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경직 목사·성철스님·김수환 추기경 따라가 보라~ ~
無欲·淸貧·솔선수범·관용의 정답이 거기 담겨
요즘 들어 세간 사람들 밥상머리에 종교 이야기가 올라오는 일이 잦아졌다.
여러 종교의 집안 사정이 걱정스럽다는 투의 이야기다.
그 가운데는 풍설(風說)에 억측(臆測)의 살을 붙인 것도 적지 않다.
이해타산이 얽히고설킨 세속사(世俗事)가 만만치 않은 거라면,
헛짚고 함부로 입방아를 찧을 일만도 아니다.
그래도 그렇지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 사회가 종교에 폐를 끼쳐왔는데,
우리 사회가 종교에 두통거리를 안겨주던 시절, 우리들 마음에 지워지지
세 분은 각기 다른 종교를 떠받치는 기둥이었는데도 그분들을 한데 묶는
휠체어·지팡이·겨울 털모자다. 집도 통장도 남기지 않았다.
성철 스님은 기우고 기워 누더기가 된 두 벌 가사(袈娑)를 세상에 두고 떠났다.
김 추기경님이 지구를 다녀간 물질적 흔적은 신부복과 묵주뿐이다.
얼마 전 추기경님의 또 다른 유품 뒷소식이 신문 모퉁이에 나왔다.
추기경님이 기증한 각막을 이식받고 시력을 되찾은 어느 시골 양반이
그러나 알고 보면 세 분은 엄청난 재산가였다.
각각 어마어마한 유산을 물려주었다.
목사님이 작고한 이후 개신교는 또 한 차례의 중흥기(中興期)를 맞은 듯
성철 스님 열반(涅槃) 뒤 스님의 삶이 알려지면서 불교를 바라보는
추기경님은 생전부터 재산을 물려주기 시작했다.
그가 천주교를 이끌던 시절 신도 수가 가파르게 증가했다.
세상을 떠난 다음 세 분의 향기는 신도의 울타리를 넘어 일반 국민들 사이로
세 분은 예수님의 말씀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했던 분에 그친 게 아니라
예수님과 부처님의 삶을 지금 여기서 그대로 살아보고자 했던 분이었다.
그걸 말이 아니라 온몸으로 보여 주었다.
목사님은 설교 중에 몇 번이고 신도들을 울리고 웃기는
어느 겨울 한 신도가 목사님이 추운 기도실에서 기도하다
감기에 걸릴 걸 염려해 오리털 잠바를 선물했다.
얼마 후 그 신도는 영락교회에서 백병원 쪽으로 굽어지는 길목에
목사님 아들도 같이 목회자(牧會者)의 길을 걸었지만 후계자라는
성철 스님은 늘 신도들의 시주(施主)를 받는 걸 화살을 맞는 것만큼
추기경님이 남긴 인생 덕목(德目)의 하나에 '노점상'이란 항목이 있다.
'노점상에게 물건 살 때 값을 깎지 말라. 그냥 주면 게으름을 키우지만
세 분은 평생 일편단심으로 자신이 믿는 종교의 가르침을 널리 펴고
추기경님은 성철 스님의 부음을 접하고 누구보다 먼저 조전(弔電)을 보냈다.
성철 스님은 여러 종교의 경전에도 두루 관심을 보인 분이었다.
한국 종교계는 복(福)이 많다.
오늘의 문제를 풀기 위해 멀리 밖에 나가 배울 필요가 없다.
고개를 들면 스승의 얼굴이 보이고, 고개를 숙이면 그분들의 생애가 펼쳐져 있다.
생(生)의 심지가 닳고 나서 더 환하게 세상을 비추던 세 분의 발자취를
[ - 출 처 ; 조선일보 강천석 주필님의 글에서 - ]
'우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꼭 하고 싶은 말 한마디-김동길 교수 (0) | 2016.04.12 |
---|---|
지금은 행복 배달중 (0) | 2016.04.04 |
동물의 세계에서 배운다-김동길 교수 (0) | 2016.04.01 |
우리는 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가 (0) | 2016.04.01 |
보행자 사고모음 (0) | 2016.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