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지혜

정약용이 뛰 놀던 수종사

월명실 2013. 8. 9. 14:09

 

 

 

                 정약용이 뛰 놀던 수종사

 

 

며칠전 긴 장마가 잠깐 쉬는 틈을 타서, 친구 커플 몇명과 강바람도 쐬고 경치 좋은 곳에서 맛있는 것도 먹을 겸 두물머리를 찾았다. 두물머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합수(合水)하는 곳으로, 북한강은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철원, 화천, 춘천, 가평을 거쳐 흘러오고, 남한강은 태백산 검룡소에서 시작하여 영월, 단양, 제천, 충주를 지나 흘러온다. 이 두 강이 합쳐지는 곳을 두물머리라고 하며 고어로는 아리수 또는 아리물, 아리가락이라고 불렀다 한다.


내가 내려다 본 바다와 강의 절경은, 바다는 남해 금산에서 내려다 본 다도해가 가장 아름다웠고, 강은 팔당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두물머리가 으뜸이라고 품평하고 싶다.

 

연꽃이 만발한 세미원을 감상하고, 두물머리 안으로 들어가니 500년이나 되는 느티나무가 위용을 뽐내고 있는데 ,그 밑둥구리에는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인돌이 있는데 그 의미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북두칠성의 성혈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라고 한다.

 

당초 계획은 점심을 먹으며 두물머리에서 강바람이나 쏘일려고 했는데, 여기까지 온 김에 운길산(610m)에 있는 수종사에 가 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수종사에 올라가는 길은 만만치가 않았다. 길이 가파르고 좁아서 운전에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않되었다.

 

일주문까지 길이 나있긴하지만 주차할 곳이 협소하다 하여 중간 공간에 차를 주차시키고 걸어 올라갔다. 보행으로 올라가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 날씨는 덥고 길은 가파라서 왠만한 등산 만큼이나 숨을 헐떡였다.

 

전해 오는 수종사(水鍾寺)의 유래는, 세조가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오는 길에 용선(龍船)을 타고 양수만(兩水灣 : 현재 양수리)에서 하룻밤 머물고 있을 때였는데, 밤에 홀연히 어디에선가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다음날 사람을 시켜 그 출처를 찾게 했더니 그곳에는 바위굴이 있었고, 내부에 18나한상이 있었다고 한다. 종소리는 굴속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울려나온 소리로 청아하고도 명정하게 들렸다고 한다. 세조는 그것을 기이하게 여겨 이곳에 축대를 쌓고 장인(匠人)들을 불러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전답을 하사하고 승려를 거처하게 하였으며 절 이름을 수종사라 하였다고 한다.

서거정은 수종사가 “동방 사찰 중 제일의 전망”이라고 극찬하는 시를 남겼다.

경내에 있는 '삼정헌'이라는 찻집에서 창문 밖으로 두물머리를 내다보며 맛 좋은 약수로 끊여내는 공짜 녹차의 맛은 감동적이었다. 비 오는 날에는 희뿌옇게 보이는 강줄기를 내다보는 멋의 운치가 그만이란다.

 

두물머리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운길산을 휘감는 운무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여 이를 즐기려 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고 한다. 비 오는 날에는 희뿌옇게 보이는 강줄기를 내다보는 멋도 운치있고 맑은 날에 북한강과 남한강이 펼쳐 놓는 산수화 같은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

 

수종사에는 세조가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는수령 500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높이 35m, 가슴높이 둘레 6.5m에 이르는 만큼 수많은 가지들이 뻗어있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이 수종사는 정약전 정약종 등 정약용 3형제가 어린 시절 뛰놀던 곳인데 정약용이 18년 유배에서 풀려나 생가에 돌아와 수종사에 올라 가고자 했으나 그때는 이미 다리에 힘이 빠져 꼭대기까지 오르기엔 엄두가 나지 않아 그는 다음과 같은 시로써 진한 아쉬움을 표현했다고 한다.


운길산 수종사
옛날엔 우리집 정원
마음만 내키면 훌쩍가서 절문에 이르렀네
이제 보니 갑자기 높아 주군처럼 뽀죽하니
하늘 높이 치솟아 묘연하여 붙들기 어렵네


정약용 생가에 이르니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8대째 홍문관 벼슬을 지냈고 부친이 진주목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어머니가 윤두서의 손녀라서인지 매우 부유한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집, 여유당은 다산 정약용이 태어난 곳이자, 전라도 강진에서 18년의 긴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머물다가 생을 마감한 곳이다. 정약용은 조선 후기의 대학자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관료였으나, 당파 싸움과 천주교 박해에 의하여 그의 젊은 시절 대부분은 한양에서 수백 리 떨어진 남도 땅, 강진에서 보내게 된다. 18년 유배 생활 동안 그곳에서 학문을 꽃 피우는데, 다산초당에서 주변과 교류하며 쌓은 학문적 업적은 우리 역사에 기록될 일이다.


다산 정약용하면 너무 유명한 인물이기에 그에 대한 언급은 생략하고 다만 한가지 소회를 밝히고자 한다.

역사에 가정은 한낮 실없는 꿈이지만 정조가 좀더 오래 살았더라면 정약용을 위시한 실학파를 중용하여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을 것이다.

 

조선조의 근간을 이루었던 성리학은 민생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고 지배계급의 상하적 신분관계 확립에 집착하고 허례허식인 관혼상제에 매달리고 남녀차별을 심하게 하였으며 천주교 등 신문물을 받아 들이는데 극도로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실학은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로 만들고자 한 학문으로 천주교를 발판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만약 그때 천주교를 박해하지 아니하고 개혁을 하였더라면 우리나라는 우물안의 개구리에서 벗어나 조선말기 고종 때 열강의 각축장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일본에 침략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민족의 대비극인 남북분단의 참화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조에 실학이 막 싹 틀려고 한지 비슷한 시기에 일본은 명치유신을 통하여 불과 100여년 사이에 세계강국이 되지 아니 하였는가.

 

나는 정조가 조선의 마지막 왕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조선 왕조에서 세종대왕 다음으로 업적을 남긴 22대왕 정조가 1800년 48세 나이로 붕어한 이후에는 王權은 소멸하고 臣權이 나라를 지배하였다. 안동김씨 60년 세도정치에 사실상 王朝는 무너진 것이다.


정조의 아들인 순조가 11세의 나이에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장인인 김조순 일당인 안동 김씨 일문이 세도정치의 길을 열었으며, 순조가 붕어하자 헌종이 8세의 나이에 등극을 하고였다.

헌종서거하자 강화도에서 나무꾼이나 하던 정조의 이복동생 은원군의 손자를 왕에 옹립하였다. 이가 16세의 철종인데 그는 헌종의 7촌 아저씨 뻘 되는데 조선조에서 항열이 위인 사람이 왕이 된 예는 세조 밖에 없다. 세조는 조카인 단종을 억지로 끌어 내리고 스스로 왕이 된 경우고, 철종은 안동김씨가 세도정치를 하기 위한 희대의 꼼수이었다.


더 可觀인 것은 26대왕 고종인데, 그는 16대왕 인조(1596~1649)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인 은신군(사도세자인 장조의 둘째 아들)의 3대손(족보상으로는 영조의 고고손자)으로 헌종의 어머니인 대왕대비 조씨와 고종의 아버지인 이하응이 결탁하여 안동김씨를 조정에서 내쫓기 위한 음모의 작품이였다. 고종을 조대비의 큰 아들 익종(등극 전에 죽은 효명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켜 24대 헌종의 형님으로 만든 것이다.


이와같이 정조 이후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 등 5명의 왕은 한결같이 10살을 전후한 어린 왕들로 사리분별 능력조차 없어 수렴정청을 하였는데, 그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외척이나 아버지 또는 왕비 그리고 일제가 왕 노릇을 했기 때문에 5명의 왕은 사실상 왕이 아니고 이름뿐인 허수아비 왕이었던 것이다. 조선조 말은 이렇게 나라 돌아가는 꼴이 엉망진창이었다.

정조 이후는 계속 자손이 귀해 정조는 아들을 둘을 두었으나 첫째는 일찍 죽었고, 순조도 아들(효명세자 후에 익종) 하나를 두었는데 이나마 일찍 죽어 효명세자의 하나뿐인 아들(순조의 손자)이 왕위를 이었는데 여기서 代가 끊겼다. 철종은 헌종의 7촌 아저씨 뻘 되니까 그렇다손 치더라도 고종은 말도 안되는 혈통이었다.

일반 개인 집에서도 자손이 귀하면 가세가 기울기 마련인데 이런 현상이 100년 간 이어진다는 것은 國運이 다 했다는 얘기다.

따라서 정조 이후는 나라가 아니였고 易姓革命이 일어나 새 하늘을 열었어야 했다. 기회는 있었다. 김옥균, 박영효 등이 주도한 갑신정변(1884, 고종21)과 1894(고종31)에 있었던 갑오경장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최초의 근대화운동으로 성리학의 기본이념을 타파하여, 신분차별 없이 관리를 뽐고, 양반과 상민의 신분차별을 없애며 과부의 재혼을 허용하자는 것 등이다.

성리학이 도입되기 전인 고려 무신시대 도방의 영수 최우와 기생 간에 출생한 최항이 도방을 세습했으며, 김준은 노비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최고위관직에 올라 4대 도방의 영수 최의를 죽이고, 60년 최씨 무신정치를 끝내고 도방을 철폐하여 왕권을 회복 시켜주고 자신은 10년간 권력을 장악했다.

세계역사를 보면 고비고비 마다 혁명이 일어나 사회발전에 기여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영국의 명예혁명, 프랑스대혁명, 러시아의 볼세비키혁명 등을 들 수 있겠다. 1800년대는 세계가 역동하던 시기였다. 산업혁명, 프랑스대혁명, 일본의 명치유신 등 세계가 꿈틀대고 있었는데, 우리나라는 성리학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정약용 등 실학파가 힘을 쓰지 못했다.

 

인재는 있었는데 사회체제가 워낙 봉건적이어서 이를 깨트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160년이 흘러 1960년대에 우리나라는 대약진의 시동을 걸어, 50년의 역동적 세월을 거치면서 세계에 우뚝 섰으니 역사는 한민족을 버리지 않았다.

                                                                                                淸閑 執筆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