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人] 70년간 연극·영화·TV 누빈 '국민 할머니'
[원로배우 황정순 별세]
14세 때 서울서 '타잔' 보고 배우 결심, 1941년 영화 '그대와 나'로 데뷔
'팔도강산' 등 연극·영화 580편 출연… 배우 첫 '영화인 명예의 전당'에 올라
연기자 양성 위해 장학재단도 설립
"어쩜 저렇게 곱게 늙으셨담?"(KBS 드라마 '보통사람들'에서 황정순을 처음 만난 유지인의 대사)1970~80년대, 그녀는 '국민 할머니'이자 '만인의 어머니'였다. 은발의 쪽머리에 동그란 안경, 늘 한복을 차려 입은 모습이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동네 어른처럼 친근했다. 영화 '팔도강산' 시리즈와 드라마 '보통사람들'에서 소녀처럼 수줍은 표정에 또박또박 차분하게 말하다가도, 때론 대가족의 연장자로서 다 큰 자녀들을 호되게 꾸짖던 웃어른이었다.
원로배우이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인 황정순(黃貞順·89)씨가 지난 17일 오후 별세했다. 2010년과 지난해 9월 지병으로 입원했던 그는 최근 요양병원에 머물다 폐렴이 악화돼 서울성모병원으로 옮겨졌다.
- ▲ 지난 17일 작고한 배우 황정순씨는 자애로운 한국의 어머니상을 연기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2005년 뮤지컬 ‘팔도강산’ 무대에 섰을 때의 모습(사진 위), 1967년 김희갑씨와 함께 출연한 영화 ‘팔도강산’의 한 장면(사진 아래 왼쪽), 1965년 박노식씨와 함께 청룡영화상 조연상을 받을 때의 모습(사진 아래 오른쪽). /허영한 기자
고인은 경기 시흥에서 양반 집안의 10남매 중 막내 외동딸로 태어났다. 영화여자학교에 다니던 1939년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무성영화 '타잔'을 본 것이 배우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됐다. 이듬해인 1940년, 15세로 동양극장 전속극단인 '청춘좌'에 입단해 '순정애보' '호화선' '대지의 어머니' 등의 연극에 출연했다. 하루 4회 무대에 오르고 만주까지 순회공연을 하며 새벽 3시까지 분장을 지우지 못하던 고달픈 초년 생활이었지만, 곧 무르익은 연기로 관객의 심금을 울리며 극단의 스타 배우로 자리매김한다.
1941년 영화 '그대와 나'에서 단역으로 데뷔한 뒤 '철도 이야기'와 '촌색시'에 출연하며 화려한 은막 생활을 시작했다. 1959년 홍성기 감독의 '청춘극장'에 출연했을 때는 개봉관인 국제극장 앞에 관객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뤘고, 팬에게 둘러싸이는 바람에 거리를 걸을 수도 없을 정도의 인기를 누렸다.
196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속 깊고 자애로운 한국의 어머니상을 연기했다. 김수용 감독의 '혈맥'(1963)에서는 억척스러운 어머니 모습을 보였고, 강대진 감독의 '마부'(1961)에선 가족을 보듬는 따뜻한 새어머니의 모습으로 나왔다. 김수용 감독 '굴비'(1963)의 자식에게 홀대받는 어머니, 유현목 감독 '장마'(1979)의 분단의 상처를 지닌 어머니로도 주목받았으며, 이두용 감독 '장남'(1984)에서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우두커니 바라보는 장면으로 산업사회의 그늘에 선 어머니를 연기하기도 했다. TV 시대가 되자 TBC '딸'(1970), KBS '보통사람들'(1982~1984) 등 여러 연속극에도 모습을 보였다.
7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모두 200여편의 연극과 38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주로 서민의 애환을 그린 작품에서 연탄장수의 아내나 콩나물 행상 같은 역을 맡았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출연하고도 남은 변변한 의상이 없었다고 한다.
황씨는 2005년 뮤지컬 '팔도강산'으로 무대에 서면서 "연극에선 프리마돈나였던 내가 영화에선 주로 어머니 역으로 조연을 했지만, 그 덕에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모든 한국인에게 좋은 느낌으로 기억돼 지금까지도 인사를 받는다"고 회고했다. 그는 "배우의 예술이란 자기 자신의 감정을 살필 겨를도 없이 맡은 역의 감정에 깊이 빠져들었을 때 탄생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자애로운 어머니'라는 이미지는 스크린 밖으로도 이어져, 낙도 어린이 자매결연과 양로원·보육원·재소자 위문 등 사회 활동에도 힘썼다. 서울예대에 장학재단을 설립해 후배 연기자 양성에도 기여했다. 최근 배우 한혜진도 자신이 '황정순 장학금'의 수혜자였다고 말했다.
2006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고, 2007년에는 신상옥·유현목 감독에 이어 세 번째로 '영화인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배우로는 처음이다. 제1회 영화평론가협회 여우주연상(1957)과 제1·3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조연상(1963·1965), 대종상 여우조연상(1966), 보관문화훈장(1992) 등을 받았다. 지난해 11월 대종상 공로상을 받을 때는 아픈 몸으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만 반복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유족은 아들 이성규(사업)씨와 딸 이일미자씨.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발인은 20일 오전 9시. (02)2258-5940
'우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버릇 개 주나”라는 속담은-김동길 교수 (0) | 2014.11.04 |
---|---|
노인성 냄새 (0) | 2014.11.04 |
조선닷컴 오피니언 - 기고된 글 (0) | 2014.11.04 |
한국과 일본의 친선을 위해-김동길 교수 (0) | 2014.11.02 |
비관론을 경계한다- 김동길 교수 (0) | 2014.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