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글모음

밤 열한 시

월명실 2019. 4. 8. 21:09

밤 열한 시

 

밤 열한 시

참 좋은 시간이야

오늘 해야 할 일을 할 만큼 했으니

마음을 좀 놓아볼까 하는 시간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나도 못 했으니

밤을 새워볼까도 하는 시간

 

밤 열한 시

어떻게 해야 하나

종일 뒤척거리던 생각들을

차곡차곡 접어 서랍 속에 넣어도 괜찮을 시간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던 마음도

한쪽으로 밀쳐두고

밤 속으로 숨어 들어갈 수 있는 시간

 

밤 열한 시

그래, 그 말은 하지 않길 잘했지,

그래, 그 전화는 걸지 않길 잘했어, 라면서

하지 못한 모든 것들에게

그럴듯한 핑계를 대줄 수 있는 시간

 

밤 열한 시

누군가 불쑥 이유 없는 이유를 대며

조금 덜 외롭게 해줄 수 있느냐고 물어도

이미 늦었다고 대답할 수 있는 시간

누군가에게 불쑥 이유 없는 이유를 대며

조금 덜 외롭게 해줄 수 있느냐고 묻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

 

 

 

 

밤 열한 시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해

어떤 기대를 품어도 괜찮은 시간

일어나지 않은 모든 일들에 대해

그저 포기하기에도 괜찮은 시간

의미를 저울에 달아보거나

마음을 밀치고 지우는 일도

무의미해지는 시간

 

밤 열한 시

내 삶의 얼룩들을 지우개로 지우면

그대로 밤이 될 것도 같은 시간

술을 마시면 취할 것도 같은 시간

너를 부르면 올 것도 같은 시간

그러나 그런대로 참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시간

 

밤 열한 시

하루가 다 지나고

또 다른 하루는 멀리 있는 시간

그리하여

가던 길을 멈추고

생각을 멈추고

모든 걸 멈출 수 있는 시간

 

참 좋은 시간이야

밤 열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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