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전동의 지명유래
[용전동 - 지명유래]
유래

용전동동전경
본래 광주군 우치면(牛峙面)지역으로서 어느 해 홍수가 난 후 물이 흔한 마을이란 뜻으로 낙촌(洛村), 용전(龍田)이라 하게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시변리, 동작리(東作里), 서작리(西作里), 생룡리(生龍里), 지내리(池內里), 신평리(新坪里)의 각 일부와
갑마보면(甲馬保面)의 지산리(芝山里), 대야리(大野里), 삼소지면(三所旨面)의 해산리(海山里), 대치면(大峙面) 응기리(應基里)의 각 일부와
갈전면(葛田面)의 신룡리(新龍里)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용전리라 했고 1957년 광주시에 편입되어 우치동회의 관할이 되었다.
그리고
1998년 9월 21일자로 건국동에 통폐합되었다. 용전동의 용전마을은 마을이 큰 탓에 당산거리, 안애미, 하촌 등으로 구분되고 있다. 이곳은
경지정리가 잘된 넓은 들에서 수도작과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고등 채소를 재배하고 있다.
소지명
- 낙촌 : 용전동
- 다방골 : 용전 동쪽에 있는 마을
- 당산거리 : 당산나무 근처에 있는 마을
- 아래데미 : 하촌(下村)이라고도 하며 용전 북쪽에 있는 마을
- 안애미 : 용전 서쪽, 안쪽에 있는 마을
[용전동 - 민속문화]
당산제
* 용전 당산제
이 마을의 당산은 2군데에 있는데 마을 중앙에 할아버지 당산, 마을 아래쪽에 할머니 당산이 위치하였다.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이곳 당산제는 정월 14일 밤 12시부터 모셨다.
제관(祭冠)의 선정은 정월 초닷세날에 마을회의를 열어 깨끗하고
아들이 많고 학식이 있는 어르신으로 제관과 축관을 정하고 화주는 깨끗한 사람을 뽑는다. 여기서 사용되는 제비(祭費)는 마을 자본에서 나오는
이자로 충당했으며 제물(祭物)은 나물, 돼지머리, 밥, 떡 등을 준비했다. 제상에 올릴 나물에는 간을 하지 않는다.
14일 오전에는 마을
입구와 당산목 주위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길목마다 뿌려 부정의 출입을 막았다. 밤 10시쯤에 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 나발을 불었으며, 제관의
복장은 백색 한복에 도포를 입고 유건을 썼다. 화주집에서 장만한 음식들은 깨끗한 사람들이 당산까지 가지고 가서 진설을 하게 된다. 당산제에
사용된 그릇은 마을제기가 따로 있어 목청에 보관해 두었다가 사용했다. 제상에 올리는 음식 중 돼지머리의 윗턱은 할아버지 당산에, 아래턱은
할머니당산에 진설(陳設)하며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제를 모실 때 농악대도 함께 참여하며 제관, 축관, 화주와 성인남자에 한해서만
참여할 수 있었다. 소지(掃地)는 마을소지, 개인소지 순으로 하며 헌식(獻食)은 할머니 당산에 헌식터가 있어 음식을 조금씩 떼어서 땅에 묻는다.
그리고 참가한 사람 모두가 차려진 음식을 음복하며 당산제가 모두 끝나면 나발을 불어 마을사람들에게 알렸다.
다음날 마을에서는 마당밟기가
시작되는데 동네 공동샘을 시작으로 당산나무를 거쳐 마을로 들어와 집집마다 굿을 친다. 그리고 정월 25일이 되면 이장 선출 및 올해의 품삯을
정하는 마을회의를 연다. 용전의 당산제는 해방직후 소멸되었으며, 일제시대 소작회의 회장에 의해 당산나무가 베어졌다고 한다.
계
광람계(光藍契) : 용전마을 입구
1918년 당시 광주군 우치면장에 재직중이던 범재풍(范在豊, 1885-1944)이
우치·본촌면 일대의 주민 61명을 계원으로 하여 창계하였다. 계원의 거주지를 보면 생룡, 용전, 태령, 수곡, 입암, 회룡, 단지, 거진,
지야, 본촌, 용두, 양지, 일곡 등 광범한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범재풍이 작성한 서문(序文)을 보면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의 향약 4대 덕목 실천이라는 큰 목표아래 계원 상호간 친목도모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특히 광람계라는 명칭을 볼 때, 우리고장
광주에서도 중국의 남전여씨(藍田呂氏) 향약(鄕約)의 전범에 따른 유교적 이상향을 건설해 보고자 하는 바램으로 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광람계는 지금까지도 존속되고 있어 1900년대 초기 계의 형태와 현재의 계를 비교·검토하는데 하나의 좋은 사례가 되고 있다.
창계
당시 계원 자격은 광주군 우치면에 거주하는 20세 이상의 남자였으며, 총 61명이 백미 1말씩을 갹출(醵出)하여 시작하였다. 창계 이후
가입범위가 본촌면까지 확대되었다. 최초의 임원조직은 임기 3년의 계장 1인, 공사원 1인, 유사 1인, 장재(掌財) 겸 집사(執事) 6인으로
되어있는데, 계장은 계무를 총괄하고 공사원은 계장의 보좌역, 유사는 총무역이고 장재 겸 집사는 물자관리와 연락책이었다. 56년 규약 개정시 임원
조직은 계장 1인, 부계장 2인 ,총무 1인, 재무 1인, 간사 약간명(10명당 1인), 감사 2인, 고문 1~2인으로 손질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계장, 부계장, 총무, 재무는 총회에서 선출되고 여타 임원은 계장이 지명 또는 추대한다. 그러나 여느 계와 마찬가지로 계장,
총무, 재무 이외는 명목상 직책에 불과한 실정이다.

용전동 광람계 유적비
광람계 유적비
광람계의 강신일(降神日)은 매년 음력 3월 25일이며 창계 때부터 한해의 강신유사를 연령순 윤번에 따라
10명씩을 선정하여 이들의 공동부담으로 음식을 장만하고, 유사 중 1인의 집 마당이나 인근 마을의 경치좋은 정자, 명소 등에서 계회를 치렀다.
강신총회는 계장 주재로 계칙에 관한 사항, 예산결산 문제, 임원선출, 사업계획 및 실적보고, 표창자 시상, 유사 선정 및 기타 안건을 토의한다.
현재는 계의 활동상이 상당히 미약한 상태이며 강신일이 오면 용전동 인근 식당에 전 계원이 모여 몇 만원씩의 회비를 모아 수계를 한다. 계재는
초기 창계시 백미 1두씩 거둬들인 것을 5할대의 이율로 식리하여 목돈을 만들어서 용전동 405번지에 답 504평을 구입하고 경작료를 받아
운영비로 사용한다.
무엇보다도 광람계 운영의 핵심은 품행 우수자 표창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 내용을 보면 가장 기본적인 조위를 비롯
효행, 열절, 덕행, 우애, 신의, 구휼, 봉양, 장학, 돈행 등 10개 항목으로 도표를 만들어 매년 조위자와 표창자의 인원과 명단을 기록해
나감과 더불어 부조 및 표창을 하였다. 이러한 표창은 물질적인 도움보다는 덕행을 널리 고양시켜 지역민들이 쉽게 본받고 따르도록 하는 의도가
담겨진 것이다. 1958년 이후에도 얼마동안은 몇 개 부문에 국한하여 표창을 해오다가 70년대 이후에는 계원 및 계원가족의 문상하는 일만이
사실상 광람계 사업의 전부가 되다시피 하고 있다.
이상에서 간략히 살펴본 바와 같이 광람계는 향촌민들에게 유교적 교화이념을 구현시키기
위해 당시 광주 우치면장이던 범재풍이 심혈을 기울여 조직, 주도한 전형적인 광역(廣域) 향약계(鄕約契)라고 할 수 있다. 80여 년 전에
설립되어 내외의 갖은 악조건 하에서도 지금까지 지속해 온 점은 놀랍다. 보릿고개가 있었던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쌀 한 두 되는 별 것
아니겠지만 그 당시 최소한의 의식주 해결 자체도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상부상조한 이들의 드넓은 애민애향(愛民愛鄕)정신은 높이 기려야 할
것이다.
광산김씨 대종친계(光山金氏 大宗親契)
광산김씨는 흥광(興光) 신라왕자가 백제시대 광주로 이거하여 터를 잡은 후
대대로 세족이 번영을 누리며 살아온 광주에 본실(本實)을 둔 대표적 성씨의 하나이며 이곳에 정착한 이래 8명의 고려 시대 평장사(平章事)를
배출하여 시조묘를 모신 곳을 평장동이라 한다. 특히 광주의 북부지역인 우치동, 본촌동 지역에 집성촌을 이루며 거주하는 일가들이 많은 관계로 이
지역 종친들만이라도 서로 모여서 선조들의 유지를 받들고 우의를 다지자는 취지 하에 1954년 3월 20일 창계하였다. 여기에는 광산김씨 제종친
193명이 참여한 이래 지금까지 100여명 계원들이 꾸준히 활동해 오고 있다.
계원 자격은 구 지산면(芝山面 : 본촌면과 우치면을
1935년 합친 명칭) 지역에 거주하는 광산김씨 성년 남자이며 직계자녀는 계를 승계할 수 있다. 종친이면 약간의 입계금을 내고 추입이 가능하다.
창계시 입계금은 200환이었으며 현재는 5만원 정도를 내야 한다. 종원으로서 품위를 손상하거나 의무를 다하지 못했을 때는 계원 다수의 발의로
탈계시킬 수 있으며 거주지역을 벗어나면 자동 탈계된다. 이때 기존에 납부했던 계금은 반환하지 않는다.
조직을 보면 계장, 부계장, 총무,
간사로 구성되고 임기는 2년이며 큰 과실이 없는 한 대개 유임되고 있다. 임원선출은 나이가 있고 덕망과 학식이 높은 종원을
지명한다.
강신일은 창계일인 매년 음력 3월 20일이며 그해 계회를 여는 자리에서 다음해 강신장소를 정한다. 계원수가 대규모인 관계로
평장동 시조묘역이나 중시조의 시향산 등 주로 조상묘가 있는 넓은 장소를 택한다. 그 이유는 조상추모의 의미도 클뿐더러 화창한 봄날 야유회
기분까지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사는 윤번제이며 하나의 자연마을에 거주하는 대개 4~7명 정도의 종친계원 전체가 맡게 되는데, 종친계에서
지원하는 벼 2섬 값에다 유사 자신들이 나머지를 부담하여 100여명 분의 점심식사와 음료를 준비한다.
계재(契財)를 보면 초기
200~300환 정도의 계비를 10여년간 모으고 식리하여 1965년 용전동 부근에 400여평(2두락)을 당시 나락 12섬을 주고 매입하였다.
곗답 구입후 계비 갹출을 중지하고 곗답의 선지대로 백미 2섬을 받아 계 운영비용에 충당해 오고 있다. 계원에 대한 물적 부조는 미약한 형편인데
현재는 계원 사망시에만 5만원의 부조금을 지원해주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다만 인근 거주 계원들이 개별적으로 조문하고 조의금을 낸다. 현재
13조에 걸친 규약이 있지만 계의 특성상 규약보다는 계원들 상호간 자발적인 협조와 정신적인 유대로 계를 원만하게 이끌어가고 있다.
산업화
이후 같은 조상을 구심점으로 하는 동족의식이 갈수록 희박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소규모 단위지역 종회로서 지산면(현재 본촌동과 용전동) 광산김씨
대종친계는 아직 100여명의 계원을 두고 건재하고 있다. 농경시대에 나타난 같은 성씨들의 모듬살이(집성촌)가 도시화와 그에 따른 농촌의 분화와
해체로 점차 소멸되어 가고 있다. 본촌동 첨단과학지구 건설로 몇몇 계원은 대대로 내려온 마을과 전답 등 생활의 터전을 잃었으나 아직까지 계활동에
있어서만은 커다란 변동이 없다. 이제 광산김씨 대종친계는 계원부족에 따른 침체를 극복하고 지역 내 종친회관 건립과 후손에 대한 장학사업계획 등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는 중이다.
민속놀이

용전동 용전들노래
"용전 들노래"는 농군들의 피로를 덜고 노동력을 높이기 위해 농사꾼의 필요한 마음의 노래요, 삶의 애환이 담겨있는 옛 조상들의 얼과 흥이
넘치는 농요라 할 수 있다. 들노래란 논이나 밭에서 일하며 부르는 농업노동요를 말한다.
용전 들노래는 60년대 말까지 구전되어 오다가 그
맥이 끊겼다 다시 재현되었다. 용전 들노래가 재현되기까지는 전남 무형문화재 제17호 우도농악 설장고 보유자인 김동언(60) 선생의 자문과 전남대
지춘상 명예교수의 고증, 전통풍물연구회‘한마당’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특히 용전마을의 김기춘(84), 김달중(67)씨가 다시
노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잊혀져간 전통 농요 "용전 들노래"를 재현하기 위해 \'98년부터 1년 여년간 현장을 방문하여 주민들로부터
녹취를 하여 \'99. 6. 23 북구 청소년수련관에서 재현을 하였고 \'99. 7. 12 용전마을 농토현장에서 재현을 하였으며 \'99. 7.
24 구동체육관에서 열린 제1회 광주광역시 민속예술축제에 참가하여 최우수상을 수상 하여 광주광역시 대표로 제40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참가(\'99. 9. 15~9. 17) 하여 전국 21개팀중 종합우수상(국무총리상)을 수상하여 「문화북구」의 위상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용전동 용전들 노래 재현
1)『용전 들노래』가사
▣ 모판 만들기 노래
가. 이오위 소리
나. 오이애 소리
(후렴) 오위에-라 오--위
- 진양조
(1) 우리금주 심은나무 산정승이 물을 주어
(2) 육판서 뻗은 가지 팔도감사 꽃이로다.
(3) 꽃은지고 열매열어
각골수령으로 다나간다.
(후렴) - 늦은 자진모리(반굿거리)
(1) 무등산 상상봉에 감감는 저구름아
(2) 이산정이 어쩌간다
떠날줄을 모르니냐
(3) 아마도 이산정이 신선님들 논곳일세
▣ 모찌기 노래
가. 오애리 소리
(후렴) 오~오 애리
먼-들 - 진양조
(1) 올농사를 잘지어서 선양봉양 하여보세
(2) 이 모를 어서쩌서 저바닥에 심어보세
(3) 모타래 안풀어지게
획돌려 잘들묶세
나. 먼들 소리
(후렴) 오~오 애리 먼-들 - 자진모리
(1) 이 농사가 풍년되야 동지섣달
생일세네(후렴)
(2) 모 찌기일은 멀었는데 한그릇 생각이 웬말인가
(3) 잎 담배를 짝짝찢어 조대통에 붙여보세
▣
모심기 노래 (일명 상사 소리)
(후렴) 여여허루 상사뒤여 - 늦은 중모리
가. 한일자로 늘어서서 입구자로 모럴심세
나. 먼대
사람 듣기좋게 북장구장단에 모럴심세
다. 앞산은 점점 멀어지고 뒷산은 점점 가까오네
(후렴) 여여허루 상사뒤여 - 자진모리
가.
어우러진다 어우러진다 상사소리가 어우러진다.
나. 여기도 심고 저기도 심고 빈털없이 심어보세
다. 이상사가 뉘상산가 김참봉네
상사로세
▣ 논매기 노래
가. 초벌매기 노래
(1) 마뒤여 소리 - 굿거리(풍류)
(가) 어허 불러보세
불러보세(어그럿채)
(나) 육어허 우리네 농군님네 노래나 한자리 불러보세이 어리시구나 아하 마뒤여 마뒤여
(다) 어허 다잘도허시네
다잘도허시어
(2) 지화자 소리
(후렴) 지화자 절시구 - 중중모리
(가) 남원산성 오동목은 장구통으로 다나가고
(나)
문경세제 박달나무 홍두깨방망이로 다나간다.
(다) 순 담양 왕대뿌리 소고채 장구채로 다나가네
나. 한벌매기 노래
(후렴) 아하
하하 떨아지 떨아 - 중중모리
(1) 널치잡고서 떨아지 떨아
(2) 잘도 한다고 떨아지 떨아
(3) 풍년을 맞았고 떨아지
떨아
다. 만드리 노래
(1) 덩실로 소리 - 중중모리
(후렴) 오호~호호 호호 에루 사하아덩실로
(가) 다되야가네
다되야가네 이논글수 다되어가네
(나) 일락서산에 해는지고 월출동령에 달 솟아오네
(다) 여보소 농부님네 갈정막자고
술동이떳네
▣ 장원질 노래(풍장소리)
(1) 에리사소리 - (세마치 장단)
(후렴) 어리사-하하 저리서~~허허
좋네
가. 앞뒤에 가래는 너울너울 춤을추고
나. 머슴은 가래메고 황소 타고
다. 농군은 흥에 겨워 춤을추네
(2) 방개소리
- (세마치 장단)
(후렴) 에헤--애헤 해해애루 어럴럴 거리고 방개등개로 노세
가.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우리님을 따라 나도
나간다
나. 저놈의 큰애기 몸매를 보소
날만 보고서 옆걸음 친다
다. 가는님은 잡지를 마소
갔다가 오면은 더
반갑다네
(3) 아롱소리 - (풍류(길굿))
(후렴) 아롱 다롱 -
가.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나. 삼천리 강산에
풍년이 왔네
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