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효동의 지명유래
[충효동 - 지명유래]
유래

충효동 전경
충효동은 무등산 북쪽 자락에 안겨 있다. 본래 광주군(光州郡) 석저면(石底面) 지역으로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형이 성안처럼 되어 있어
‘성안’ 또는 ‘성내’(城內) 마을로 불리다가 조선 정조때 김덕령 장군이 태어나 자란 곳이라 하여 충효리라는 마을 이름이 하사(下賜)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평무리(平茂里), 북촌리(北村里)와 평촌리(坪村里), 당촌리(唐村里)의 각 일부와 창평군(昌平郡)
내남면(內南面)의 반석리(盤石里) 지곡(芝谷)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충효리(忠孝里)라 해서 석곡면(石谷面)에 편입되었다가 1955년에는 담양군
남면(南面)에 편입되었다. 1957년에 광주시에 편입되어 리(里)를 동(洞)으로 고치고 그해 12월에 동(洞)제 실시에 따라 덕의(德義),
충효(忠孝), 금곡(金谷)의 3동을 합하여 충효동의 관할이었다가 1998년에 석곡동 관할이 되었다.
충효마을의 성촌 시기는
450여 년 전이다. 대부분의 주민이 충장공(忠壯公)의 후손들인 광산김씨(光山金氏)여서 마을 입구의 충장공 비각(碑閣)과 취가정(醉歌亭) 등
충장공과 관련된 유적이 잘 관리되고 있다.
평촌마을은 닭뫼(鷄山), 동림(東林), 버성골(우성), 담안(潭安), 평모 등 다섯
마을이 모여 이루어졌으며, 닭뫼만 좀 떨어져 있고 버성골과 동림은 이웃하여 있으며, 담안은 금곡에서 흐르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있다.
충효동은 서석대와 꼬막재 밑에서 발원한 창계 증암천을 따라 터를 잡은 산동네로 충(忠)·효(孝)·덕(德)의 문인들이 살아왔다. 풍수지리상
매화낙지형, 천자봉지형, 옥토망월형 등 명당이 모여 있다.
한적한 시골이던 이곳은 1972년 도립공원 지정과 함께 1984년 광주호에
이르는 길까지 포장되었으며, 경치가 좋아 광주 시민이 쉽게 찾을 수 있는 휴식처가 되었다
소지명
- 개머리(= 수리(水里), 술리(戌里)) : 성안 서쪽 냇가에 있는 마을.
- 계산(鷄山) : 닥메.
- 닥메(=닭메) : 계산 밑에 있는 마을.
- 버성골 (= 버성굴, 우성동(友聲洞)) : 닥메 남쪽에 있는 마을.
- 북촌(北村) : 충효리비 북쪽에 있는 마을.
- 성내(城內 = 성안) : 충효동
- 성촌(城村) : 충효동.
- 환벽(環碧) : 북촌 동남쪽에 있는 마을. 환벽당(環碧堂)이 있음.
[충효동 - 유물유적]
고분
1) 충효동 고분 : 충효동에서 담양 남면 지곡리로 가는 도로가 왼쪽
충효동에서 담양 남면 지곡리로 가는 도로가 왼쪽에 근래에
세워진 듯한 선돌과 함께 고분 1기가 있다. 마을에서는 이 고분을 ‘말무덤’이라 부르며 원래 현재 크기보다 2배 이상 큰 상태였다고 한다.
고분의 주변은 광주호로 유입되는 개천이 흐르고 동남-북서쪽은 마을의 논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동북으로 주위 300m 거리에는 충효동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고 마을 뒤편을 감싸고서 토석혼축(土石混築)의 성곽(城郭)이 둘러져 있다. 고분의 봉토(封土) 동남쪽 하단은 길이 4m
정도의 2단기석을 두르고 있으며 남동쪽은 논두렁과 잇대어져 있는데 여기에서 경질(軟質)의 무문토기편(無文土器片) 2점이 수습(收拾)되었다.
고분의 크기는 둘레 17.8m, 남북장축 4.7m, 높이 2.6m이다.
한편 성안마을의 좌측 구릉지대의 능선에서도 고분이 있었다고 전하나
개간을 통해 없어졌고 당시의 석실 내의 흙을 그대로 파내어 옮겨놓은 지점에서 확인할 수 있는 황갈색 연질 토기로 제작된 부장용 항아리
편(片)들이 다수 수습되었다.
☞ 교통편
28번과 125번 시내버스, 225번 담양 군내버스
비각

<충효동 정려비각>
* 충효동 정려비각 : 충효동 449번지, 시기념물 제4호
충효동 정려비각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 장군 일가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광주광역시 지방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각 내에는 정조가 김덕령 장군과 금산에서 전사한 그의 형
덕홍, 왜병에게 굴하지 않고 순절한 그의 처 흥양이씨, 노모에게 효성이 지극했던 아우 덕보의 충·효·열을 표창하기 위해 마을 이름을 충효리로
사명한 표리비(表里碑)가 있다. 비의 앞면에는 <조선국 증좌차성 충장공 김덕령 증정경부인 흥양이씨 충효지리(朝鮮國 贈左贊成 忠壯公 金德齡
贈貞敬夫人 興陽李氏 忠孝之里)>라고 씌여져 있으며 비의 뒷면에는 서유린(徐有隣)이 찬하고 전라도 관찰사 서용보가 쓴 음기(陰記)가 있다.
비각 안 오른편에는 ‘충효리비각상량문(1792년, 宋欽撰書)’과 ‘충효리비각중수기(1828년, 전라관찰사 李憲球識)’ 등의 현판이 걸려
있다.
김덕령(金德齡)장군은 광주군 성안마을에서 1567년 광산 김씨 김봉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자는 경수(景樹), 시호는
충장(忠壯)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어려서부터 용력이 뛰어났으며 우계 성혼(友溪 成渾)에게서 글을 배웠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
부사 이경린(李景隣), 장성 현감 이귀(李貴)의 천거로 종군(從軍)의 명령을 받고 익호장군(翼虎將軍)의 호를 받았다. 형 덕룡이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자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수습하여 남원에서 훈련을 마친 뒤 선전관에 임명되어 권율 휘하에서 왜병의 호남 진출을 막는데 힘썼고
1594년에는 진해, 고성에 상륙하는 적을 기습 격퇴하였다. 1596년에 도체찰사(都體察使) 윤근수(尹根壽)의 노복(奴僕) 하나가 상전의 권세를
믿고 군율을 어기므로 장살(仗殺)하여 한때 의금부에 수감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신들과의 사이에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충청도에서 일어난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한 장군은 난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도중에 회군했다. 그런데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모함을 받고 체포되어 국문(鞠問) 도중 옥사했다. 그때 그의 나이 29세였다. 1661년 신원(伸寃)되어 관직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 1681년 병조판서, 1788년 의정부 좌찬성에 가증되고 충장의 시호를 받았다.
정유재란때 왜병이 침공해오자
추월산에 피신 중 적의 추격을 받고 순절한 흥양이씨(興陽李氏 : ?~1597년)는 김덕령 장군의 부인으로 후에 정경부인으로
추증되었다.
김덕홍(金德弘 : 1558~1592년)은 김덕령 장군의 형이며 호는 성암이다. 우계 성혼의 문인이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고경명 휘하에서 의주 행재소로 가던 중 금산에서 왜병들과 만나 싸우다 전사했다.
김덕보(金德普 : 1571~1625년)는 김덕령 장군의
아우이며 자는 자용, 호는 풍암이다. 효성이 지극했으며 김덕령 장군이 비명횡사한 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풍암정을 짓고 독서로 일생을 보냈다.
그리하여 인조 때 여러 번 불렀으나 두문불출 은거 생활에 들어갔다. 우산 안방준과 친교가 있었으며 정조 을사년(1785년)에 집의(執義)에
추증(追贈)되었다.
☞ 교통편 : 28번 시내버스
선돌
* 선돌 (立石)
◈ 성내마을 선돌
성내마을 선돌은 1978년 전남대학교에서 충효동에 분포되어 있는 선사 유적인 고인돌
7기 중에서 6기를 발굴하면서 주변의 선돌도 조사되어 소개되었다. 선돌은 충효동 고인돌 7호로부터 동쪽으로 300m 거리쯤 되는 광주호 끝부분에
높이 1m의 조그마한 구릉 위에 있으며 규모는 높이 2.3m, 폭 1m, 두께 30~40cm의 크기이다.
선돌의 형태는 끝부분이 뾰족하게
생겼으나 전체적으로는 마치 불상의 보주형광배(寶珠形光背)와 같은 형태를 보이며 방향은 정남향을 취하고 있다. 주변에는 최근의 도기편이 다량으로
발견되고 있어 근래까지도 민간신앙의 대상으로서 치성(致誠)을 다하였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선돌의 기능은 지역에 따라 다양하나 이곳
선돌은 묘표(墓標)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 영광군 남면 신암리 선돌이나, 완도군 청산도 읍리, 구례군 토지면 금내리, 영암 금정면 입석리의 예와
유사한 위치에 세워져 있다
☞ 교통편 28번과 125번 시내버스, 225번 담양 군내버스
성지
2) 충효동 성지 : 충효동 성안마을
충효동 성지는 충효마을을 둘러 안고 있는 능선에 반월형의 형태로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은 무등산에서 북쪽으로 뻗은 지맥이 광주호에 이르러 멈추어지는 곳에 반월형의 지형을 이루면서 그 안에 형성되어 있다. 북쪽은 담양군 남면
지곡리와 계곡을 경계로 하고 있고, 서쪽에는 광주호에 인접하고 있으며 서남쪽에들을 건너 수리마을이 있고 동남쪽에는 충효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북위 35°11″, 동경 127°01″에 위치하고 지형으로 보면 동남북이 능선으로 둘러있어 반월형으로 서편이 터져 있다. 따라서
성의 형태도 반월성에 해당이 된다.
이 성은 냇가의 자연석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보면 무진고성의 석재와는 전혀 다른
형태임을 알 수 있다. 내외 측을 돌로쌓아 가운데 흙을 채우는 협축방법을 사용한 듯 하다. 즉 성기(城基)로 기초석을 돌리고 석심(石心)으로 몇
단 석축한 후 흙과 돌을 적절히 혼합하여 축조하였다. 그리고 성벽도 자연 구릉을 적절히 이용했기 때문에 성벽 축조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성벽이 완전하게 남아있는 곳은 없으나 선돌과 주초(기단)석, 당시의 건물지에서 사용했던 와편 등이 다수
발견되고 있으며 훼손이 심하게 되어있다. 성지는 마을 앞 당산나무가 있는 곳부터 남쪽으로 능선을 따라 지금은 밭두렁으로 남아 있으며 이는 계속
연결되어 충효 초등학교 뒤 능선으로 이어져서 동쪽으로 돌아서 대밭 울타리를 따라 연결되어 있다. 이 대밭 울타리 중간 중간에 축성 형태가 완연히
남아있다. 대밭 울타리를 지나 환벽마을 남쪽 언덕을 지나 환벽당 뒤편까지 연결되어 산을 넘어 석곡동사무소 위쪽 대밭까지 성터가 있으나, 마을
입구 당산나무에서부터 김덕령 장군의 옛 집터까지의 마을 어귀에는 성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현재의 형태는 반월성의 형태로
남아 있으나 옛날에 이곳을 연결하고 있는 성문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성 길이는 1km 내외, 높이 4.5m, 폭 2~3m정도이며 그
기능은 환벽당과의 관련성보다도 주민들을 보호하던 성곽이 아닌가 생각된다.
☞ 교통편 : 시내버스 28번
노거수

<충효동 왕버들>
* 충효동 왕버들 : 충효동 1021번지, 기념물 16호, 수령 410년
1989년 3월 20일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된
충효동 왕버들은 석곡동사무소와 정려각(旌閭閣)앞에 위치해 있다. 충장공 김덕령의 출생지이고 곁에 있는 환벽당이 1500년대에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가 지었다는 것을 보면 그 이후에 왕버들나무가 심어졌던 것으로 수령은 지금부터 약 400년 전으로
보인다.
왕버들나무는 버들과에 딸린 갈잎 큰키나무이며, 학명은 Salix glandulosa var. glabra이다. 암수 나무가
딴 그루를 이루며 4월에 꽃이 피고 열매는 삭과(?果)로서 5월에 익는다. 우리 나라 경기도 이남 지역과 일본 중부 이남, 중국 중부에 분포하여
풍치목과 정자목으로 사랑을 받는다. 목재는 가구와 땔감 따위로 쓰이는데 물가와 들에서 자란다. 장성의 왕버들나무와 경북 월성군 외동면의
왕버들나무는 천연기념물로서 보호되고 있다.
충효동의 왕버들에 대해서 어느 때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마을 주민들이
일송일매오류(一松一梅五柳)라 하여 이 마을의 상징조경수(象徵造景樹)가 되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중 매화 1그루와 왕버들 1그루는
고사(枯死)하고, 왕버들 1그루는 도로를 확장 포장할 때에 소나무 1그루와 함께 잘려버려 지금은 왕버들 3그루만이 남아 있다. 그래서 주민들은
다시 왕버들 2그루를 보식했고 소나무와 매화도 보식할 계획이다. 이 왕버들나무는 광주 근교에서는 보기 드문 거목으로 충효동 마을의 오랜 역사와
함께 무등산 부근의 유적지와 광주호의 아름다움이 어우러져 한층 운치를 더해 준다.
크기는
樹高 9m, 胸高둘레 6.25m,
樹冠幅 11.5×18.9m
樹高 10m, 胸高둘레 5.95m, 樹冠幅 14.0×14.0m
樹高 12m, 胸高둘레 6.3m, 樹冠幅
16.6×27.0m 이다.
☞ 교통편 28번과 125번 시내버스, 225번 담양 군내버스
사당

<충효동 환벽당>
6. 환벽당(環碧堂) : 충효동 산 36번지, 1546년경, 지방기념물 1호
환벽당(環碧堂)은 지방기념물 제1호로 광주호의
상류 증암천의 언덕 위에 높다랗게 자리잡고 있다. 환벽당을 창건한 김윤제(1501~1572년)는 자(字)는 공로(恭老), 호가 사촌(沙村)이며
충효리에서 태어났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교리를 거쳐 나주 목사로 있다가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인 충효리로 돌아왔다. 환벽당은
그가 집 뒤에 지은 별당으로, 그는 이곳에서 자연을 벗삼아 한가로이 지내며 후진을 키웠다. 그러나 이곳은 송강 정철이 27세로 과거에
급제하기까지 10여 년 동안 머물면서 공부했던 곳으로 더 유명해서 송강정, 식영정과 함께 정송강 유적으로 불린다.
어느 더운
여름날, 김윤제는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다가 집 아래 용소에서 용이 놀고 있는 꿈을 꾸었다. 그가 잠을 깨고 가보니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그 소년이 바로 정철이었다. 그때 정철은 식영정 옆 지실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순천 처가에 가 있는 형 정소를 만나러 가던 길에 용소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었던 것이다.
김윤제는 이런 인연으로 만난 정철을 환벽당에서 지내게 하면서 공부를 시키고 외손녀 사위로 삼았으며, 관계로 나아갈
때까지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 정철은 이곳에서 머물려 기대승, 김인후 등 고명한 학자들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임억령에게서 시를 배웠으며 여러
사람을 사귀었다. 그의 「성산별곡」에는 환벽당 주변의 산수경관이 담겨 있다.
환벽당은 비스듬한 비탈에 자연석 축대를 쌓고 지은
남향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동쪽 2칸은 마루로 되어 있고, 서쪽 2칸이 방이며 그 앞에 반 칸짜리 툇마루가 깔려 있다.
원래는 정각 형태였는데 후대에 중건할 때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집 마루에서는 남쪽의 무등산과 창계천이 잘 내려다보인다.
원래 푸른 대숲에 둘러싸여 있어서 환벽당이라고 했다는데, 지금은 대숲은 없고 집 뒤 비탈과 양쪽 축대 아래의 커다란 배롱나무가 인상적이다. 그
밖에도 집 뒤에는 왕벚나무가 있고, 옆에는 모과나무가 있으며, 또 축대 아래에 느티나무와 벽오동 나무 들이 있다.
축대 아래에는 세 단으로
된 화계(花階)가 있고 그 밑에 네모진 연못이 있다. 그것들은 환벽당 마루에서 직접 바라볼 수 없는 위치에 있고 또 그 아래 넓은 터가 김윤제의
집 본체가 있던 곳이니, 별당인 환벽당의 뜰이 아니라 본채에 딸린 후원의 일부였을 것이다.
한편 환벽당 아래 창계천가에는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김윤제와 그의 손님들이 낚시를 즐겼다는 조대(釣臺)로서, 지금은 그 위에 기념비가 서 있다. 그 옆에는 지금도 늙은 소나무들이
기울어져 있어서 조대쌍송(釣臺雙松)을 노래했던 옛사람들의 흥취를 상기시킨다. 여기에서 건너편을 보면 별뫼 봉우리가 삿갓처럼 볼록하게 보인다.
그리고 조대 앞이 바로 정철이 목욕하다가 김윤제를 만났다는 용소이다.
“환벽당(環碧堂)”이라는 현판의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썼으며, 석천
임억령의 시가 현판에 담겨 있다. 지금은 송강 정철의 후손이 환벽당을 사촌 김윤제의 후손으로부터 사들여 관리하고 있다.
정자
* 취가정(醉歌亭) : 충효동, 1890년, 지방기념물 1호
취가정(醉歌亭)은 충효동 광주호의 곁 산중턱에 소재하고 있다.
환벽당, 식영정, 소쇄원 등과 어울려 옛스런 정취를 자아낸다. 규모는 정면 1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졌고 취가정은 1950년
6.25때 불타버린 것을 김만식의 후손 김희준과 문족들이 1955년에 복건하였다.
취가정은 김덕령의 혼을 위로하고 그를 기리고자 후손인
김만식과 집안사람들이 1890년에 김덕령이 태어나고 자란 이곳에 세운 것으로 정자의 이름은 권필의 꿈에 나타난 충장공의 취시가(醉時歌)에서 따온
것이다.
충장공 김덕령은 무등산 아래 석저촌(북구 충효동)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에 무등산에서 무예를 닦았다. 지금도 무등산
곳곳에는 그와 관련된 전설이 많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되어 고경명, 곽재우 등과 함께 크게 활약했는데 모함을 받고 억울하게
옥사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이 석주(石州) 권필(權?, 1569~1612년)의 꿈속에
나타나 서로 시를 화답하면서 충장공의 원혼을 달래었다는 사연이 있다. 취가정에는 송근수(宋近洙)의 기(記), 김문옥(金文鈺)의 중건기, 김만식의
상량문 및 석주 권필과 충장공의 시가 있다.
고인돌
○ 충효동 고인돌
고인돌은 무등산 북쪽에서 시작하여 담양 남면과 광주 북구의 경계지역을 흐르는 창계천가에 형성된 충적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광주호가 만수위가 되면 고인돌 6기는 물 속에 잠기게 되는데 고인돌 북쪽에는 식영정이 있고 동북쪽으로는 환벽당, 북쪽에는
무등산이 솟아 있다.
고인돌 7기 중에서 1호는 송강의 성산별곡에 언급되고 있는 부엉바위로 덮개돌 위에 노자암이라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동서 장축 방향이며 밑부분에는 길이 40cm 크기의 받침돌 2개가 있다. 당시 주민들의 반대로 발굴은 되지 않았다.
나머지
6기는 1978년 4월 30일부터 5월 9일까지 10일간에 걸쳐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된 바 있다. 고인돌들은 120×15m의 범위 안에
7기가 열을 지어 있으며, 그 중간에서는 2열을 이루고 있다. 발굴된 고인돌 덮개돌은 원 위치에 있으며, 돌방 1기는 전남대학교에 이전 복원되어
있고 여기서 나온 유물은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충효동 고인돌은 7기가 동서로 열을 이루면서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옆에 있는 창계천의 흐름과 같다. 발굴한 6기 모두 받침돌과 돌무지는 보이나 돌방을 덮었던 덮개돌은 없었다. 돌방 벽석은 20cm 내외의 돌들과
부식토 층이 섞여 있어 뚜렷한 것은 1기도 없다. 돌방의 형태나 크기들도 서로 달라 어떤 규칙적인 면을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특징적인 것은
모두 큰 받침돌 4개 내지 10여 개로 덮개돌을 고이고 있는 점이다. 이는 받침돌이 유행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 이중에는 받침돌
자체가 돌방 벽석을 겸하고 있어 이른바 위석형 돌방의 존재가 확인된 점이다.
출토유물은 민무늬토기 조각과 붉은 간토기 조각, 숫돌
2점과 간 화살촉 뿐이다. 이는 영산강 유역 고인돌의 출토유물과는 통하지만 보성강 유역에서 부장되고 있는 돌칼 등이 1점도 출토되지 않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충효동 수리고인돌>
○ 수리 고인돌
충효마을에서 금곡동으로 가다보면 길가에 수리 저수지가 있고 그 저수지 옆에 고인돌 1기가 있다. 구릉 고개에
있는 고인돌은 저수지 둑에 걸쳐 있으며 덮개돌에는 채석한 흔적이 있다. 덮개돌 밑에는 받침돌 1개가 있으며 다른 한쪽은 땅에 붙어있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300cm, 폭 250cm, 두께 80cm이다.
☞ 교통편
위치 : 28번을 타고 수리정류장에서 내려서
‘덕의제’라는 저수지 부근에 있다.
28번과 125번 시내버스, 225번 담양 군내버스
[충효동 - 민속문화]
당산제
1) 충효 당산제 (忠孝 堂山祭)
충효마을이 생긴 이래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정월 보름에 당산제를 모셔 왔으나, 많은
주민들이 광주 시내로 이주하였고 젊은이들 마저 미신이라 하여 참여하기를 꺼려해 근래에는 구색만 갖추는 정도로 모시고 있다. 당산제를 지내는
목적은 오곡의 풍년과 마을 사람들을 액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인데,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이 영험해서인지 6.25때에도 마을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충효마을에서는 매년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에 당산제를 모시고 있다. 할아버지당산은 마을 입구 모정 곁에 있는 수령
500년 정도의 귀목이였으나 오래 전 벼락을 맞은 후 새로 가지를 친 것이라고 한다. 할머니당산은 광주댐 상류의 서쪽 논가에 무덤처럼 흙을
돋우어 세운 입석과 그 주위의 팽나무 3그루이다.
정월 초사흘부터 초닷새 사이에 열리는 마을 회의에서 제를 지내기로 결정하고 제관 등
집례자들을 뽑는데 제관은 그 해의 운세를 점쳐보고 생기복덕(生氣福德)이 맞는 사람 중 연장자를 우선하여 제관 3인, 축관 1인, 화주 1인,
집사 4인 등으로 구성한다. 당산제를 주관하게 될 제관들이 선정되면 이들은 이때부터 제를 모시기까지 금기사항을 지켜야 하는데 특히 화주는 금기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 궂은 곳을 다니지 않으며 부부가 잠자리를 같이 해서도 안되며, 대·소변을 보면 찬물로 목욕을 해야하기 때문에 심지어 먹는
음식을 줄여서 먹기도 하였다. 그런 까닭에 요즈음은 화주를 맡으려는 주민이 없다.
제의 비용은 마을 공동답(共同畓)이 있어 거기서
수확된 쌀로 충당했으나, 1957년 충효리가 광주시로 편입되면서 공동답을 팔아 마을 공익사업에 사용한 후부터는 ‘지붕머리돈’이라 하여 한 가정에
한 되씩 쌀을 거두어 사용하였다. 이때에도 상을 당했거나 산고가 든 집은 부정하다고 제외시켰다. 6년 전에 당산제를 지낸 후 마당밟기로 거둔
성금을 모아 두었다가 두마지기의 동답(洞畓)을 다시 마련하여 당산제의 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13일이 되면 화주와 집사가 목욕재계를 하고
양동시장에 나가 배석, 시루, 그릇 등 제기와 미역, 김, 가조기, 삼실과 등 제물을 일괄 구입하는데 값은 절대로 깍지 않고 지불한다. 제사에
쓰일 돼지 머리는 동네에서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사용한다.
14일에는 마을 사람들이 각 가정과 마을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며
화주집에서는 제사 음식을 준비한다. 당산제를 정갈하게 모시기 위해 제물 장만에 사용되는 물은 전날 저녁 동네 청년들이 마을 공동우물을 모두
퍼내고 깨끗이 청소하고 난 후 새로 솟아 오른 물을 14일 첫 새벽에 길어다 쓴다. 마을 사람들도 조상들에게 올릴 제사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화주가 물을 길은 후 서로 먼저 퍼가기 위해 일찍부터 줄을 서서 기다린다고 한다. 화주가 제물을 준비할 때는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입은
마스크로 가리며 일체 간을 안하고 맛도 보지 않는다. 또 상에 올릴 떡만큼은 동답에서 수확한 쌀로 만든다.
마을 회의가 끝나면 마을 입구와
당산, 제관, 축관, 화주댁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놓아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는다.
저녁 9시경 할아버지당산 앞마당에 모닥불을 지피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농악대를 구성하며 서로 가락을 맞춰보고 굿을 준비한다. 농악대는 제를 모시기 전에 굿을 치는데 화주댁을 시작으로 마을
공동샘, 할아버지당산, 할머니당산, 충효초등학교를 거친다. 그 동안 마을 사람 중 궂은 일이 없었던 남자들은 흰옷과 흰장갑을 착용하고 화주댁에
모여 제물을 운반하며 당산제 준비를 서두르는데 한 사람이 한가지씩만 운반한다. 충효마을 당산제에서는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에 따로 제를 지내지
않기 때문에 자정 무렵이 되면 농악대가 할머니당산으로 가서 굿을 치고 할머니당산(靈)을 할아버지당산으로 모셔와 함께 제를 모신다. 농악대가
할머니당산(靈)을 할아버지당산으로 모셔오면 운반해 놓은 음식을 진설하고 당산제를 시작한다.
제는
진설-초헌-메올리기-아헌-독축-종헌-헌작-소지-음복-헌식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축문은 예전부터 내려오던 것이 너무 길고 어려워 짧게 줄여서
사용하고 있으며, 소지는 축관이 먼저 마을의 평안을 비는 마을 소지를 드리고 나면 제에 참여한 제관, 농악대, 연장자 순으로 동민 소지를
올린다. 지신을 달래기 위한 헌식은 상에 올렸던 음식을 약간씩 덜고 돼지 머리에 코, 귀, 입술을 떼어내 흰 종이에 싸서 묻는데 짐승들이 파먹지
못하도록 돌로 눌러 놓는다. 이로써 충효 마을 당산제의 모든 절차가 끝나게 된다. 다음날 아침에는 마을 주민 모두가 화주집에 모여 제를 지내고
남은 음식과 마을에서 잡았던 돼지고기를 먹으며 흥을 돋운 후 마당밟기를 한다.
2) 평촌 당산제(平村
堂山祭)
평촌마을은 닭뫼(鷄山), 동림(東林), 버성골(우성), 담안(潭安), 평모 등 다섯 마을이 모여 이루어졌는데 닭뫼만 좀
떨어져 있고 버성골과 동림은 이웃하여 있고, 담안은 금곡에서 흐르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있다. 때문에 당산제도 같이 모시고
있다.
평촌마을은 12당산이 있어 매년 당산제를 지내다가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낭비라 생각되어 해방 이후부터 지내지 않고 있다.
*12당산의 신체와 위치
제1당산-귀목-산 중턱 |
제7당산-팽나무-담안 제8당산-귀목-평모(없어짐) 제9당산-귀목-버성골 제10당산-귀목-닭뫼(불에 타버림) 제11당산-귀목-동림제 12당산-귀목-버성골 |
당산제를 지내면 마을이
귀신이나 질병으로부터 벗어나고 풍년이 들게 된다고 믿었다. 제는 정월 초순에 마을 회의에서 제관, 축관, 화주를 선출하여 음력 정월 14일
초저녁부터 보름달 새벽까지 12당산에 제를 모두 모셨다. 그러나 12당산을 모두 모시기가 매우 힘이 들고 금기사항이 너무 많아 제물(祭物)을
준비하는 화주를 서로 맡지 않으려고 했다. 제를 지내는 비용 또한 많이 들어 약식으로 간단히 지냈다지만 동네답(沓)도 없어서 각 반별로 쌀을
거두어 지내오다가 결국은 너무 낭비다 하여 두 당산(할머니당산, 할아버지당산)에만 해방 전까지 유지되었고 그것도 힘들어 현재는 지내지 않고
있다.
제의 준비과정은 정결하고 정숙하며 금기사항도 많다. 제보자인 정남수 씨의 집이 화주가 되어 제를 지낼 음식을 장만하던 어느
해 어머니 되시는 분이 칼로 손을 베인 일이 있었다. 그 손을 헝겊으로 묶고 춥지만 동네 개울에서 목욕을 하고 한 손으로 음식 장만을 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호랑이가 내려와 집에서 기르던 개 한 마리를 물어 갔는데 이는 제를 지내는 정성이 부족하여 부정을 탔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당산제를 지낼 당시에는 열두 당산 모두에 음식을 차리고 모셨으며, 제물은 닭, 떡, 삼실과, 술 등을 간단히 차렸다.
여기에 쓰였던 닭은 작은 것으로 12마리를 준비하고 떡은 작은 시루를 사용했다. 그리고 제물을 장만할 때는 꼭 동림에 있는 동네 샘만
이용하였다.
제가 끝나면 음복을 하는데 떡은 마을 사람들이 고루 나누어 먹는다. 그 떡을 액막이떡이라 하며 이 떡을 먹으면 부스럼이
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보름달 오전에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마을 사람들이 편을 나누어 줄다리기를 하였으며 아낙들은 그네뛰기도
했다.
전설
1) 금산전설
옛날부터 충효 마을에서 그 앞산인 금산에 보화가 많이 들어 있다는 전설이 있었다. 어느 날 금산 아래에 있는
평촌 마을에 문병식이라는 사람이 금산에 올라갔다. 금산에 올라가니 돌로 된 커다란 문이 있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니 금, 은은 물론 베틀,
물레, 샘, 쌀, 바가지 등이 있었다. 그 비밀을 문씨 일가만 대대로 가르쳐 주어 오래도록 잘 살았다.
그러다가 그 어느 대에 와서
내려오는 비밀을 다른 성씨의 사람에게 가르쳐 주어 버렸다. 그래서 지실 정씨가 그곳에 찾아갔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 후부터 쇠
금(金) 대신 비단 금(錦)자를 써서 금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2) 금산성 전설
옛날 정감록에 광주 목사가 어느 날
무등산에 올라 창평 지실을 내려다보고 저 동네가 어느 동네냐고 물으니 “송강 할아버지가 탄생한 자리 지실이요”하니 “아 그래 저기는 불이
위태롭다. 불에 안 맞을까?”
불을 맞지 않으려면 금산에 있는 성게 바위를 안보이게 성을 쌓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지실 정씨들이
금산에 성을 쌓았다. 그래서 그 성을 금산성이라 했으며 지금도 성곽이 그대로 남아 있다.
3) 충효동
전설목(오류송)
배재의 갈림길에서 무등산 도요지가 있는 금곡리를 지나 약 3㎞ 지점에 위치한 충효동은 담양군 남면 지곡리와 하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마을 앞에는 자그마한 정려각이 서 있으며 이 정려각에는 김덕령 장군이 나고 자란 마을이라 하여 충효리라는 마을
이름을 내린 정조의 윤음이 현판에 담겨져 있고 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이 정려각 5m 앞에는 오류송이 서 있는데 수령 400년을 헤아리는
4그루의 왕버들과 소나무 한 그루가 바로 오류송이다. 이 오류송에는 충장공 6남매가 태어나 기념식수를 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충장공과 그
형제들은 오류송과 함께 자라면서 그 그늘 밑에서 공부도 하고 뛰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나무는 일제 말기 공출미를 싣고 가던
소달구지가 휘어진 소나무 가지를 받아 부러져서 죽고 왕버드나무 4그루만 남아있다.
4) 지실과 정철의 전설
지실은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으로 이름난 곳이며, 송강의 잔뼈가 굵어진 마을로 이 고장 창평의 산수에서 꿈을 키웠다. 정철이 열 살 때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화가 정씨 일가에도 미쳐 매부인 계림군 유가 모함에 죽고 큰형도 귀향 길에 죽었으며 아버지도 귀양살이를 갔다.
지실과 송강의
인연은 이 무렵에 비롯된다. 그가 14세 때의 어느 여름날 때마침 순천의 처가에 몸을 의지하고 있던 형을 찾아가려고 지실을 지나게 되었다.
중앙천 용소 앞에 이르자 송강은 몸을 씻고싶어 목욕을 시작했다. 용소는 지금 충효교의 상류 30m 지점에 있는 깊은 웅덩이로 옛날 이곳에서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그때 바로 그 위 동산에 환벽당을 짖고 사촌 김윤제가 낮잠을 자다가 용소에서 용이 놀고 있는 꿈을 꾸었다.
사촌이 꿈에서 깨어난 뒤 용소를 내려가 보니 미소년 정철이 혼자서 멱을 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눈으로 그가 비범한 기골임을 알고 가까이
불러다가 여러 가지 문답을 하는 사이에 그의 영특함에 놀라 순천으로 가는 것을 만류하고 자기 슬하에서 학문을 닦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