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문화재

우산동의 지명유래

월명실 2013. 6. 15. 09:08

 

[우산동 - 지명유래]

유래
우산동 전경

우산동동전경

뒷산이 와우(臥牛) 형국으로 되었다 하여 1914년 우산(牛山)리로 하였다. 효죽우체국 서편에 있는 뒷산은 중흥동 동부시장으로 이어지는 쌍봉(雙峯)형태의 능선이다.
우산동은 각화마을에서 흘러온 서방천과 잣고개에서 내려온 두암 시냇물을 받아 농사를 짓고 경양역을 기반으로 한 역촌이었다.
1910년대 담양쪽으로 신작로가 나면서 북동 방면의 관문으로 발전하여 오늘날 동문로를 따라 상가들이 즐비하게 형성되어 있다. 두암천을 경계로 남쪽 소산 언덕배기는 오래된 가옥과 미로형 샛길로 구성되어 있다. 잿모실 너머 섬동들은 택지로 개발되어 신흥 주택지구로 단독주택과 아파트가 건립되고 있다. 담양 사람들이 버스에 싣고 온 채소 보자기가 펼쳐지면서 형성된 말바우 시장은 이곳 주민들의 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한 터가 되고 있다.

소지명
  • 간뎃걸 : 한거리 서남쪽에 있는 마을
  • 괴약걸(= 고야걸, 관앞걸, 관전리) : 잿모실 북쪽에 있는 마을
  • 대가리(大街, 한거리) : 우산동에서 으뜸가는 마을
  • 잿모실(= 치동리) : 한거리 남쪽에 있는 마을

    [우산동 - 유물유적]

    기타

    경양역(景陽驛) 터 : 우산동 383(동문로 57)

    < 경양역 터 >
    현 우산동 383번지 일대에 종6품관인 찰방이 있던 경양역이 있었다고 한다. 이 역은 담양의 덕기역, 화순의 가림, 인물역, 동복의 검부역, 순창의 창신역, 옥과의 대부역 등 여섯 개의 역을 거느렸다. 경양역은 나주가 광주보다 비중이 높았던 고려 때는 나주에 있던 청암역에 속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나주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광주의 경양역은 나주 청암역에 속해 있던 남평의 광리, 봉황의 오림역까지 관할했다. 그러나 중종 5년인 1510년 경양역(9품관)이 찰방역으로 승격되면서 오림과 광리역이 장성으로 옮겨간 청암 찰방역으로 그 관할을 넘겨주었는데 이것은 광주의 경양역은 본디 전주와 장흥을 연결하는 전라도 좌도의 관로를 담당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경양역이 있던 곳은 1789년 정조대왕때 만든 『호구시수(戶口?數)』라는 책에 ‘경양면’이 있었고 10,783명 689가구가 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경양역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이 몰려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성내면인 ‘성안’과는 달리 경양역에 근무하는 육방관속(六房官屬)은 물론 역졸, 장인, 노비들까지도 모두 섞여 살 수 있었던 까닭이다. 비록 6품관인 찰방이 근무하던 역촌이었지만 이곳에는 역사무를 관장하는 이방, 호방, 예방, 병방, 공방, 형방 등 육방관속이 목사고을이나 다름없이 고루 있었다. 문서부발의 ‘승발’, 대동세를 거두는 ‘대동색’이 있는가 하면 찰방을 보좌하는 ‘통인’이 20여명 가량 있었고 경비를 맡는 ‘사령’, 찰방의 경호를 맡는 ‘구종’과 ‘보종’이 있었다. 역도를 순찰하는 ‘포군’과 급한 통문을 전달하던 ‘급주졸’, 귀중품의 수송을 맡던 ‘차인’, 관아의 수직을 맡았던 ‘관직이’ 그밖에 잔심부름을 맡아 일하던 노비만 3백여 명에 달했으므로 큰 동네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만기요람』에 따르면 경양역에 소속된 6개 역을 합한 군졸 수효가 10,797명에 달했고 마필수도 274필에 달했으므로 중심 역인 경양역에 많은 인력이 몰려 살았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경양역의 경우 일제초기의 기록을 보면 1909년 경양역 둔토 소작인은 159명에 달해 이들이 소작인 조합을 결성했었다. 그러나 이 역둔토들은 일제 중기에 모두 개인에게 팔려 오늘날 경양역 주변땅이 광주상고, 교육대학, 동신대학 설립의 근거지가 되었다.
    오늘날 효죽동 우체국이 있는 우산동 333-12번지 일대에는 경양역 비석거리로 길거리에 여섯 기의 찰방비가 서 있었으나, 이곳 길을 트던 20여 년 전 광주공원으로 옮겨 옛 흔적을 더듬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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