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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 이인임(李仁任) ① 이인임(李仁任)은 성산군(星山君)
이조년(李兆年)의 손자(孫子)이다. 음서(蔭敍)로 전객 시승(典客寺丞)에 보임(補任)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전법 총랑(典法摠郞)이 되었다.
공민왕(恭愍王) 7년에 좌부승선(左副承宣)을 제배(除拜)하였는데 8년에 홍건적(紅巾賊)이 의주(義州)를 함락하매 왕이 이인임(李仁任)을 명하여
서경 좌무사(西京左撫使)를 삼아 이를 방비케 하였다가 적(賊)이 평정(平定)되매 공(功)을 2등(等)으로 책봉하였다 신우(辛禑)
원년(元年)에 전교령(典校令) 박상충(朴尙衷), 사예(司藝) 정도전(鄭道傳) 등이 재상(宰相)에게 말하기를, "속히
사신(使臣)을 보내 <공민왕의> 상(喪)을 고함이 마땅하다." 하니 이인임(李仁任)이 말하기를, "사람이 모두 두려워하고
꺼리니 누가 가겠는가." 박상충 등이 판종 부사(判宗簿事) 최원(崔源)에게 말하기를, "왕이 시역(弑逆)을 당하였는데
상(喪)을 고하지 않으면 황제(皇帝)가 반드시 의심할 것이다. 만약 혹 죄(罪)를 물으면 일국(一國)이 모두 그 화(禍)를 받을 것이데
재상(宰相)이 그런 생각도 하지 않으니 그대가 사직(社稷)을 위하여 가겠는가" 하니 최원이 말하기를, "사직(社稷)이 진실로 편안하다면
어찌 한 번 죽는 것을 아끼리요" 하는지라 박상충 등이 그것을 이인임(李仁任)에게 고하니 할 수 없이 이를 따랐다. 때에
변보(邊報)가 있었는데 북원(北元)이 장차 군사로써 심왕(瀋王) 왕호(王暠)의 손자(孫子) 탈탈불화(脫脫不花)를 고려왕으로 삼고자 하였으므로
이인임(李仁任)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효사관(孝思館)에 나아가 태조(太祖)의 진영(眞影)에 맹세하기를, "본국(本國)의
무뢰배(無賴輩)들이 심왕(瀋王)의 손자(孫子)를 끼고 북비(北鄙)에 와 있으면서 왕위(王位)를 엿보고 있으니 함께 맹세한 우리들은 모두
죽을힘으로 굳게 막아 사왕(嗣王)을 도와 추대하여 위로 선왕(先王)의 덕(德)에 보답하고 아래로 부모와 처자(妻子)를 보존할 것인 바 이 맹세에
변함이 있으면 오직 국가가 그 죄(罪)를 밝게 다스릴 뿐 아니라 천지(天地), 종사(宗社), 산천(山川)의 신(神)이 반드시 음주(陰誅)를 내릴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 때 김의를 따라 갔던 자가 오매 이인임(李仁任)과 안사기(安師琦)가 그를 후(厚)하게 대접하였으므로
박상충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재상(宰相)이 김의(金義)가 사신 죽인 죄(罪)를 묻지 않고 그 종자(從者)를 후(厚)하게
대우하니 이것으로 안사기가 김의를 사주하여 사신을 죽인 종적이 뚜렷이 나타났으니 바라건대 그 죄(罪)를 밝히소서.???? 하니 때마침
판사(判事) 박사경(朴思敬)이 북원(北元)에서 돌아와 태후(太后)에게 아뢰기를, "납합출(納哈出)이 신(臣)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
재상(宰相)이 김의(金義)를 보내어 청하기를 왕이 훙(薨)하고 후사(後嗣)가 없으므로 심왕(瀋王)을 받들어 임금 삼기를 원한다 하므로
황제(皇帝)가 봉(封)하여 너희 임금으로 삼은 것인데 만약 전왕(前王)의 아들이 있으면 조정(朝廷)이 반드시 심왕(瀋王)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태후(太后)가 이인임(李仁任)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재상(宰相)이 김의(金義)를 보내
원(元)에 간 지가 오래 되었다고 하는데 경(卿)들은 홀로 알지 못하느냐.???? 하고 드디어 박상충의 상소를 도당(都堂)에
내리고 신우(辛禑)가 안사기(安師琦)를 순위부(巡衛府)에 내리니 안사기(安師琦)이 도망하여 인가(人家)에 들어갔으나 쫓는 자가
급(急)하니 안사기(安師琦)이 면(免)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고 있는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렀으므로 곧 이를 베어 머리를 저자에
달았다. "간관(諫官)이 그른 것이니 변백(辨白)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하거늘 드디어 이첨과 전백영을 옥(獄)에 가두고
최영(崔瑩)과 지윤(池奫) 등을 시켜 국문하니 공사(供辭)가 박상충, 전록생(田祿生)에게 관련되므로 최영(崔瑩)이 전녹생,
박상충(朴尙衷)을 매쳐 국문하기를 매우 참혹히 하매 이인임(李仁任)이 말하기를, "이들을 꼭 죽일 것은 없다." 하고 이에 귀양보냈는데
모두 도중에서 죽었다. 이첨과 전백영 및 방순(方旬), 민중행(閔中行), 박상진(朴尙眞)을 곤장 쳐 유배보내고 또
김구용, 이숭인, 정몽주(鄭夢周), 임효선(林孝先), 염정수(廉廷秀), 염흥방(廉興邦), 박형(朴形), 정사도(鄭思道), 이성림(李成林),
윤호(尹虎), 최을의(崔乙義), 조문신(趙文信) 등도 자기를 해치려 꾀하였다고 모두 귀양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