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제관들의 복식은 평상복이었으며, 유사
2명 중 1명은 초헌, 나머지 1명은 아헌을 맡고, 제는 강신-분향-재배-잔올림-재배 등의 순서이다. 소지, 음복 등이 끝나면 헌식을 하는데
진설했던 음식을 조금씩 떼어 각각 백지에 싸서 나무 옆에 파묻고 납작한 돌 3개로 누르고 그 위에 황토를 발라서 덮는다. 그리고 금줄을 준비해서
그곳에 둘러놓는다. 제가 끝난 보름날 저녁부터 마당밟기를 하는데 매일 밤에만 했으며 보통 하루 저녁에 1~2집 정도를 다녔다고 한다. 굿은
정재굿(부엌굿), 마당굿, 길굿, 샘굿, 장광굿(장독) 등을 차례로 쳤으며, 이 때 돈과 곡식, 음식, 술 등을 대접한다. 마당밟기가 끝나면
정월 그믐께 결산보고를 하게 되는데 걸궁을 하는 동안에 어느집이 돈 얼마 곡식 얼마 등을 희사했다는 내용을 보고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마을
자본이 되어 마을의 대소사에 사용된다.
이 마을의 당산제는 해방에서 6.25 사이에 사라졌는데 당산제를 주도했던 송씨가 작고하신
후로 주도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사라졌다고 한다. 당산에 얽힌 영험담은 당산의 잎이 한꺼번에 활짝 피면 그해 물이 좋아 풍년이 들고
여러번에 조금씩 피면 물이 적어 흉년이 든다고 했으며 지금도 그것을 믿고 있다.
특히 아랫마을인 월산마을에서는 이 나무의 잎이 피는 것을
보고 머슴을 들일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였다고 한다.
당산나무는 마을 앞(죽곡마을 1123번지)에 있는 느티나무로 수령 400년,
나무높이 15m, 둘레 5m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당산 곁에는 모정이 있는데 이는 해방직후 건립했던 것을 1992년 전면 개축하였다. 이
모정은 과거에는 들일을 하며 쉬는 휴식 공간이었으나 농사짓는 일이 줄어들면서 여름철 노인들의 휴식처나 오가는 나그네의 휴식처 정도로 그 기능이
약화되었다.
전설
* 정금남 전설
선조 조의 충신인 금남군(金南君) 정충신(鄭忠信)은 고려말의 명장 정지(鄭地) 장군의 7대손이다. 정충신의
자는 가행이고 호는 일운이다.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사리 분별이 분명해서 당시 광주 목사이던 권율 장군의 통인으로 있게 되었다. 그는 차분하면서도
재빠르며 대담하고 명석하여 어린애라고 해서 어른들이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권율 목사가 여섯 살 난 정충신의 지혜를
시험하고 싶었다. 그때가 여름인지라 덧문을 높이 들어올려 처마 밑에 선반처럼 걸어 두었다. 그리고 걸어 올린 문짝 위에 물을 가득 담은 그릇을
올려 두었다. 만일 누가 이 사실을 모르고 걸어 놓은 문을 급히 내리다가는 물벼락을 맞을 판이었다. 이렇게 해 놓고서 권장군은 마당에서 뛰놀고
있는 정충신을 급히 불러 비가 와서 기후가 몹시 차니 급히 덧문을 내려 닫으라고 일렀다. 아이는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달려가는데 마루로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광에 들어가 나무 의자처럼 된 디딤돌을 가지고서 마루 위로 달려왔다. 그런데 이 아이의 오른손엔 가는 대막대기 하나가 들려
있었으며 그 불호령 속에서 차분하면서도 민첩하게 발판을 마루에 놓더니 그 위로 올라서서 문짝 위에 혹 얹혀진 것이 없나 하여 대막대기로 문짝
위를 더듬어 그릇이 걸리자 조심히 물그릇을 내려놓은 다음 문걸이를 벗겨 내렸다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함께 목격한 관원들은 무릎을 치며
감탄했으며 권율 목사는 마음 속 깊이 이 아이의 장래를 점치고 있었다.
얼마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는 어지러웠으며 임금은 난을
피하여 의주에 머물고 있었다. 나라 전체에 왜군들이 들끓고 있어 각 전선에서의 보고가 두절되었으며 권율 목사도 군정을 알리는 장계(狀啓)를
올리지 못해 마음이 조급한 판이었으나 믿고 보낼 사람이 없었을 뿐더러 누가 감히 목숨을 걸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를 안 정충신은 권목사
앞에 나아가 자기를 보내 줄 것을 간청했다. 권목사는 깊이 생각한 끝에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사려가 깊고 영민해서 과연 큰 일을 맡길 만하여
극비의 장계(狀啓)를 써서 정충신에게 건네주었다.
그런데 막상 길을 떠나는 정충신을 보고 권목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소중히 간수하라는 장계는 몸에 지니지도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나무꾼 행색에 망태기 하나를 매고 있었다. 의아해하는 권목사에게 정충신은 바싹
다가가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이 망태기가 장계올시다. 봉서를 그대로 몸에 지니고서야 적진을 헤쳐 무사히 도착할 수 없겠기에 봉서를 길게 찢어
새끼를 꼬아 이 망태기를 엮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권목사는 정충신의 기지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길로 정충신은 적진을 뚫고
권율목사의 사위이며 병조판서인 이항복 대감에게 무사히 도착했다. 망태기를 풀어 장계를 순서대로 다시 펴 이대감에게 올리자 한눈에 이 소년의
비범하고 대담한 용기와 사람됨을 알아보고 크게 기뻐하여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거두어 들였다. 이대감의 배려로 정충신은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학문과
무예를 닦으며 계곡 장유, 지천 최명길 등과 친교를 맺었고 얼마 안 있어 무과에 급제했다.
광해군 13년(1621)에는
만포검사로서 청나라에 잠입, 적의 정세를 을 탐지했으며 인조 원년(1623)에는 안주목사 겸 방어사를 역임했고, 이듬해 이괄의 난에는
반도(叛徒)들이 서울까지 쳐들어와 신왕을 옹립하기까지 했으나 정충신은 전부대장으로서 이괄을 무찔러 하루만에 천하를 평정한 공으로 진무공신
2등으로서 금남군(金南君)에 봉해졌다. 그후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올라 연변 대도호부사를 역임했으며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는 도원사에
이르렀다.
1633년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세폐(歲幣)가 날로 증가하는데 반대하여 단교사신을 파견하자고 했는데 정충신은 이에 반대하다가
당진에 유배되었고 다시 장연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와 이듬해에 포도대장을 역임한데 이어 경상도 병마절도사로 있다가 인조 13년(1635) 4월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에 학문에도 깊이 골몰하여 『일운집』,『금남집』,『백소북천록』등의 책을 만들었다.
세시풍속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룻날에 마을 회관에서 마을의 모든 웃어른들을 모셔 놓고 각기 집집마다 형편대로 음식을 가져다 차려 놓고 합동으로 세배를 올리는 합동과세(合同過歲)라는 미풍양속이 있는데 이것은 일제 때 행해져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