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문화재

문흥동의 지명유래

월명실 2013. 6. 15. 09:12

 

[문흥동 - 지명유래]

유래
문흥동전경

문흥동동전경

본래 광주군(光州郡) 오치면(梧峙面)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송정리(松亭里)와 문산리(文山里), 용주리(龍珠里)의 각 일부와 서양면(瑞陽面)의 신흥리(新興里) 일부, 두방면(斗坊面)의 각화리(角化里)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문산(文山)과 신흥(新興)의 이름을 따서 문흥리(文興里)라 해서 서방면(瑞坊面)에 편입되었다가, 1955년 7월 1일 광주시에 편입되고, 1957년 동제 실시에 따라 리(里)를 동(洞)으로 고치고 문화동의 관할이 되었다가 1995년 3월 1일 문흥동으로 분동되었다. 1996년 1월 9일 문흥동이 문흥1동과 문흥2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지명
  • 까시암걸(들) : 물통걸 아래에 있는 들로 까시암이 있음.
  • 까시암(우물) : 까시암들에 있는 샘인데 물이 잘 난다 함.
  • 갈림보(보) : 갈림보들에 물을 대는 보. 두 곳으로 갈라져 흐름.
  • 갈림보들(들) : 송구래 남쪽에 있는 들. 갈림보가 있음.
  • 개머리배미(논) : 지낭걸 위쪽에 있는 논. 갈미(갈모)처럼 생겼음.
  • 개암불(마을) : 송산 아래 마을.
  • 감적굴(골) : 포사막굴 남쪽에 있는 깊은 골짜기.
  • 깟밭태(들) : 와야등 남동쪽에 있는 들.
  • 검바우(바우) : 한시랑굴에 있는 바위. 색깔이 검음.
  • 고두박등(등) : 뒷매 아래 있는 등.
  • 골 밭(밭) : 공동매 밑에 있는 밭.
  • 공동매(묘지) : 수용소와 농고 사이에 있는 묘지.
  • 단지배미(논) : 송정저수지 밑에 있는 논.
  • 당 산(산) : 문산 남쪽에 있는 산. 당산제를 지냈었음.
  • 당산등(등) : 당산나무 동쪽 등성이.
  • 대문산(마을) : 문산 큰 마을. 밀매. 민뫼.
  • 대정걸(들) : 송구래 남쪽에 있는 들. 대정이란 사람의 소유였음.
  • 대정걸보(보) : 대정걸에 물을 대는 보.
  • 도동고개(고개) : 문산에서 장운동으로 가는 고개.
  • 독득골(골) : 소롱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 독 산(마을) : 문산. 밀매. 민매.
  • 동지시암(우물) : 호동 앞에 있는 우물.동지 벼슬을 한 김씨가 파서 길러 먹음.
  • 뒷 매(산) : 송정 뒤에 있는 산.
  • 뒷산골(골) : 문산 뒤에 있는 골짜기. 뒷샘골
  • 뒷 샘(우물) : 뒷샘골 있는 샘. 물이 잘남.
  • 독 산(禿山) : 문산(文山).
  • 드렁고개(고개) : 드렁골위 고개 장운동으로 넘어감.
  • 드렁골(골) : 문산 북쪽에 있는 골짜기.
  • 마지까끔(산) : 요롱골 남쪽에 있는 산. 마대산. 문흥리 마지막 선.
  • 망태배미(논) : 송정저수지 안에 있는 논. 망태같이 생겼음.
  • 매 봉(산) : 삼각산을 일명 매봉이라고 함.
  • 모개시암(우물) : 원지시암 위쪽에 있는 우물. 곁에 모과나무가 있었음.
  • 모래걸(논) : 모래시암 아래쪽에 있는 논. 모래가 많았음.
  • 문 산(마을) : 문흥동에 으뜸되는 마을. 문뫼(文山). 민매. 대문산. 독산.
  • 문산교(다리) : 문산 동쪽에 있는 다리. 평상교.
  • 물통골(고개) : 영험한 물통이 있었는데 나환자가 물을 맡고 병을 낳고는 물이 줄어들어 물통이 없어졌다고 함.
  • 바느실(들) : 포사막굴 아래쪽에 있는 들.
  • 부남실(들) : 송정 북쪽에 있는 들.
  • 분혁안실(마을) : 부남실.
  • 비암보(보) : 송정 남쪽에 있는 보.비암(뱀)이 기어가는 것처럼 구불구불 함.
  • 뽕나마배미(논) : 문산 앞에 있는 논. 곁에 뽕나무가 많았음.
  • 삼각산(산) : 잉굴 위에 있는 산인데 여기서는 매봉이라고도 함.
  • 상숫등(등) : 송정 남쪽에 있는 등성이.
  • 새까끔(산) : 읫등 남쪽에 있는 산. 새로 된 까끔(말림갓)이 있음.
  • 새미논(논) : 갈미배미 아래쪽에 있는 논. 샘이 있었음.
  • 석시낭골(골) : 독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중국 진나라 석숭과 견줄 만한 부자가 날 명당이 있다 함.
  • 삼부락(등) : 삼부래기 송정저수지 위에 있는 등성이. 삼부래기.
  • 소금장골(골) : 소령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소문산(마을) : 문산 서쪽에 있는 마을. 송정마을. 소나무 정자가 있었음.
  • 송구래(들) : 평교 남쪽에 있는 들.
  • 송령굴(골) : 마지까금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송정저수지(못) : 부남실들에 있는 저수지.
  • 수박등(등) : 방고개 위에 있는 등.
  • 수용소(마을) : 물고래들 서쪽에 있는 마을. 1·4후퇴 시 피난민 수용소가 있었음. 정착촌.
  • 아래방고개(고개) : 송산에서 농고로 가는 고개. 방고개 아래가 됨.
  • 앞샘골(들) : 송정앞 들.
  • 여 술(마을) : 호동. 여우가 많았다고 함.
  • 여우박골(골) : 여우가 많이 살았다고 함.
  • 웃방고개(고개) : 송산에서 농고로 가는 고개. 방고개 위가 됨.
  • 윗대정걸보(보) : 대정걸들에 속한 보.
  • 윗 등(등) : 문산 동북쪽 길가에 있는 등성이. 기와을 구었다 함.밑에 광주교도소가 있음.
  • 요롱골(골) : 드렁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용골
  • 원지시암(우물) : 모래걸 밑에 있는 우물. 김원지의 것이었음.
  • 잉 굴(골) : 잉어가 나왔다고 해서 잉굴이라 하였다 함.
  • 장구배미(논) : 문흥동에 있는 논. 장구처럼 가운데가 잘룩함.
  • 잿 봉(祭峰, 산) : 문산 북쪽에 있는 산. 산제(기우제)를 지냈음.
  • 정착촌(마을) : 수용소.
  • 지낭걸(논) : 개머리배미 밑에 있는 논.
  • 코주백이(들) : 송정마을 아래 입구가 됨.
  • 큰무딤등(등) : 읫등 위에 있는 등. 큰 무덤이 있음.
  • 평 교(마을) : 문산 동쪽에 있는 마을. 평산교 다리 근처가 됨.
  • 평상교(다리) : 문산교. 평상다리. 평교.
  • 포사막굴(골) : 교도소 위에 있는 골짜기. 모래가 많음.
  • 한선녀골(골) : 한시랑굴 아래 있는 골짜기.
  • 한시낭굴(들) : 검바우 위에 있는 들.
  • 호 동(마을) : 문산 남서쪽에 있는 마을. 뒷산에 여우가 깃들었다 함. 여술.

    [문흥동 - 유물유적]

    향로

    * 백자투각 향로 : 문흥동 326번지, 조선후기

    백자투각 향로는 양회근씨 개인 소장유물로서 제주 양씨 집안에서 3대째 조상 대대로 제례시에만 사용되어 온 향로인데 제일(祭日)은 음력 12월 28일과 1월 10일 두 차례이다. 향로의 보존 상태는 파열 흔이 여러 군데 보이고 있으나 주변을 가는 철사로 동여매어 겨우 제 기능을 하고 있는 상태이다.
    기저부(器底部)는 원통형으로서 직사각형의 투각과 빗살모양의 문양을 음각으로 신부하단(身部下段)에 새겼다. 기복부(器腹部)도 원통형으로 2열의 띠를 돌리고 입술은 직립으로 약간 외반되어 있으나 손잡이는 양쪽에 따로 붙어 있지 않다. 뚜껑은 별도로 제작되었으며 기표면에는 3곳에 크로바모양의 문양을 투각으로 하여 장식의 효과를 내고 있다. 뚜껑의 손잡이는 거치문으로 모양을 내고 직접 손이 닿는 곳을 횃불 모양으로 음각선을 내어 꼭지를 만들었다. 향로의 전체적 색조는 재회색을 띠고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안정감과 입체감을 엿볼 수 있다.
    향로의 연대는 소유자인 양회근 씨를 기준으로 볼 때 3대째 전래되어온 점으로 보아 조선후기로 볼 수 있다.
    규모는 총 높이 23cm, 직경 15.2cm, 둘레 46cm이며 저부직경 9cm×6cm, 입술직경 15.2cm, 동부직경 14cm, 뚜껑직경 13.5cm, 손잡이직경 6cm이다.

    입석
    문흥동 할머니 돌

    <문흥동 할머니 돌>

    * 입석 1기(할머니 돌) : 문흥등 995-4(문흥로 78), 마을공유.

    입석이 위치한 곳은 200여 년 생 정도의 할머니 당산나무 사이에 세워져 있으며 추상적 형태는 사람 형상을 닮고 있다. 하부는 땅 속 깊이 묻혀 있으나 제주양씨 문중 회장 양한동 씨에 따르면 당산제가 끝나면 제(祭)에 쓰였던 제물을 조금씩 모아서 돌 앞에 묻었다고 한다. 정월 대보름날 남녀가 줄다리기를 하고 줄을 입석이 위치한 나무에 매달고 그네를 타며 입석제도 지낸다. 제주는 몸을 청결하게 한 후 한복을 갈아입고 5일 이전부터 이곳에 금줄을 치고 부정한 것들의 출입을 막는다. 입석제에 필요한 음식물의 준비는 동네에서 공동으로 한다. 한때 동네에 소도둑이 들었으나 밤새도록 도둑이 입석 주변을 돌다 다음날 새벽에 잡혔다는 일화도 있다.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했던 입석 옆에는 마을 입구를 통제하는 개 형상의 입석(높이 45cm, 길이 110cm, 두께 30cm)과 돼지 형상의 석상(길이 90cm, 폭 58cm, 높이 40cm)도 함께 있다. 입석의 규모는 높이 135cm, 폭 88cm, 두께 30cm이다. 그러나 개 형상과 돼지 형상의 입석은 택지개발 당시 유실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문흥동 - 민속문화]

당산제

* 대문산 당산제

1) 할아버지 당산나무 : 문흥동 993-1번지, 수령 4백여년.

문흥동 문산(文山)마을은 1991년 문흥지구 택지개발사업 편입에 따라 사라졌고 지금은 아파트 단지와 상가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다. 이 마을은 젯봉이라 부르는 야트막한 야산을 뒤로하고 마을 정면에 문흥동 대주아파트가 자리잡아 있고, 마을을 빙 둘러 감싼 형국으로 광주로 진입하는 호남고속도로 동광주 교차로가 있다. 대문산마을 입구에는 수령 400년쯤 되는 할머니 당산나무(귀목나무, 느티나무)와 그 주위로 6그루의 나무들이 우산각이라 불리는 모정(茅亭)을 감싸고 있다.
이 마을 당산제는 음력 정월 칠일이나 팔일경에 주민들이 모여서 그 해의 제관(祭官), 축관(祝官), 화주(化主), 집사(執事) 등을 뽑으면서 시작된다.
제관의 선정은 엄격한 법도가 있어서 산고(産苦)나 상(喪)을 당하지 않았고 3년 이내 성주를 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생기복덕(生氣福德)이 맞는 남자를 선정하고 금기(禁忌)에 들어간다.
당산제의 비용은 마을 주민 모두의 정성을 모은 인구전으로 충당한다. 당산제 당일에 차릴 제물(祭物)의 준비는 원화주가 했으나, 제의 비용이나 제에 쓰일 쌀 등은 제미화주가 거둔다. 당산제의 준비는 1월 12일 양동시장을 이용했으며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에 쓸 제물은 성격이 달라 각각 따로 구입한다. 제물에 쓸 물건값은 깍지 않으며 제기(祭器)는 매년 사기그릇을 새로 사는데 제가 끝난 뒤 화주에게 주었다.
주요 구입물품은 돼지 머리, 삼실과, 제기, 쇠고기, 나물류, 북어, 조기, 김, 초, 향, 소지종이 등이며 제주(祭酒)는 미리 담근 청주를 쓴다. 제물 준비를 할 때에는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서 머리에는 수건을 쓰고 입에는 입 마개를 했으며 음식의 간은 보지 않는다. 화주와 제관 등은 당산제 전날, 당산 주변과 마을 입구와 각자의 집 안팎을 정결히 하고 13일에 큰무등 등에서 파온 황토를 놓고 왼 새끼에 백지(白)紙를 끼운 금줄을 쳐서 잡인(雜人)의 출입을 막았다. 당산제를 잘 지내기 위해 제관, 축관, 화주, 집사뿐만 아니라 온 마을 주민이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는데 특히 제 지내기 3일 전부터는 비린 음식을 일체 먹지 않고 심지어 젓갈이 들어간 김치도 먹지 않는다. 제관, 제주, 화주로 선정된 사람들은 화장실만 다녀와도 찬물로 손발을 씻거나 목욕을 하는 정결함을 유지하며 부정한 일이나 장소에도 가지 않고 잡인과의 상면도 피했다.
당산제의 순서는 할아버지 당산에서 14일 자정쯤에 제를 먼저 지낸 다음, 닭이 운 뒤에야 마을 앞 할머니 당산에서 제를 올린다.
마을 뒷쪽에 있는 할아버지 당산은 둘레가 열두 아름이 넘는 튼실한 귀목나무였는데 8·15 해방 전 태풍으로 인하여 밑둥이 부러진 뒤, 그 뿌리에서 다시 자란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한다. 지금은 그 숲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섰고, 아파트 놀이터에 할아버지 당산나무 한 그루만이 홀로 서 있다.
할아버지 당산은 당산(堂山)의 성격이 강해 금기사항(禁忌事項)이 많은데 그 중 당산제의 제물도 가려서 비린 생선류는 일체 쓰지 않는다. 화주집에서 준비한 제물을 당산으로 옮길 때에는 횃불을 들거나 떡시루, 찰밥시루 등을 각각 든 18명의 남자들만 참여한다. 제물은 시루떡, 삼실과, 나물, 돼지 머리 등을 진설하고 제를 올린다. 제의 순서는 유교식인데 향을 피우고 초를 켜 제단(祭壇)을 정화시킨 뒤 강신-참신-초헌-독축-개반삽시-아헌-종헌-소지-재배-헌식 순으로 진행된다.
독축문(讀祝文)의 내용은 당산에게 마을의 무사태평(無事泰平)과 재앙을 막아 주며 풍년이 들도록 기원한다. 축문의 구체적 문안(文案)은 중단된 지가 오래되어서 찾아 볼 수 없었다.
할아버지 당산에서 제를 마친 뒤, 마을 앞 할머니 당산에서 따로 준비한 제물로 진설 하는데 할아버지 당산에 비해 제물도 생선류가 추가되어 다양하고 넉넉하며 풍물도 흥겹게 친다.

문흥동 할머니 당산나무

문흥동 할머니당산나무

* 할머니 당산제

2) 할머니 당산나무 : 문흥동 995-4(문흥로 78), 수령 4백여년 내외

할머니 당산의 진설과 제의절차(祭儀節次)는 할아버지 당산과 동일하나 시작과 끝 부분에 풍물(風物)이 있는 점만 다르다. 할머니 당산나무 밑에는 제단(祭壇)처럼 쓰이는 밑 부분을 파고 돼지 머리와 함께 제물을 조금씩 나눠 한지(韓紙)에 싸서 묻는다. 당산나무 밑둥에는 높이 136cm, 너비 70cm, 둘레 165cm인 입석(立石)이 박혀 있다. 당산제가 끝난 뒤 15일 오전 중에 당산제 때 준비한 제물의 음복(飮福)을 겸하여 마을의 중요한 안건을 결정하는 목청계(木靑契)를 열어 그 해의 품삯이나 공동 관심사 또는 머슴의 새경 등 마을의 크고 작은 일들을 논의하고 결정하였다. 당산제가 끝난 15일부터는 가가호호(家家戶戶)를 방문하여 마당밟기를 하였는데 이때 거두어진 돈과 곡식 등은 마을의 공동기금으로 사용하였다.

엄격한 금기(禁忌)를 지키며 모든 주민들의 정성을 모아 지내오던 대문산 당산제(大文山 堂山祭)가 어느 날 하남 양반이라는 분의 거부로 단절되었는데, 당산제를 열심히 주도해 오던 이 분의 돌연한 행동의 변화는 주민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이 후 매년 차일피일 미루다 당산제는 단절되고 말았다.

당산제 후 집집마다 일정량의 볏짚을 내어 마을 안 사거리에서 줄을 드리는데 귀목나무 3합의 줄을 걸고 50미터쯤 되는 큰 줄을 만든 다음 마을을 양지와 음지로 편을 갈라 풍년을 기원하는 외줄다리를 2월 초하루에 실시했으나 이제는 보기 힘든 민속이 되어 버렸다.

한편 1998년 음력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문산당산축제(文山堂山祝祭)가 개최되었다. 제주양씨문중(회장 : 양한동)을 중심으로 동사무소와 유관기관 그리고 주민대표가 주관한 이 행사는 당산제(문산공원), 풍물놀이·외줄다리(문산초등학교) 등이 행해졌으며 마을민의 횡적인 끈을 단단히 하고 집단단결을 목적으로 하였다. 행사비는 마을유지들이 각출하고 구비(區費)에서도 일정액이 지원되었다. 이 행사를 주관했던 양한동 씨는 당산제가 마을민의 단합을 이끌고 민속문화의 맥을 잇는 시발점이 되기를 바랐으나 마을 주민들의 참여가 적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고 말한다.

마을 뒷쪽에 있는 할아버지 당산은 둘레가 열두 아름이 넘는 튼실한 귀목나무였는데 8·15해방 전 태풍으로 인하여 밑둥이 부러진 뒤, 지금은 그 뿌리에서 자란 한 그루만이 남아있다. 할머니 당산은 무분별한 택지개발로 인해 한때 고사위기(枯死危機)를 맞이했으나 장수환(72세, 문흥동 995-5 명지APT 101-706호)씨의 노력으로 97년도에 노후목 치료와 뿌리 가꾸기가 실시되어 다시 푸르름을 되찾게 되었다. 장수환 씨를 비롯한 마을 주민들의 바램은 할머니 당산나무가 시 지정 기념물(1999년 2월 8일 보호수로 지정됨)로 지정되어 후세에 길이 보존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 나무는 마을 앞 당산나무로 나무 가지가 네 가지로 밑에서부터 커 올라와 수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고, 나뭇가지 사이에 입석이 박혀 있다. 이 당산을 할머니 당산이라 하고, 마을 뒤에 지금은 고목이 되어 없어졌으나 이 나무를 할아버지 당산이라 하여 해방 후까지 당산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폐지하고 지내지 않는다.

이 나무에 얽힌 전설로는 옛날에 마을에 도둑이 들어 소를 끌고 가다가 도둑이 이 당산나무를 날이 세도록 돌다 잡혔다고 한다.
그리고 이 나무의 잎이 피는 것을 보고 그 해의 풍흉(豊凶)을 안다고 한다. 나뭇잎이 일시에 피면 그 해에 풍년이 들고, 잎이 일시에 피지 않고 아래서부터 피어 올라가면 이앙(移秧)을 밑에서부터 해 올라가고, 잎이 위에서부터 피어 내려오면 밭걸부터 심어 내려온다고 한다. 또한 잎이 일시에 피지 않고 산발적으로 피어나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이곳 입석 1개는 2주(株)의 당산나무 사이에 꽉차게 들어가 세워져 있으며 나머지 2개는 당산나무 옆에 마을로 들어가는 길가에 양쪽으로 비치되어 있다. 그리고 당산 정면에 마을을 수호하는 2개의 입석이 있는데, 왼쪽에 있는 입석은 개 형상, 오른쪽에 있는 입석은 돼지 형상이었다. 그러나 개 형상과 돼지 형상 입석은 택지개발 당시 유실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해방 이전에는 당산제를 지낼 때 줄다리기를 하고 줄을 입석에 감고 풍년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이 당산나무들 가운데에는 우산각이라 불리는 모정(茅亭)이 있어 마을의 휴식처 노릇을 하고 있다.
당산제에 얽힌 속신(俗信)과 금기사항(禁忌事項)은 다음과 같다.
·마을에 초상(初喪)이 나서 상여(喪輿)가 나갈 때는 할아버지 당산 쪽으로 넘어갈 수 없다.
·당산제에 쓸 제물을 준비하다 음식의 간을 보거나 먹으면 입이 부르튼다.
·도둑이 마을에서 물건을 훔쳐 나가질 못하고 당산 주위만 맴돌다 물건을 버린 후에야 겨우 몸만 빠져나갔다.
·당산제 지내는 저녁에 합궁(合宮)하다 몸이 떼어지질 않았는데 할머니 당산 앞에서 덕석몰이를 당한 뒤에야 정상이 됐다.
·제관(祭官)으로 선정되면 여러 가지 불편한 규제사항이 많아 감기를 핑계삼아 제관이 되기를 거부했던 주민 한 분은 당산제가 끝난 뒤 할머니 당산에서 음복(飮福)할 때 술 한잔을 마시고 절명하였음.

* 평교 당산제(平橋 堂山祭)

평교(平橋)는 현재 두암동과 각화동, 문흥동이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물려 있다. 대문산(大文山)과 소문산(小文山)마을을 평교와 구분짓는 남해고속도로가 뚫리기 전에는 대문산과 송정마을의 진입로에 해당되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터가 배 형국인지라 보름날 아침 동네사람 몇 명이서 20자 남짓의 가죽나무 짐대 2개를 준비하여 그 꼭대기에 각각 오리 1마리씩을 앉히고 입에는 대(竹)를 쪼개어 물린다.
할아버지 당산 옆에 1기를 세우고, 하나는 현재의 남해고속도로 한복판쯤에 동네 좋으라고 세웠으나 8·15해방 후 단절되어 버렸다. 이로 인해 마을의 당산 근처를 짐대거리라고 불렀으며 현재의 농산물도매시장 건너편 교도소 옆은 장승이 서 있었기 때문에 장승배기라 불렀다고 한다.
평교마을의 당산에는 수령 70년쯤 되는 귀목나무 한 그루와 단기 4288년 을미년(乙未年)에 세운 정자 1동 그리고 독영감(돌영감)이라 부르는 80cm 높이의 입석 하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택지개발 당시 독영감과 정자는 유실되었고(제보 : 박판석, 문흥동 213번지 21/1) 문흥동 천주교회 옆에 자리잡고 있는 귀목나무는 반쯤 말라죽어 있는 상태라 치료가 시급한 실정이다.

음력 정월 14일에 마을주민들은 당산제보다는 훨씬 간소한 제를 올렸는데 때문에 문산마을이나 송정마을 심지어는 평교마을 사람들까지도 이 제를 당산제로 생각지 않고 있다(제보 : 양한동, 제주양씨문중회장외 마을주민). 자정쯤에는 풍물패를 대동하고 삼실과와 북어 몇 마리를 제물로 갖추어 소주를 제주로 하여 동네의 평안을 기원하는 약식의 당산제를 유교식 절차에 따라 지낸다. 정결한 몇 사람을 제관으로 선출하고 당산에 금줄을 두르고 황토를 깐 다음 생쌀과 조를 제물로 하여 정성껏 제를 지낸 뒤 밤새워 굿을 친다.

1919년에 호열자(콜레라)가 크게 번져 이 마을에 큰 피해가 속출하자 음력 8월 3일 날을 받아 천제(天祭)를 지냈는데 정결한 몇 사람을 제관으로 선출하고 당산에 금줄을 두르고 황토를 깐 다음에 생쌀과 조를 제물로 하여 정성껏 제를 지낸 뒤 밤새워 굿을 치다가 술을 마시고 모두 당산 부근에서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이 동네는 시끄러워 도저히 더 있을 수 없으니 이제 도동고개(마을 인근고개)로 넘어가자고 하더니 월봉댁만 데리고 병귀(病鬼)들이 마을을 떠나는 것이 당산 옆에서 잠을 자던 사람들에게 현몽(現夢)되어 깜짝 놀라 일어났는데 과연 그 다음 날 꿈에 말한 대로 월봉댁만 호열자로 죽고 나서는 마을에서는 더 이상의 피해자가 없었으며, 그 다음 해는 대문산과 소문산에 열병이 유행했으나 평교에서는 당산의 영험(靈驗)으로 한 사람도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 소문산(松亭) 당산제(堂山祭)

소문산은 현재의 대주아파트 자리에 있던 여술마을과 6·25때 피난와서 정착한 월남인들의 정착마을(혹은 收容所) 그리고 현재 터의 송정(松亭)마을을 통틀어 소문산이라 부른다.
송정(松亭)이란 마을 명칭은 지금은 없어졌으나 회동댁(양규율 씨 조모) 집 앞에 있던 마을의 할아버지 당산인 커다란 소나무 때문에 생겼다고 구전된다. 밑둥이 성인 5명이 손을 맞잡아야 안을 만큼 커다란 소나무가 해방 이후 큰 바람에 부러진 뒤 없어져 버렸다.

할머니 당산은 김치호(金治鎬) 씨 집 앞에 있었는데 수종은 귀목나무이며 둘레는 성인의 6발정도 되는 거목(巨木)이었다.
소문산 당산제(小文山 堂山祭)는 중단된 지 20여 년이 지났으며, 이곳 또한 당산제에 온갖 정성을 다해 지내왔다고 전한다.
당산제의 준비는 음력 1월 10일 저녁 마을회의에서 그 해의 운세와 생기복덕이 많고 궂은 일이 없는 사람을 선발하는데 제관(祭官)은 헌관(獻官) 3명, 축관, 화주 3명을 뽑아서 각각의 임무를 부여하면서 시작된다.

제의 비용은 용머리돈이라 부르는 호구전(戶口錢)으로 충당했으며 제물은 음력 1월 12일 양동장에서 구입하는데 화주 내외를 포함하여 4명이 구입했으며 물건값은 절대로 깍는 법이 없고 잡인과의 접근을 피하기 위해 제물을 구입한 뒤 저녁 늦게야 동네에 돌아온다.
주요 제물은 생선으로 부서와 북어, 대추, 밤, 곶감, 배, 쇠고기, 돼지 머리, 시루떡, 삼채나물과 초, 향 등이며 당산제에 쓸 제기는 마을에서 보관하고 있는 목기(木器)를 쓰며, 제주(祭酒)는 화주 집에서 준비한 청주(淸酒)를 쓴다. 1월 13일이 되면 화주와 제관집 그리고 마을 입구와 당산 주변에 왼 새끼 금줄을 치고 마을 뒤 북덕산에서 파온 황토를 소복하게 세 군데씩 놓아 잡인의 출입을 막는다.
제관과 화주, 축관들은 선정된 이후 철저히 금기생활을 하는데 매일 찬물로 목욕하고 상가출입을 하지 않고 잡인과의 접촉도 피하는데 대소변 후 목욕재계(沐浴再啓)하는 등 정성을 기울인다.
1월 14일 밤 10시쯤 제관과 축관들이 화주집에 모여서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에 쓸 제물을 각기 나눠 제 지낼 준비를 한 다음, 자정에 쇠, 징, 북, 장고, 나발, 소고 2명으로 짜여진 풍물패를 앞세우고 남자들만 할아버지 당산으로 간다. 부정탄 사람은 지골 맞는다는 속신(俗信) 때문에 당산에 가질 못했다고 한다.
제순(祭順)은 유교식 절차를 따르는데 진설-인사굿-초헌-개반삽시-풍물-아헌-축문-종헌-소지-풍물-헌식 순으로 이어진다.
헌식은 돼지 머리를 한지로 싸서 당산 밑에 묻고 나머지 음식은 화주집으로 옮겨 보름날 아침에 나눠 먹는다. 당산제의 축문은 전하지 않으나 마을의 무사태평과 풍농(?農)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할아버지 당산에서 제를 마친 뒤 닭이 울고 나서야 따로 제물을 가지고 할머니 당산에서 제를 지낸다. 축문의 내용 일부만 다를 뿐 기타 제례절차는 할아버지 당산과 동일하다. 당산제를 모두 마친 제관, 화주, 축관 등은 이레 동안 출입을 삼가하고 근신(勤愼)한 뒤 대문에 두른 금줄을 거둬 당산 밑에 가서 불에 태워 묻는다.
보름날 아침 화주집에서 준비한 제물로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음복을 한 뒤, 그 해의 당산제를 결산하고 마을의 공동안건을 논의하며 품삯과 머슴의 새경, 공동작업을 결정하는 마을 회의가 열린다. 회의를 마친 뒤에는 화주집에서 풍물을 지치고 즐겁게 하루를 보낸다.

16일부터는 마을 안 샘굿을 시작으로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문굿-마당굿-조왕굿-천룡굿 등을 치며 잡귀잡신(雜鬼雜神)을 쳐내고 명복을 빌어 그 집의 태평을 기원하는 마당밟기를 한다. 이때 거둬진 경비는 마을의 공동계(共同契)에서 관리한다.
1924년 호열자가 창궐하여 부득이 당산제를 한번 중단한 적은 있었으나 그 후 일제의 중지령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당산제를 지내오다 광복 이후 몇 차례 지낸 뒤 6·25를 전후하여 중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민요

(1) 물레노래
물레야 물레야
뱅뱅 돌아라
남의 집 귀동자
밤 이실 맞는다

물레나 형제는
삼 형제요
가락의 형제도
삼 형제요
물레나 형제는
팔 형제라

물레야 물레야
어리 뱅뱅 돌아라
뒷집의 김도령
밤이실 맞는다
밤이실 맞는다

물레야 물레야
어리 뱅뱅 돌아라
뒷집의 김도령
밤이실 맞는다가네

* 제보 : 유덕순, 문흥동

(2) 상여소리
가나-아-아-오오-얼
어어 어-어-어
산천으로 여영가네
가나-아-아-오오-얼
어허이 어허이 에히야
어허이 어허이 .
넘자 어화 넘자.
명전 삽전 앞을 시우고


가네 영영가네
돌아가신 맹인이
건너 강산을 영영도 가시네
어허이 어허이 에히야
어허이 어허이
어화 넘자
가나
우리가 살면은 몇 백년 살까.


* 제보 : 김병기, 문흥동

(3) 꽃타령
이삼사월 진지리에
네꽃 졌다고 설워마라
명년이라 춘삼월이 또다시 오면
잎도 피고 꽃도 핀다.

육지 평지 다 어디다 두고

석전 바우절에 가서 힘을 였냐
쭉지 평지 누가봐도
보기 좋다고 다 끊어 가고
쭉지 좋다고 다 끊어 강께
육지 평지 힘을 였네.

* 제보 : 김현종, 문흥동

(4) 세월아
세월아 봄철아
오고 가지를 말어라
아까운 이내 청춘이
다 늙어 간다

세월아 봄철아 갈라거든
네나 가제
요네 청춘아
가거나 간게.

* 제보 : 정순희, 문흥동

(5) 사랑노래
나 죽었다고
맘사줄 말고
나 살은 동안
날 섬겨주소

큰애기 꽃따러 가는데
구름은 더덩실
비실로 가네

* 제보 : 주혜순, 문흥동

(6) 사랑노래
친구 능산 단장통에
바람이 분다고 씰어 질까

성벽같은 곧은 절개
내몬다고 부러지리

* 제보 : 유덕순, 문흥동

(7) 빈대타령
빈대는 토막우서 살고
벼룩은 밍지밭에서 살고
이는 두더지 속에서 살고
가랑아
가랑아
예! 죽을 지
새깽이들 디꼬 집 잘 봐라
엄마
어디가요?

나 저그 서울 귀경갔다 올란다
가랑아!

둥근 바우가 맛대치면 어쩌고
둥근 바우가 맞대쳐서
죽을 지
살아올 지
모르겄다

* 제보 : 유덕순, 문흥동

(8) 산아 산아
산아 산아
높은 산아
네 아무리 높다해도
우리 부모 인보담
더 높을소냐

물아 물아 깊은 물아
네 아무리 깊다한들
우리 어무니 속보다
더 깊을소냐

* 제보 : 김화봉, 문흥동

(9) 밭노래
못다맬밭 다 매고 나니
금봉채를 잃고 가네
금봉채를 찾을라면
내 품안에 잠들고 가소

놀다가세 놀다가세
오늘 저녁이 어찌 그리 좋단가.

* 제보 : 김윤덕, 문흥동

(10) 뽕따러 가세
뽕따러 가세
뽕따러 가세
뒷동산에
뽕따러 가세

뽕도 따고
임이나 임도 보고
뽕이나 뽕따러 가세

* 제보 : 김양님, 문흥동

(11) 임노래
돈실로 가네
돈실로 가네
나주나 영산포로
돈실로 가네

돈도나 실고
임도나 보고
우리나 둥실
돈실로 가네

* 제보 : 주양례, 문흥동

(12) 시집살이
울어머니 날
시집 보낼 적에
왕대 죽신을
원했던가

모디나 모디마다 설음을
서럽다 말을 안헐래도
모디 모디 서럽고나

* 제보 : 구정애, 문흥동

(13) 내 친구
내 친구야
그리를 말어라
우리내 밭맬랑께

술 독아지 가져갔단다
그 놈이 부애가 나서 죽겄더라
그 년이 황천대학을 갔구나

* 제보 : 구정애, 문흥동

(14) 할미꽃
뒷동산에
할미나 꽃은
늙으나
젊으나꼬부라졌네

* 제보 : 안야순, 문흥동

(15) 성님 성님
성님 성님 사춘 성님
나 왔다고 괴념마소
쌀 한 되만 젖었으면
성도 묵고 나도 묵고
구정물이 젖었으면
성 퍼주제 내 퍼준가

누른 밥이 눌었으면
성을 주제 내게 줄까
성님 성님 괴념마소
먹고 남은 찌그러기
얻어 묵고 갈망정이라도
그렇게 나 왔다고 괴념마소

* 제보 : 주양례, 문흥동

(16) 화투타령
정월 솔아 속히 커라
이월 매조 화사허도다
삼월 사꾸라 산란헌 마음
사월 흑사리 초시절에
오월 난초 날아든 나비
유월 목단에 살짝 앉어
칠월 홍사리 홀로나 누워
팔월 공산 달도 밝다
구월 국화 서리맞은 잎에
시월 단풍에 다 떨어졌네
동짓달 오동 비 삼십에
백설만 남기고
그 많은 인생 가버리도다

* 제보 : 김을봉, 문흥동

(17) 사랑노래
아롱아 다롱아 너만 가고
나만 혼자 버려 두느냐
넘는 내 가슴에 눈오는 벌판이냐
가루 날리는 사막이다
불꺼진 형국이다

손잡은 이 입사루
청실 홍실 담태맺은
맹세헌 사랑이냐
두 갈래 길이다

* 제보 : 김양님, 문흥동

(18) 밭노래
못다 맨밭
다 메고 갈라다
금봉채를 잃고 고여
에아라 노아라
아니 못 놓컸네
능지를 하여도
내가 못 놓컸네

두 주먹 턱 놓고
나누나늘어진 낭자
뉘 간장을 녹일라고
저 모냥으로 생겼냐
에헤야 데야 에헤에야
에헤야 뒤어라 사랑이로구나

오동동추야 달이 덩덩 밝은데
정든님 생각이 시름없이
에에야 데야 에헤야 데야
에헤야 데야 에헤야 데야
에헤라 뒤어라 사랑이로구나

* 제보 : 구정애, 문흥동

(19) 과부노래
저그저 금천 비개
안단목초로 선을 둘러
둘이 비자고 지었던 비개

혼자서 비고 잠을 자니
비개 넘어로 눈물이 흘러 흘러서
한강수 되었네

* 제보 : 유덕순, 문흥동

(20) 시집살이
백두산이 높다하되
시아버님보다 더 높으며
사자봉이 무섭다헌들
시어머님보다 더 무서우랴
고추 후추가 맵다헌들
시동생보다 더 매우랴
해와 달이 밝다헌들
시어머니 귀속보다 더 밝으랴
국화꽃이 곱다헌들
남편보다 더 고우랴
함박꽃이 곱다헌들
자식보다 더 고우랴


열 두 방에 자리 겉고
아홉솥에 불을 때고
도리 도리 도리판에
수저놓기 어렵드라
둥글 둥글 수박식기에
밥담기도 어렵고
남편님은 옷 달래고
앉은 애기는 밥 달래고
누운 애기는 젖 달래고
못헐래라 못헐래라
시집살이는 더 못헐래라

눈 어두워 삼년 살고
귀 먹어서 삼년 살고
말 못해서 삼년 살고
시집살이 석 삼년에
열 두폭 홍치마가
눈물 콧물 다쎄었네
산딸같이 좋든 머리는
백발이 웬말이요
건뜻허면 듣는 귀는
마귀할미 처갔는가
바윗돌 같이 단단헌 이빨
홍수를 만났는지
백옥같이 희던 얼굴
호박꽃이 다 피었네
비단결 같이 곱던 손길이
갈퀴손이 다 되었네
솔대같이 곧은 허리는
활등같이 굽었구나
장단지를 걷어보니
비수같이 내리솟네

* 제보 : 김을봉, 문흥동

설화

(1) 양한림 이야기
옛날 거 다라실 양씨들이 있었드라요. 양씨들이 응 능주 다라실 양씨들이. 말이 있지 않허요. 다라실 양씨 집으로 장개를 갔으면 갔지 과거는 안헐란다고. 모두 양반들 집안이요. 다라실 양씨 집안에 가서 청천과수로 유복자를 하나 낳아 놓고 카운단 말이요. 그렁께 유복자를 혼자 키워서 인자 여닐곱살 안짝으로 키워서 서당에 입학을 시켜 놨는디 서당에를 갈라치면 꼭 재를 넘어 댕기는 갑디다. 인자 서당에를 갈라면 지그 어무니는 재산이 없이 산께. 남의 품팔이나 해서 묵고 살고, 어찌튼가 노력히서 잘 살려고 혔어. 나이 여삼십됐고 아들은 나이가 열댓살이 되어서까지 서당에를 당긴디.
하루는 서당에를 간디 비가 어떻게나 많이 퍼붓더라요. 그러니 서당에를 갈 수가 없어. 인자 재를 넘어 가는 질이 하도 멀어 시방으로 말허자면 한 십리길이나 되던 갑디다. 하도 비가 많이 퍼붓어 이제나 그칠까, 저제나 그칠까 기다리다가는 애라 내일까지는 집에서 공부나 해보고 서당에 가든지 못가든지 인자 공부나 허자고 그리고 있어. 지그 어메는 베틀을 방에다 놓고 베를 짠디 서당에 다시 간다고 헌 놈이 책보를 걸머지고 다시 들어오거든. 긍께 너 어찌서 서당에를 안가는가 허니, 어무니 이래 저래 갈려고 했는디 어떻게 비가 많이 퍼붓든지 도중에서 가지를 못허고 앞길이 안보여 다시 오던 중이요 허니 어무니는 그리야 허면서 나는 너 하나를 믿고 이렇게 고생허면서 유복자 너를 공부시킬려고 허는디 이제보니 너를 키워 봤자 쓸것이 없을것 같응께 나도 고생헐 필요가 없다허며 가세(가위)로 앞에 놓인 베틀에 매진 베를 싹싹 다 잘라 부리고 일어서 부링께 아들이 어무니의 손을 꽉 붙잡으며 허는 말이 어무니 나 서당에 갈라요. 갈라요. 용서해 주세요. 어무니가 하도 그리쌍께 가기는 가야 쓰겄는디 비는 더욱 억쑤로 쏟아지고 허지만 지그 어무니의 청에 못이기어 재를 넘어 간디 비는 억쑤로 쏟아지제.
옛날에는 공동산에다가 초분을 했어라우. 사람이 죽으면 바로 땅에 묻지 않고 산에다가 그대로 시체를 놔두었거든. 육탈 헐때까지. 어찌나 비가 억쑤로 쏟아지든지 어찌 헐 수가 없응께. 초분 하나에 의지허고 앉았어. 앉어 있는디, 비가 이제나 저제나 갤까 해도 안 갠께 밤이 어두어져 부렀단 말이여.
서당에 가자니 어두워서 오도 가도 못허고 있다가 밤중이 되어 부렀어.
한밤중찜 되니 귀신소리가 났어. 초분 옆에 사는 한 귀신이 다른 귀신 이름을 부르더라우. 아무개 아무개 부르며 오늘 이 동네 누구집엘 가세. 거그 누가 애개를 나께 첫국밥이나 얻어 묵고 오자고.
가만히 들어보니 내 옆 귀신이 허는 말이 나는 양한림을 모셔서 못가겠으니 너나 다녀오라고 허드라여. 손님을 모셨다고? 한림이라는 벼슬은 선생님이거든. 그 보다 더 높은 벼슬은 선생님이거든. 그 보다 더 높은 벼슬은 없응께. 그리야 허고 자네들이나 갔다오소. 허고는 얼마쯤 있응께, 또 부르더라여. 잘 댕겨왔는가 허니 잡어묵을 것들이 첫국밥을 허면서 돼지막을 뜯어다가 불을 때길래 생전 빌어묵고 살어라 허고는 와부렀네. 그러더라여.
옛날에는 애기가 나서 첫국밥을 헐려면 좋은 나무를 때서 첫국밥을 허제. 궂은 나무는 안땠거든.
그리가지고는 내가 이대로 공부를 열심히 허면 훌륭한 선생이 되것구나. 큰 벼슬을 허것구나 허고는 생각해서 그 후부터는 열심히 공부를 해각고 양한림이 안 되었소.

* 제보 : 김병기, 문흥동

(2) 소문산·대문산
여그가 소문산인디, 소문산이라는 것은 이 마을(북구 문흥동 6통) 입구 아까 마을에 들어서면 삼거리 안 있습디까? 거그가 소나무가 있었어요. 얼마나 모냥이 좋았다구요. 크기도 허고, 옛날부터 사람들이 와서 사진 찍어가고 그랬다요.
영판 좋았어. 여그서라도 사진 한 장 박어 놨드라면 좋았을 것을 우리 마을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못했제. 징그럽게 좋았어요. 소나무가 어찌나 크고 모냥이 좋았든지 그 소나무 하나가 두 마지기 땅을 다 덮었당께요.
옛날에는 송정(松亭)이라 불렀는디 그 뒤 소문산으로 했다고 들었어요. 그 소나무 때문에 송정, 소문산이라 했어요.
이마을 아래 정자나무 있는 마을이 대문산인디 대문산 이름도 즉 말허자면 저 마을(북구 문흥동 5통)은 당산나무가 많이 있어 당산제를 많이 지냈었는디 대(竹)가 많아서 대문산이라고 불렀어요. 그 마을 앞 뒤 잔등에가 대나무가 아주 좋았어요. 여그가 담양이 가까웅께 대밭이 많이 있었고, 대가 잘라서 보기가 좋았어요. 속모르는 사람들은 대문산, 소문산 허니께 대문산은 큰 마을이고 소문산은 작은 마을이라서 그랬을 꺼라고 하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지요. 그러나 아는 사람들은 좋은 소나무가 있어서 소문산, 대나무가 많이 있어 대문산이라고 그러고 말해요.
그러나 오래 전에 광주가 커지면서 그 좋던 소나무나 대나무는 온데 간데 없어져 부렀어요. 얼마나 안타까운지 몰라요. 더군다나 택지 개발인가 무엇인가 때문에 우리 마을까지도 없어져 부린다니 섭섭함이 말로 다 할 수 없지요. 훗날에는 이야기로나 듣겠지요.

* 제보 : 김병기, 문흥동

(3) 깐치 이야기
깐치이야기도 있어.
모정옆에 드릅나무가 하나 있었는디 아주 크제. 초여름이여. 모정에 가만히 드러누워 있응께 큰 대명이란 놈이 그 드릅나무를 슬슬 기어 올라가드라여. 가만힌 보니 나무 꼭대기에 깐치집이 있는디 깐치집에서 알을 깠던가봐. 그 깐치알을 묵고 있거든. 그런디 옆에서 농부 하나가 그것을 보고 큰 독덩이를 던져 대명이를 때리니 땅으로 그만 딱 떨어져 부렀어. 긍께 다시 가서 죽여부렀제. 그리고는 그것을 불살라 부렀어. 지그 밭 가상에다가.
그 후 한 삼년 지냈는디 지그 밭 가상에 가서 먹때깔 나무가 요렇게 많이 열렸어. 그런디 이상헌 것이 먹때깔은 시껌히야 되는디 아주 많이 열렸는디 모도 다 노랗거든. 이상도히여. 다시 곰곰히 생각히보니 그 자리가 구랭이를 불살라부린 자리거든.
그리서 참 이상도 허다 허면 낫으로 비어붓어. 그리고는 그 이튿날 다시 가서 불질러 부렀제.
그렁께 한 삼년 먹때깔 나무가 안보이더니만 또다시 ?囑㎟祉すグ? 먹음직스럽게 뻘겋게 많이 열렸거든. 아주 맛있게 보이고 그러제. 또다시 이상도 허다 힛는디 그 사람도 모르게 먹때깔로 자기 손이 가드니 하나를 따서 입에다 넣고 묵어 부렀어.
그런 후로는 이 사람이 배가 불러오기 시작힛써. 노랗게 부어서 움직이지도 못해서 밥도 못먹게 되어 부렀어.
아마 그 먹때깔 하나가 구랭이 원수 갚을라고 그 사람 입으로 들어갔던 모냥이여.
그리각고는 한 여름이 되었는디 배가 노랗게 호박같이 불러서 손톱으로 퉁겨도 터질것만큼 되어부렀어. 죽을 날만 기다리제. 어떤 약을 묵어도 배가 주러들지 않으니 어쩔것이여.
그리각고는 온 동네가 난리가 났제. 영영 죽을 상이구나 허고 그 집 마루에 누웠제. 그러고 있는디 느닷없이 깐치 두마리가 어디서 날아왔는지 날아오더니 그 사람 배우에 앉더니 암놈 수놈 두놈인가비여. 두마리가 앉아서 잠시 조잘거리드니 그 뱃속에서 구랭이 새끼를 수백마리를 끄집어 내어. 그리고는 어디론지 날아가 부렀어.
그래서 다시 배가 줄어들어 살아나 부렀제. 그래 깐치도 보통 동물이 아니라고 그리 안허요. 까치가 짖으면 손님이 온다고도 허고.
그렁께 구렁이가 깐치알을 묵고 있던 것을 그 농부가 구해주어 깐치가 은혜를 갚은 것이제.
호랭이가 나와도 깐치가 짖응께. 성님은 모를 것이요(옆에 있는 할머니를 가리키며). 요 마을 넘어 도동고개가 있어요. 그리로 너물을 캐러 여럿이 갔거든.
그 고개를 넘어서 불두덩으로 넘어 온단 말이여. 나 혼자만 먼저. 근디 다른 사람들은 조금 뒤에서 쑥을 캐고 나는 곧바로 도동고개를 올라왔단 말이여.
근디 어째 깐치가 지슬 것이요. 그래서 밭가세로 오는디 꼭 저 괭이(마당에 놀고 있는 고양이를 가리키며)만 허드만. 근디 무늬가 아롱다롱 껌허고 저것보다 더 이쁘드만. 고것이 있는디 깐치가 그렇게 짖어대여. 그리서 뒤를 보고 성님 성님 이리 오시요. 여그 괭이가 있으니 잡읍시다. 허고 막 소리를 크게 질렀어. 그래도 그 말을 못들었는가 안와. 그러드니 더 크게 소리를 친께 다시 그놈이 산으로 슬금 슬금 갑디다.
그 때까지 깐치가 계속 짖어. 다시 성님 성님 얼른 내려 오랑께 허면서 소리를 질르드란 말이여. 어서 성님 거그 두고 얼른 내려 오란말일세. 나는 산중에 살아서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제. 고 놈이 호랭이 새끼여. 그래서 그 뒤에는 거그가 호랭이 새끼가 산다는 것을 알고는 절대로 나물캐러를 가지 안했어용.
호랭이가 그런다여. 까막 깐치가 아니면 가랑잎에라도 몸을 감추겄다고. 그렇게 깐치는 영험히여. 깐치를 속일 수는 없는 갑디다. 깐치는 옛날부터 영물이라고 그랬어.

* 제보 : 김윤덕, 문흥동

(4) 효자이야기
옛날 여그 웃마을에 효자 하나가 살았어. 지그 어메가 혼자 기신디. 이 효자가 잘 모셔도 아퍼서 돌아가시게 생겼어. 지그 어메가 하루는 허는 말이 내가 죽기전 죽순죽을 한 그릇만 묵고 죽었으면 원이 없겄다. 그랬거든. 동지 섣달이라 흰 눈이 펑펑 쏟아진디. 어참, 동지 섣달에 죽순이 왠말이여. 시방 같으면 냉장고에 사시사철 없는 것이 없을텐디.
그러나 효자인 아들은 어머님의 마지막 소원을 안 들어줄 수가 없어서 그 추운 엄동설한에 대밭은 대밭은 사방 각처를 찾아 다 다녔어. 그리도 죽순이 나올리가 없제.
그렇게 죽순을 찾으러 한 보름 이상 다녔을 것이여. 하도 돌아다녀서 손발이 다 얼어 동상이 다 들었제. 그러나 계속 죽순을 찾아 다녔어. 그러다가 어느날 한 대밭에 도착허자마자 쓸어지고 말았어.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등이 따뜻해서 일어나보니 바로 앞에서 김이 모락 모락 나거든. 옳다 됐다 여그가 죽순이 있을 것 같다 허고 파보니 아니나 다를까 팔뚝만헌 죽순이 나오고 있지 않겄어 천지 신명이 돌봤던 것이제.
그 죽순으로 어메를 살린 것은 물론이제. 병이 낫어 잘 살았다는 이야기여.
아까 죽순이 나온 것이 대밭의 양지바른 두엄을 쌓아두었던 것이더라여.
옛날부터 효자란 범도 안 물어간단 말이 있어.

* 제보 : 김태수, 문흥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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