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고향(반남박씨)

역대인물: 14세 박정(朴炡)-하석

월명실 2013. 4. 19. 21:06

순번




시호

관직

154

14

정(炡)

대관

하석

충숙

이조참판 금주군
14세 박정(朴炡)

14世 휘 朴炡 1596(선조 29)~1632(인조 10). 소-응천-동선- 정
자는 대관(大觀), 호는 하석(霞石). 좌참찬 동선(東善)의 아들이다.
1619년(광해군 11)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로 보임되었다가 아버지가 폐모론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양사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자, 사직하고 시골에 내려와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靖社)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같은해 홍문관정자?박사를 거쳐 다음해 사간?응교?장령?집의?검상 등을 역임하였다.
1625년(인조 3) 대사헌이 된 남이공(南以恭)을 부응교 유백증(柳伯曾), 교리 나만갑(羅萬甲) 등과 함께 광해군 때에 당파를 만들고 권력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탄핵하였다가, 오히려 함평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626년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다음해 동부승지가 되어 호패법을 강화하자고 주장하였고, 그뒤 대사간?병조참지?병조참의를 지냈다. 이어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으며, 다시 대사간으로부터 붕당을 만들고 자기파를 천거하였다는 이유로 좌천되어 남원부사가 되었다.
그가 남원부사로 임명될 때에 새 수령을 영접하러 나온 아전이 그를 보고는 ????젊은 사람이 말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으며, 오똑하게 단정히 앉아 있어 그 마음속을 알 수 없다.????고 칭찬하였다. 이 당시 그는 관내의 도적을 색출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금주군(錦州君)에 봉하여지고 1631년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이조참판에 특진되었다가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소서파(小西派)의 핵심 인물로 비록 말은 과감하게 한다는 칭찬이 있으나, 급하고 곧은 뜻이 지나쳐 자기 의견만을 주장하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문과방목)
박정(朴炡)
광해군(光海君)11년(1619년), 정시(庭試) 을과
생년(生年) 1596년, 병신
자(字) 대관(大觀)
호(號) 하곡(霞谷) ? 하석(霞石)
본관(本貫) 반남(潘南)
諡號, 封號 충숙,정사공신/금주군(忠肅,靖社功 臣/錦洲君)
부(父) 박동선(朴東善)
조부(祖父) 박응천(朴應川)
증조부(曾祖父) 박소(朴紹)
외조부(外祖父) 청성군 이걸(淸城君 李傑)
처부(妻父) 윤안국(尹安國)
자(子) 박세당(朴世堂)
소과(小科) 1615(을묘) 진사시
특별시(特別試) 병인1626중(丙寅1626重)
전력(前歷) 진사(進士)
관직(官職) 이조/참판&(吏曹/參判&), 옥당&(玉堂&)

광해11(1619) 문과급제
15(1623) 이조반정에 가담하여 장령에추증되고 정사공신에 봉해짐.남원부사로 선정을 베풀어 금주군에 봉해진 뒤 이조참판부제학을 역임

<조선왕조실록>
인조1 3/16 박동선(朴東善)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동선은 타고 난 자질이 부드럽고 후하나 일을 당
해서는 강직하였다. 일찍이 혼탁한 시대에 살면서도 바른 도리를 지키며 흔들리지 않았다. 폐모를 정청하던 날 (下吏)가 그 이름을 (進參)의 대열에 몰래 써 놓았는데, 동선이 그 사실을 알고 즉시 (不參)했다는 것을 스스로 밝히니,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다. 그 아들 박정(朴炡)과 함께 의거의 모의에 참여하였다.
인조1 9/21 박정(朴炡)을 홍문관 정자로,
10/9 박정(朴炡)을 홍문관 박사로
10/18 정사훈(靖社勳)을 감정(勘定)토록 명하여 53명을 녹훈하였 박정(朴炡)?는 3등이다.
10/19 박동선(朴東善)은 의거의 소식을 듣고 강개한 나머지 집 종들을 거느리고 광주(廣州)에서 서울로들어와서 그의
아들 박정과 홍제원에 가서 회동하였습니다만 녹훈에 참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마다 다 녹훈될 수 있겠습니까.
인조 2 2/10 병조참판 沈器遠을 漢南都元帥로 삼았는데, 심기원이 朴炡를 자벽하여 종사관 으로 삼았다.
3/7 박정(朴炡)을 사간(司諫)으로,
3/29 박정(朴炡)을 응교로
4/17 시강관 박정(朴炡)이
5/16 박정(朴炡)을 장령으로 삼았다.
7/8 박정(朴炡)을 집의로
7/29 박정(朴炡)을 응교로,
8/3 박정(朴炡)을 검상(檢詳)으로,
10/13 박정(朴炡)을 집의로 삼았다.
11/16 집의 박정(朴炡),
인조3 1/26 박정(朴炡)을 교리로 삼았다.
인조3 3/11 전라도 암행 어사 박정(朴炡)이
4/24 박정(朴炡)을 의정부 사인으로
4/30 박정을 홍문관 응교로,
5 7/2 승지 박정(朴炡)이 아뢰기를
6 7/11 박정(朴炡)을 대사간으로
7 9/10 박정(朴炡)을 남원 부사로 좌천시켰다. 이는 상이 박정을 (羅萬甲)의 당으로 여긴데다가 남원이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이기 때문에 특별히 임명한 것이었는데, 시론이 박정을 애석하게 여겼다.
9 3/13 박정(朴炡)을 대사간으로
4/30 박정(朴炡)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7/18 박정(朴炡)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10/18 박정(朴炡)을 이조 참판으로,
10 1/19 .박정(朴炡)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정충신(鄭忠信)을 잉임하여 부원수로, 윤선도(尹善道)를
특별히 제수하여 호조정랑으로 삼았는데, 선도가 오랫동안 대군(大君)의 사부(師傅)였기 때문이다.
인조10 6/27 금주군(錦洲君) 박정(朴炡)이 졸(卒)하였다. 박정은 위인이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어 일
찍이 혼조(昏朝) 때에 마음을 굳게 먹고 바른 도리를 지키며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 반정(反正) 때에 정사 공신 (靖社功臣)에 들었고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가 이번에 졸하니 나이가 37세이다. 다만 도량이 적어 사람들이 혹 경시하였다.
인조12 12/22 최명길이 경기의 도둑을 잡는 방법에 대해 아뢰다
지난번 南原에서도 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朴炡이 부사가 되어 70~80인을 적발하여 죽인 덕택
에 남원은 지금까지 무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