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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중가(仲嘉)?중소(仲素). 우의정 은(?)의 손자이며, 부윤(府尹) 훤(萱)의
아들이다. 1457년(세조 3)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고, 내외직을 거쳐 1490년(성종 21)대사헌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동지중추부사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다녀왔다. 1493년에는 형조판서로 正朝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빙자하여 사퇴하였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02년(연산군 8) 삼도입거도순찰사(三道入居都巡察使)가 되었고 1504년 우의정, 2년 뒤에 좌의정이
되었다. 당시는 연산군의 폭정이 절정에 달하여 벼슬을 버리고자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석달 동안 등청하지 않다가 추국(推鞠)을 받은 뒤
면직되었다. 중종반정 후 다시 등용되어 1507년(중종 2)에는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공순(恭順)이다.
박숭질(朴崇質)
世祖2년(1456년), 식년시(式年試) 정과22(丁科22). 자(字)
중소(仲素) . 본관(本貫) 반남(潘南) 부(父)
박훤(朴萱) 조부(祖父) 박은(朴?) 증조부(曾祖父)
박상충(朴尙衷) 외조부(外祖父) 구강(具綱) 처부(妻父)
이서주,정맹손(李敍疇,鄭孟孫) 소과(小科) 1456(병자) 생원시
전력(前歷)
신방생원(新榜生員)
관직(官職) 우의정(右議政)
<조선왕조실록
기록> 세조 9. 7/06 박숭질(朴崇質)?겸 사헌 지평(兼司憲持平)으로 세조 13. 12/12 병조 정랑(兵曹正郞)
박숭질(朴崇質)에게 물었는데, 세조 14 5/26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이훈(李塤)이 배사(拜辭)하였다. 전 좌랑(佐郞)
박숭질(朴崇質)을 김정광(金庭光)을 대신하여 도사(都事)로 삼으니, 당시 김정광은 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로 환차(換差)하여 아직
부임하지 못하였고, 또 법으로 문무(文武)를 교차(交差)함에 당하여, 이훈과 김정광은 모두 문신(文臣)이 아닌 까닭으로 박숭질로써 대신하게
하였다
《 세조 047 부록 / 《세조실록》 편수관 명단 》 성화 5년 기축 4월에 춘추관(春秋館)에서 명(命)을
받아 찬술(撰述)하기 시작하여, 성화 7년 신묘 12월에 끝났습니다. 찬수관(纂修官)【전후(前後)의 관직을 아울러
기록하였다.】 영관사(領館事) 봉정 대부(奉正大夫) 행 세자 시강 문학(行世子侍講文學) 신(臣)
박숭질(朴崇質)
예종 00/09/28(갑신) / 종친과 재추들에게 능침에 적합한 곳을 살펴 정하게 하다 》 여러 종친과
재추가 연희궁(衍禧宮) 뒷산을 보고 와서 아뢰기를, ????쓸 만하나 다만 조금 이로울 뿐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쓸 만한 여러 산을 의논하여 한 곳을 정하라.???? 하였다. 상지관(相地官) 등은 모두 여흥(驪興)
권총(權聰) 부모의 묘자리와 승산(勝山)이 상(上)이고, 가까운 곳을 구한 다면 연희 궁 뒷산만한 곳이 없다고 하였는데,
서거정(徐居正) 등이 말하기를, ????연희궁 뒷산이 과연 좋으나, 조종(祖宗)의 능침(陵寢)을 모두 조금 이로운 곳에 쓰지는
아니하였으니, 정흠지(鄭欽之)와 박은(朴 ?)의 묘자리를 골라서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세종의
5째서자)이 아뢰기를 ????정흠지의 무덤은 나무를 베어서 소통(疏通)하게 하여 다시 보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나무를 벤 뒤에 정승들이 상지관(相地官)을 모두 데리고 다시 살펴 보라.???? 하고, 곧
안효례(安孝禮)와 경기 도사(京畿都事) 박숭질(朴崇質)을 보내어 나무를 베도록 하였다.
예종1 9/18 박숭질(朴崇質)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9/28 장령(掌令) 박숭질(朴崇質)?
성종3 12/09 박숭질(朴崇質)을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사간원 사간(行司諫院司諫)으로, 8 1/26 창원 부사(昌原府使) 박숭질(朴崇質)이
상서(上書)하기를, 8 2/28 대구 부사(大丘府使) 박숭질(朴崇質) 9 5/19 우통례(右通禮)
박숭질(朴崇質) 등 5인이 윤대(輪對)하였다. 14 5/15 행 호군(行護軍) 박숭질(朴崇質)을 도사 선위사(都司宣慰使)로
삼았다. 15 8/06《 한치형?박숭질?김종직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 박숭질(朴崇質)을 통정
대부(通政大夫)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김종직(金宗直)을 통정 대부 도승지(都承旨)로, 16
5/13 정희 왕후 부묘 때의 당상 집례(堂上執禮)이었던 예조 참의 박숭질(朴崇質), 등에게 단자(段子)
견(絹) 각각 한 필을 주었다.
성종16 8/13 박숭질(朴崇質)을 통정 대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9/29 박숭질(朴崇質)을 통정 대부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로 17 1/27 박숭질(朴崇質)을 통정 대부
좌부승지(左副承旨)로, 5/20 박숭질(朴崇質)을 통정 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로,
6/27..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갔다. 도승지(都承旨) 박숭질(朴崇質)이 사헌부(司憲府)의 계본(啓本)을 가지고
아뢰기를, 10/22 도승지(都承旨) 박숭질(朴崇質)이 아뢰기를, 12/22 박숭질(朴崇質)을 가선
대부(嘉善大夫) 행 승정원 도승지(行承政院都承旨)로 삼았다. 성종18 1/25 도승지(都承旨) 박숭질(朴崇質)이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자, 부의(賻儀)로 쌀?콩 각 10석, 진말(眞末) 2석, 기름?꿀 각 1석을 특별히 주었다. 20
3/17 박숭질(朴崇質)을 가선 대부(嘉善大夫)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5/18 박숭질(朴崇質)을 가선 대부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 6/01.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朴崇質?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박숭질에게
이르기를, ????백성의 생활이 기쁘고 슬픔은 수령(守令)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에 달렸으니, 수령이 어리석으면 백성의 생활이 어찌
소생할 수 있겠으며, 풍속이 어찌 순박하고 아름다워질 수 있겠는가? 監司가 된 자는 출척(黜陟)을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없다. 黜陟이 분명하면
수령이 어찌 법을 지키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하니, 박숭질이 대답하기를,????백성을 친애하는 관직은 수령과 같은 것이 없으니, 현부(賢否)를
출척(黜陟)하는 것은 오직 교조(敎條)를 공경히 받들 뿐입니다.????하고는, 인해 아뢰기를, ????신이 근년(近年)에
상(喪)을 당하여 시골에 있으면서 보건대, 어리석은 백성 중에 부모와 서로 힐난(詰難)하는 자도 있고, 형제가 불화한 자도 있는데,
융성(隆盛)한 시기에 이런 풍속이 있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세종조(世宗朝)에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중외(中外)에 반포(頒布)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착한 마음을 일으키게하였습니다. 그런데 관부(官府)에도 오히려 이 책이 없는데, 하물며 민간에서이겠습니까? 신은 생각하건대,
《삼강행실》의 책은 앞에는 모양을 그림으로 그렸고, 뒤에는 사실을 기록하였는데, 만약 이로써 가르치면 풍속을 변경할 수 있고 인심을 고칠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다만 이 글은 한만(汗漫)하여 어리석은 백성이 두루 보기가 어려우니, 그 가운데 절행(節行)이 특이한 것을 골라 간략하게
초출(抄出)하여 박아서 여러 시골에 반포하여 여염(閭閻)의 소민(小民)으로 하여금 두루 알게하면 거의 풍속을 교화하는 데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하였다. 박숭질이
아뢰기를, ????도내(道內)에서 간인(刊印)하기가 매우 어려우니,주자(鑄字)로 인쇄하여 반포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 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임금이 또 문찬(文贊)에게 이르기를, ????만호(萬戶)의 직책은 마땅히
기계(器械)를 엄하게 갖추어서 항상 적(敵)이 이르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 그대의 출신(出身)이
어디인가????? 하니, 문찬이 대답하기를, ????무과(武科)입니다. 신이 일찍이 만호로 있으면서 보건대, 선군(船軍)으로 어떤
사람은무사(武事)에 능하고 어떤 사람은 배를 부리는 데 능한데, 당초에 선군을 나누어붙일 때 한 배에 있는 사람이 모두 활쏘기에는 능하나 배를
부리는 데에는 능하지 못한 자도 있고, 혹은 배를 부리는 데에는 능하나 무사(武事)를 알지 못하는 자도있습니다. 만약 고르게 정하면 적을
방어하는 도리를 얻을 것입니다.????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병조(兵曹)로 하여금 의논해 아뢰게
하라.???? 하였다. 성종21 5/18 박숭질(朴崇質)을 가선 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7/21 박숭질(朴崇質)을 가선 대부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8/20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대사헌(大司憲) 朴崇質이아뢰기를, ????임사홍(任士洪)을 다시 임 용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한데, 이제 관압사(管押使)로
부경(赴京)하게 하시고, 근일에 윤은로(尹殷老)?한건(韓健)이 외척 (外戚)으로서 정권을 잡고 모두 죄를 범하여 폄직(貶職)당하였으나, 그
죄 를 죄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임사홍 을 서용하시니, 치란(治亂)과 興亡의 기틀이 바로 오늘에 있습니다. 청컨대 임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성종21 9/05 박숭질(朴崇質)을 가선 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22 4/13 동지중추부사 박숭질을 성절 사신으로 파견하다
5/09 박숭질(朴崇質)을 가선 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22 9/04 성절사 박숭질이
돌아오다 12/06 박숭질(朴崇質)을 가선 대부(嘉善大夫)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으로, 성종23
2/09 박숭질(朴崇質)을 가선 대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으로, 4/27 박숭질(朴崇質)을 가정 대부(嘉靖大夫)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24 10/6 형조 판서(刑曹判書) 박숭질(朴崇質) 25 7/23 박숭질(朴崇質)을 자헌
대부(資憲大夫)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연산 1 2/11 박숭질(朴崇質)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3/25 박숭질을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2 3/11 박숭질(朴崇質)을 영안도 관찰사(永安道觀察使)로, 3
4/03 박숭질(朴崇質)을 지중추부사 겸 지의금부사(知中樞府事兼知義禁府事)로, 7 6/12 박숭질(朴崇質)을 공조
판서로, 8 11/5 박숭질(朴崇質)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삼았다. 9 3/08 박숭질(朴崇質)을
한성부 판윤(判尹) 7/14 순찰사(巡察使) 박숭질(朴崇質)이 아뢰기를, 10 4/05 박숭질(朴崇質)로
한성부 판윤, 10 4/13 박숭질(朴崇質)로 우의정을 임명하였다. 연산12 7/07 전교하기를, ????좌의정
박숭질(朴崇質)은 병으로 나오지 아니한 지 이제 이미 여섯달이니 그의 마음이반드시 오늘날에 벼슬하지 않으려는 것이리라.
옛적에 거짓 미쳐 종노릇 한자가 있더니만, 숭질이 그것을 본받는 것인가. 병 의 증세를 물어 아뢰라.‘’하였다. 연산12
7/17 전교하기를????좌의정朴崇質이 3월에 말에서 떨어졌는데, 지금 벌써 1백여일이 되었다
중종 1
9/01 박숭질(朴崇質)의 벼슬을 복직시키고, 2 8/09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박숭질(朴崇質)이 병이 위독하다고 하니,
의원을 보내서 떠나지 말고 병을 간호하라.???? 2 8/14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박숭질(朴崇質)이 졸(卒)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박숭질은 본래 청렴하고 간소함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그러나 사민
순찰사(徙民巡察使)가 되어 삼도(三道)를 두루 순력(巡歷)하면서, 뇌물[苞 ]을 함부로받아 재물만 있으면 이주를 면하게 해주었으므로 그 때
사람들이침을 뱉았다. 정승이 되어서는 폐주廢主가 그의 아내를 간음하고 해칠 뜻을 품으니, 박숭질이 기미를 알고 일부러 말에서 다쳐서 마침내
정승의 직을 사면하여 화를 면하고 天壽를 다하게 되었다.】 정원이 아뢰기를,????대신(大臣)이 죽었는데, 전하께서 바야흐로 선릉(宣陵)에
친제(親祭)를 지내려고 치재(致齋) 중이라서 듣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신 등 및 백관이 누가 모르겠 습니까? 이러한 때에 친제를 지내시는 것은
미안한 일인 것 같아 감히 아룁니다.????하니, 전교하기를,????사체(事體)가 이에 이르렀으니 친행(親行)함은 불가하니, 섭행(攝行)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소선(素膳)을 들었다. 정원이 아뢰기를,????대신을 위하여 소찬을 드시는 것[行素]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나 소선을 오래
드실수는 없으니, 청컨대 육선(肉膳)을 드소서.???? 하니, 전교하기를,????처음에는 오랫동안 하고자 했으나 아뢰는 바가 이와 같기 때문에
윤허한다.???? 하고, 쌀?베 등을 부의(賻儀)하도록 명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