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8.18 03:03
- 성직자에겐 따끔한 일침
"富者로 사는 수도자 위선이 영혼 상처 입히고 교회 해쳐^ 청빈은 防壁이자 어머니"
- 평신도에겐 따뜻한 칭찬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에게 주님 모셔다드려 깊은 감사"
양(羊)들에겐 한없이 인자한 자부(慈父)이지만 동료·후배 목자(牧者)들에겐 늘 본분을 잊지 말라며 엄격한 사람. 양들의 친구 프란치스코 교황의 '두 얼굴'이다.
늘 유머와 온화한 미소로 사람들을 대하던 그도 성직자와 수도자(修道者) 등 '집안' 사람들에겐 따끔한 일침을 아끼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에서도 이 두 얼굴을 어김없이 드러냈다. 16일 오후 충북 음성 꽃동네에서 연달아 열린 수도자, 평신도와의 만남이 이 두 얼굴을 극명히 대비해서 볼 수 있는 자리였다. 먼저 4000여 수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교황은 '수도자들의 부자화(富者化)'에 대해 질타했다.
"청빈(淸貧) 서원(誓願)을 하지만 부자로 살아가는 봉헌된 사람들의 위선(僞善)이 신자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교회를 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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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들도 환호… 16일 충북 음성 꽃동네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4000여명의 수도자에게 둘러싸여 있다. 교황이 나타나는 곳엔 스마트폰 카메라 부대가 등장한다. /교황방한위원회 제공
교황은 이날 "봉헌 생활에서 청빈은 '방벽(防壁)'이자 '어머니'"라고 말했다. "봉헌 생활을 지켜 주기에 '방벽'이고, 성장하도록 돕고 올바른 길로 이끌기에 '어머니'"라는 것이다. 그는 또 실용적·세속적 사고방식은 "우리의 희망을 인간적인 수단에만 두도록 이끌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고 우리에게 가르치신 청빈의 증거를 파괴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어 "여러분 자신만을 위하여 봉헌 생활을 간직하지 말고 이 나라 곳곳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가 봉헌 생활을 나누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어진 평신도 대표와의 만남에선 "한국 교회는 사제의 수효가 부족하고 모진 박해의 위협이 있었음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교회의 친교 안에서 대대로 보존해 온 평신도들의 신앙을 물려받았다"고 한국 천주교회에서 평신도의 위치를 재확인한 후 "우리 사회의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에게 '위로하는 주님'을 모셔다 드리는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수도자들과의 만남 때와 메시지의 온도는 사뭇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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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입은 마리아와 아기 예수… 16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순교자 124위 시복 미사 중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대 곁에 놓인 ‘한국 사도의 모후상’ 앞에 서 있다. ‘스승 예수의 제자 수녀회’ 한국관구 수녀가 조각한 이 성모상은 복건(幅巾)을 쓴 어린 예수를 세상에 내어주는 인자한 성모 마리아를 한복 차림으로 형상화했다. /AP 뉴시스
교황의 '집안 단속'은 방한 기간 중에만 벌써 두 번째. 첫 번째 '옐로카드'는 방한 첫날인 14일 주교회의를 방문했을 때 꺼내 들었다. 교황은 이날 "영적(靈的) 웰빙에 빠지지 말라"고 성직자들에게 경고했다. 그는 "번영할 때 유혹이 온다"며 "잘사는 교회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가난한 이들이 교회에 들어가는 것이 부끄럽게 만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투는 느리고도 진지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이 가난을 창피하게 여기게 하는 교회. 이것이 바로 번영, 영적 웰빙의 유혹이다. 그러면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될 수 없다. 반대로 부자들을 위한 부자 교회, 중산층을 위한 교회가 된다"고 말했다.
교황은 또 주교들을 향해 "사제들 곁에 있으라"며 "형제가 다른 형제들에게 신앙의 돈독함을 줘야 한다. 사탄의 씨앗을 심지 않도록, 잘사는 사람들을 위한 교회로 남지 않도록"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날 교황의 발언은 한국 천주교보다는 전 세계 천주교를 향한 것이다. 하지만 이날 분위기가 하도 엄중해 교황청 대변인 롬바르디 신부는 별도 브리핑을 통해 "교황의 말씀은 한국 교회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 충고한 것"이라고 밝히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