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문화재

운정동의 지명유래

월명실 2013. 6. 15. 09:34

 

[운정동 - 지명유래]

유래

운정동 전경

운정동동전경

운정동(雲亭洞)은 어운(魚雲)과 복정(福亭)의 이름을 따왔으며 특히 운정동의 주룡마을 뒷산은 황룡이 등에 배를 진 황룡부주형(黃龍負舟形)이라는 명당이었다.
본래 광주군 하대곡면(下大谷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어운리(漁雲里), 복정리(福亭里) 일부와 창평 군 선면의 죽월산(竹月山), 재룡동(再龍洞)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운정리라 하여 석곡면에 편입되었다가 1955년 광주시에 편입되고,
957년 동제 실시에 의하여 장운동회의 관할이 되었고, 1998년 9월 21일 석곡동의 관할이 되었다.

소지명

  • 광대-굴 : 정잣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매우 넓다.
  • 나발-등 : 광대굴 남쪽에 있는 등성이. 나발 형국임
  • 니-거리 : 떡다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 네 갈림길이 있음
  • 독와-리 : 안맷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송아지가 누운 형국임.
  • 떡-다리 : 적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 매산-바우(바위) : 용머리에 있는 바위. 앞에 서서 “매산아” 하고 부르면 메아리 친다 함.
  • 멩-골, 맹-동, 어운-리 : 어운
  • 밍-거리(맹골논) : 맹골 동남쪽에 있는 논
  • 배진-바우 : 주룡 동남쪽에 있는 바위. 담양군 고서면과 경계가 됨.근처에 황룡이 배를 진 황룡부주형의 명당이 있다 함.
  • 복정, 복정-리, 복다우 : 중흥동 남쪽에 있는 들, 마을이 있었음
  • 삼각-저수지 : 어운 밑에 있는 못. 삼각산 밑이 됨
  • 새장-터 : 철도너메
  • 새-터 : 연봉정이 서남쪽에 새로 된 마을
  • 어운 : 운정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 요강-배미 : 어운 앞에 있는 논, 요강처럼 오목하게 생겼음
  • 용-머리 : 중흥동 남동쪽에 있는 산. 용머리처럼 되었다 함.
  • 운암-저수지 : 어운 북쪽에 있는 못
  • 장구-배미 : 요강배미 위쪽에 있는 논, 장구처럼 가운데가 잘룩함.
  • 주룡마을, 주룡리 → 중흥등
  • 질맛-골 : 안맷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위쪽 등성이가 질마(길마) 형국임
  • 도-너매(새장터) : 운정동에 있는 들. 1922년 12월에 준공한 광주-담양사이의 철도(2차 대전 때 일본인이 철거) 너머쪽이 됨.
  • 함정-재, 학-령고개 : 어운 동쪽에서 담양군 고서면으로 가는 고개

 

[운정동 - 민속문화]

당산제

1) 주룡 당산제(舟龍 堂山祭)

이 마을의 당산은 마을 뒷산 고개마루에 있는 소나무 3그루로 소나무 2그루는 여자나무라 불리우고 여자나무 사이에 작은 남자나무가 있었으나, 20여 년 전에 고사하고 없다. 당산의 크기는 나무둘레 3m, 나무 높이 15m정도로 2그루가 비슷하며 서로 10m쯤 떨어져 있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모셔온 당산제는 1월 14일 저녁 11시에 모신다.
정월 11~12일에 동네 회의에서 깨끗한 사람으로 유사를 지명한다. 유사에 지명되면 가리는 것도 많고 매일 찬물로 목욕을 해야하는 등
어려움이 많기 때문에 모두들 회피하려 하나 지정되면 어쩔 수 없었다. 변소에 갔다 오면 옷을 갈아입고 매일 밤에는 마을 앞 샘물을 길러 다 찬물로 목욕을 했다.
제비(祭費)는 각 집마다 거두었는데 돈이나 곡식으로 했다. 제기(祭器)는 보관해 두었다가 다시 사용하며 이를 빌려다 사용할 수는 없었다.
제물(祭物)은 유사집에서 준비하는데 깨끗한 이웃들이 도와준다. 금줄, 금토는 일주일 전에 이장이 주도하여 청년들과 함께 마을입구와 당산주변에 한다. 제물(祭物)의 운반은 제관(祭官)들이 지고 들고 당산으로 오르는데 앞에는 횃불로 길을 밝히며 농악대는 뒤를 따른다. 제 (祭)는 방안제사와 유사하다. 제관(祭官)은 두루마기에 유건을 쓰며 소지, 음복은 제관들만 간단히 한다. 헌식(獻食)은 당산 옆에 땅을 파고 돼지 머리, 명태머리, 일부를 떼어 백지에 싸서 묻는다.
제(祭)의 시작과 끝은 나발을 불어 알린다. 굿은 정월 14일 저녁부터 당산에서 당산굿 마을앞 큰 샘에서 샘굿 등의 순서대로 하며 밤중에 끝이 난다.
정월 보름부터 마당밟기를 하는데 원하는 가정에서만 걸궁을 하고 음식, 술 등을 제공받고 쌀이나 돈 등을 형편에 따라 내놓는데 이것들은 모아져 마을자본이 되며 2월 1일에 마을 총회 때 이에 대한 결산을 한다.
이 마을의 당산제는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의 억압에 의하여 사라졌다고도 하고 먹을 것도 부족한 시절이라 당산제를 모실 여력이 없었다고도 한다.
이곳 당산제에는 궂은 곳을 다녀온 사람이 참석하면 몸이 아프거나 사망한다는 전설과 30여 년 전에 이 마을 고씨라는 사람이 당산나무를 꺾어 불을 땠는데 그후부터 아프기 시작해서 사망했다는 전설이 있다.

2) 어운 당산제(魚雲 堂山祭)

어운마을은 5·18 묘역 아랫마을이다. 마을을 낮은 구릉성 산들이 에워싸고 있어 매우 아늑한 편이며 50여 호가 거주하는데 여러 성씨들의 혼성촌이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한다.

당산은 마을의 동쪽 구릉의 능선에 위치하며 당산 밑에는 우산각이 있다. 원래는 4그루의 느티나무가 있어서 할아버지당산이 2그루, 할머 니당산 2그루였으나 지금은 2그루만 남아 있고 그나마 신격(神格)을 구별하지 못한다.
제(祭)는 마을의 안녕과 유사의 소원을 비는데 정월 14일 밤 12시경에 모신다. 그 이유는 부정한 사람이 제 모시는 것을 보면 부정탄다고 믿어서 늦게 제를 지내는 것이다. 정월초에 유사를 뽑으며 손(자식)없는 사람으로 한다. 자식이 없어서 당산신께 공들여 자식을 얻으려는 목 적과 자식이 있으면 청결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제를 모실 때는 유사부부만이 당에 올라 제를 모신다.
제비(祭費)는 집집마다 각출하는데 다른 신을 믿는 자와 상복을 입은 자는 제외시키고 걷었다. 금줄과 금토는 3일 전에 당산과 유사집에서 하였으며 유사는 문밖출입을 금했다. 당산제를 모실 때 사용하는 물은 샘을 품어서 3일 전에 물을 떠다가 그 물로 쌀을 담궈 밥을 짓는다. 제 기(祭器)는 매년 새로 구입하는데 사용 후에는 유사가 가진 점이 특이하다 하겠다.
제물(祭物)로는 시루, 감, 대추, 밤, 명태 등으로 간단하게 하며 헌식(獻食)은 명태 1마리를 그대로 백지에 싸서 놓고 감 1개, 대추 1개, 사과 1개, 밤 1개 등을 주변에 던지고 명태는 그곳에 그대로 둔다.

해방전후에는 매우 궁핍하던 시절이라 간략하게 했다. 제가 끝나면 걸궁을 치는데 걸궁은 당산에 그 시작과 끝을 보고하고 끝을 냈다.
이 마을의 당신(堂神)에는 몇 가지 영험담이 있다. 소도둑이 들었는데 당산할머니 때문에 소를 훔치지 못하고 밤새 당산 주변만 돌다가 날이 밝자 도망갔다고 한다. 또한 당산제를 준비하던 중 남자분이 나무를 무릎으로 꺾다가 무릎을 다쳐 고생하였는데 용한 곳에서 알아보니 당산제를 잘못해서 3년 후에 다시 모셨더니 나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제일(祭日) 밤에 부부관계를 맺다가 안 떨어져서 부엌문으로 들어가 당산할머니께 빌었더니 떨어졌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솟대
장승마을

장승마을

솟대신앙

솟대란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힌 것을 일컫는데 마을의 안녕(安寧), 수호(守護), 풍년(豊年)을 기원하며 마을 입구에 세웠다. 솟대는 홀로 세워지기도 하지만 대부분 장승, 선돌, 탑(돌무더기), 신목 등과 함께 세워져 마을의 하당신(下堂神), 당신(堂神), 주신 (主神)으로 모셔지며 솟대 위의 새는 대개 오리로 만드는데 그밖에 기러기, 따오기, 까치, 갈매기 등으로 만들기도 한다.

◈ 운정동 장승과 솟대 : 운정 2교 복다우 마을 버스 정류장 앞

광주전남 미술인공동체 회원들이 5ㆍ18묘역에서 개최했던 통일미술제 행사 때 묘역 들어가는 굴다리 입구에 의미있는 벽화를 그리면서 아울 러 신앙 대상물인 솟대를 세워 우리의 염원을 잘 나타내고 있다.
새의 모양은 기러기, 갈매기, 따오기, 까치이며 마을 입구에 위치해 있어 5ㆍ18묘역을 향하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도록 되어 사라져가는 우 리 민족의 신앙물인 솟대와 장승이 제 역할을 잘 하고 있다.
현재 5·18묘역 입구 운정 2교에 <천하민족>, <통일인 장군>, <지하오월>, <정신여장군>이라 명문되어진 높이 4.5m 장승 4기와 새 모양 의 솟대 6기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