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고향(반남박씨)

역대인물:21세 박주수(朴周壽)

월명실 2013. 4. 19. 09:00

순번




시호

관직

310

21

주수(周壽)

군여


익헌

병조판서 좌참찬
21세 박주수(朴周壽)

21세 휘 朴周壽 (1787-1836) 1-659 응천-동민-환-세성-태원-弼履-사석-준원-종보-周壽

응천-동민-환-세성-태원-弼履--사석--윤원--종여--운수--제근--정양............
.--준원--수빈박씨
--종경--岐壽
--종보--周壽--齊憲 제寅
박주수(朴周壽)
순조(純祖)7년(1807년), 정시(庭試) 병과2(丙科2)
생년(生年) 1787년, 정미
자(字) 군여(君與)
본관(本貫) 반남(潘南)
거주지(居住地) 경(京)
부(父) 박종보(朴宗輔)
조부(祖父) 박준원(朴準源)
증조부(曾祖父) 박사석(朴師錫)
외조부(外祖父) 서광수(徐廣修)
처부(妻父) 이호민(李好敏)
전력(前歷) 부사용(副司勇)

<한국역사 인물사전>
순조33년3월(1833년) 농수산물의 중간 도매상인 京江商人들이 한강으로 실려오는 江商米를 매점 하고 쌀을 팔지 않아 쌀 값이 폭등했다. 그러자 많은 서울 사람들이 가게를 때겨부수고 불을 지르는 등 큰 소동이 벌어졌다. 이때 피해를 입지 않은 곡물전이 없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군대를 풀어 폭동을 믹았는대 병조판서 박주수는 7명을 목매댤아 죽이고 11명을 지방 군대세 편입사키는 형벌을 주었다, 이사건에 관련된 경강상인들도 형벌을 받았다.
순조때 벼슬에 올라 훈련대장 총융사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諡號 翼獻 좌참찬


순조7(1807) 문과에급제 세자좌부빈객 총융사 등을 역임
순조7 2/10 하교하기를,
????자궁(慈宮)을 승후(承候)할 사람이 없다. 유학(幼學) 박주수(朴周壽)의 초사(初仕)를 구전(口傳)으로 의망(擬望)해 들여 승후하게 하라.???? 하였다.
순조7 5/25 하교하기를,
????세월이 점차 오래 되매 나의 회포도 길고 깊어진다. 이번에 총재(히宰)의 손자가 등제(登第) 하였기에 기쁨과 다행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다. 아깝다 그 미처 보지 못함이여. 슬퍼하고 사모함이 어찌 끝이 있으랴? (朴忠獻公)의 영연(靈筵)에 오늘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할 것인데, 제문은 직접 지어 내리겠다.????
하였다. 박준원(朴準源)의 손자 박주수(朴周壽)가 등제했기 때문이었다.
순조7 8/19 한림(翰林) 도당(都堂)【겸춘추(兼春秋) 이시수(李時秀), 홍문제학(弘文提學) 서영보(徐榮輔), 예문 제학(藝文提學) 조윤대(曹允大),지춘추(知春秋) 한용탁(韓用鐸)?김이익(金履翼) 동춘추(同春秋) 김기상(金箕象)이다.】에서 회권(會圈)하였는데, 5점(點)은 김기은(金箕殷)?정원용(鄭元容)?이영곤(李永昆)?조종진(趙琮鎭)?이희준(李羲準)?조봉진(曹鳳振)?이지연(李止淵)?신재식(申在植)?김학순(金學淳)?박기수(朴綺壽)?이용우(李容愚)?이광문(李光文)?이헌기(李憲琦)?박주수(朴周壽)이다.
순조7 8/23 춘당대에 나아가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행하여 박주수(朴周壽)?정원용(鄭元容)?조봉진(曹鳳振)?이헌기(李
순조9 1/30 홍문록(弘文錄)을 행하였는데,【부제거(副提擧) 이존수(李存秀), 부응교(副應敎) 김노응(金魯應), 부교리(副校理) 박종신(朴宗臣) 수찬(修撰) 신위(申緯)이다.】 3점(點)을 얻은 사람은 박시수(朴蓍壽)?정문시(鄭文始)?홍시제(洪時濟)?민치재(閔致載)?서준보(徐俊輔)?홍명주(洪命周)?김기은(金箕殷)?윤일규(尹日逵)?고정봉(高廷鳳)?김후(金 )조종영(趙鍾永)정조영(鄭祖榮)?홍우섭(洪遇燮)?한용의(韓用儀)?안광우(安光宇)?정원용(鄭元容)?민기세(閔箕世)?정관유(鄭觀綏)?김익현(金益鉉)?이언순(李彦淳)?조종진(趙琮鎭)?조봉진(曹鳳振)이지연(李止淵)?신재업(申在業)?김학순(金學淳)?윤치겸(尹致謙)?박주수(朴周壽)?이헌기(李憲琦)?윤치후(尹致後)?이영석(李永錫)이다.
순조9 5/2 도당 회권(都堂會圈)을 행하였는데【좌의정 김재찬(金載瓚), 우참찬 오재소(吳載紹), 이조 판서 대제학 남공철(南公轍), 이조 참판 김명순(金明淳), 정랑 김병연(金秉淵)이다.】 4점(點)을 얻은 사람은 홍시제(洪時濟)?서준보(徐俊輔)?홍명주(洪命周)?김기은(金箕殷)?윤일규(尹日逵)?김후(金 )?조종영(趙鍾永)?홍우섭(洪遇燮)?정원용(鄭元容)? 정관유(鄭觀綬)이언순(李彦淳)?조종진(趙琮鎭)?조봉진(曹鳳振)?이지연(李止淵)?신재업(申在業)?김학순(金學淳)?이헌기(李憲琦)?박주수(朴周壽)?윤치후(尹致後)?이영석(李永錫)이다.
순조10 4/11 각권(閣圈)을 행하였다.【검교 제학(檢校提學) 김조순(金祖淳)?이만수(李晩秀), 검교 직각(檢校直閣) 홍석주(洪奭周)?이노익(李魯益)이다.】직각(直閣) 4점(點)을맞은 사람은 박주수(朴周壽)?조봉진(曹鳳振)?서준보(徐俊輔)이고, 대교(待敎) 4점을 맞은 사람은 이광문(李光文)?이용수(李龍秀)?홍경모(洪敬謨)이다.한권(翰圈)을 행하였다.【별겸 춘추(別兼春秋) 신재식(申在植)?박주수(朴周壽), 검열 이광문(李光文)이다.】 3점은 이기연(李紀淵)?이용수(李龍秀)? 홍경모(洪敬謨)?박제문(朴齊聞) 김양순(金陽淳)이다.
순조10 4/11 박주수(朴周壽)를 직각으로,
순조12 2/13 박주수(朴周壽)를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삼았다.
순조12 5/1 박종경(朴宗慶)을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박종훈(朴宗薰)을 보덕(輔德)으로,
박주수(朴周壽)를 겸사서(兼司書)로,
순조18 10/4 우승지 박주수(朴周壽)가
순조19 2/7 박주수(朴周壽)를 이조 참의로
순조21 1/12 박주수(朴周壽)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순조21 2/17 부호군 박주수(朴周壽)가 별도로 입직하였다.
이는 가순궁(嘉順宮)의 감기 증세가 오랫 동안 낫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조21 1/1.????하례를 드릴 때에 대거 승지(對擧承旨) 박주수(朴周壽)는 가선 대부를 가자하고,
22 12/26 호조 참판 박주수(朴周壽), 예조 참의 박기수(朴岐壽)와
22..12/26..박종희(朴宗喜)?박주수(朴周壽)?박기수(朴岐壽)?박호수(朴鎬壽)?박운수(朴雲壽))을 종척 집사(宗戚執事)로
순조23 3/2 하현실 명정 서사관(下玄室銘旌書寫官) 박주수(朴周壽),
3/13 ,총융사 金基厚가 사직하니 윤허하고, 특별히 교지를 내려 朴周壽로 대신하게 하였다.
23 9/9 .호군 박주수(朴周壽),
24 4/25 박주수(朴周壽)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27 1/22 박주수(朴周壽)를 이조 참판으로
27 9/10 검거 제조(檢擧提調) 박주수(朴周壽) 박주수에게는 자헌(資憲)을, 가자하였다.
27 9/22 대점하여 박주수(朴周壽)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27 9/27 박주수(朴周壽)를 예조 판서로,
28 1/26 박주수(朴周壽)를 한성부 판윤으로대사성.형.예판.한성판윤.비변사제조.좌빈객.좌참찬
28/3/12 박주수(朴周壽)를 수원부 유수(水原府留守)로 삼았다.
30 4/1 박주수(朴周壽)를 선혜청 제조로 임명하였다.
30 5/6,, 지사(知事) 박주수(朴周壽), 호군 박기수(朴岐壽)?박종희(朴宗喜),
. 한성 판관 朴鎬壽), 사정 박제헌(朴齊憲), 을 종척 집사(宗戚執事)로 임명하였다.
30 5/6 박주수(朴周壽)를 묘소 제조(墓所提調)로 삼고,
30 11/10 박주수(朴周壽)를 비변사 제조로 임명하였다.
31 5/6 박주수(朴周壽)에게 정헌(正憲)의 자급을 더하고, 박제일(朴齊一)에게 가의(嘉義)의 자급을 더하며
31 5/24 관상감 제조 박주수(朴周壽)를 소견하였다
31 12/25 박주수(朴周壽)를 한성부 판윤으로
32 7/11 박주수(朴周壽)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33 6/7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 박주수(朴周壽).
34 9/21 박회수(朴晦壽)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박주수(朴周壽)를 좌빈객으로 삼았다.
11/6 대호군 박주수(朴周壽), 행 호군 朴崎壽), 에게 별입직(別入直)할 것을 명하였다.
11/14 빈전 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에 박주수(朴周壽), 를 차하(差下)하였다.
11/15 빈전향관(嬪殿享官)으로 대호군 박주수(朴周壽), 호군朴岐壽)을 차하(差下)하였다.
헌종1 8/25 행 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박주수(朴周壽)
헌종2 7/5 좌참찬 박주수(朴周壽)가 졸(卒)하였다.
순종4 3/8 죽은 예조 판서(禮曹判書)
박주수(朴周壽)에게 익헌공(翼獻公)이라는 시호를,
박성양(朴性陽)에게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를
박영교(朴泳敎)에게 충목공(忠穆公)이라는 시호를
박원양(朴元陽)에게 정간공(貞簡公)이
죽은 이조 판서 박제인(朴齊寅)에게 정익공(靖翼公)이라는 시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