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간산기(三南看山記)
삼남간산기(三南看山記)
三南이란 충청도와 경상도, 그리고 전라도를 통 털어 일컫는 말이다. 필자는 한 때 이곳저곳 다니는 것이 취미여서 나라 안 각처를 자주 돌아다녔다. 벌써 오래 전 일이니, 지금과 달라진 곳도 있을 것이나, 옛적 내가 본 대로 그려본다.
1. 자동차 여행의 맛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자동차 여행을 무척 좋아하는 한 언론인이 있었다. 오래 전의 일이어서 지금도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그의 사무실 벽에는 우리나라의 대형 도로교통도가 걸려 있었다. 도로망을 청색(靑色) 단도로 인쇄한 것인데, 상당수의 도로에 빨간 색칠이 되어 있었다. 무어냐고 물었더니, 손수 운전하고 다녀본 적이 있는 도로를 모두 이렇게 표시해 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정색을 하고 살펴보았다. 꾸불꾸불하거나 곧은, 빨간색의 길들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많은 길을 직접 차를 몰고 다니며 탐방을 했다니, 그 무렵의 내 수준으로 보건대 그것은 하나의 경이였다. 이래, 나는 그가 참 부럽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심심할 때면 지도를 들여다보는 습관이 있다. 지도로는 못 가보는 곳이 없는 것이다. 가 볼만한 고적 명소의 위치를 확인도 해보고, 연결된 길이 국도 몇 호선인지, 다음은 어디로 통하는지, 한참 들여다보고 있어도 결코 지루한 줄을 모른다. 짬이 더 있으면 나는 북한의 이곳저곳으로 눈길을 돌리기도 하고, 타국의 지리 풍속에 관한 자료를 뒤져보기도 한다. 중국의 오지 돈황과 이곳의 명소인 ‘막고굴’을 더듬어 보기도 하고, 또 여기서 이어지는 ‘비단길’은 이미 여러 번 따라가 보았기에 그 노상에 있는 천산산맥, 누란, 펫샤와르, 바미얀 등등의 지명은 그다지 낯설지가 않다.
이런저런 형편 탓에 지도만 들여다보고 있던 나에게도 드디어 기회가 왔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생업을 시작하게 되자 내게도 자가용이 생긴 것이다. 나의 발에 드디어 ‘동태'(바퀴의 경상도 사투리)를 달게 된 것이다.
나는 서울에 살면서 연중 적어도 여덟 번 쯤 고향인 밀양과 사형(舍兄)이 계시는 창원을 다녀오게 되어 있다. 고향에는 종중(宗中)의 여러 행사에 참석하러, 그리고 창원에는 제사 등의 일로 내려가야 한다. 나는 이 길을 자동차로 내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대개 아내와 동행한다. 집안 어른한테서 나이도 생각 않고 차를 몰고 먼 길을 다닌다고 걱정도 듣고 있지만, 나대로 따로 생각이 있는 것이다.
나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목적지로 곧장 가는 대신 옆길로 나가 평소 스쳐보고 싶던 길을 달리고, 보고 싶던 곳을 찾는 것이다. 이러기를 한 십년 하고 보니 나의 지도에도 어느덧 빨간 색을 칠한 길들이 도처로 뻗어 있게 되었고, 탐방했던 고적 명소도 일일이 헤아리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나에게 이런 취향이 없었던들, 그리고 천리 밖 고향 길을 자주 오르내릴 일이 없었던들, 서울이 생활터전인 내가 어떻게 완도 장좌리 해변에 서서 청해진 시절, 장보고 장군의 위업을 더듬어 볼 수 있을 것이며,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서서 그 단아한 고건축미를 감상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까?
2. 금산사(金山寺)의 봄
돌이켜 보면, 나의 하행 길은 주로 호남지방을 편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모악산 금산사를 찾아 본 것은 아직도 이상한 감흥으로 남아 있다. 여러 해 전 벚꽃 필 무렵인데, 아내와 막내 이렇게 셋이 전주(全州)를 거쳐 저녁 늦게야 산문에 닿았기에 절 초입의 여인숙에서 일박하고 다음 날 이른 아침 산사에 들어섰다.
넓은 도량에 사람이라고는 우리뿐인지, 다람쥐들이 경내에서 놀고 있고, 때마침 아침 햇살이 퍼지기 시작하는데, 홀연 정면의 대적광전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작지도 크지도 않으며,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으면서 대적광전은 그렇게 단아한 모습을 하고 서 있었다. 그 건물의 아름다움을 글로 어떻게 형용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그 안에는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다섯 불상이 있는데, 일찍이 육당(六堂)은 이 불상을 두고, ‘아마도 조선인의 손으로 되어 조선 안에 있는 종교예술의 현재하는 것 중에 가장 우수한 것일 것’이라고 그의 ‘심춘순례(尋春巡禮)’에서 찬탄한 적이 있다. 이 절은, 후백제의 견훤이 한 때 유폐되어 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금산사 미륵전
오른 편으로 눈을 돌리면 삼층의 미륵전이 장중한 모습으로 서 있는데, 그 안에는 우리나라 미륵신앙의 조종으로 알려져 있는, 금색 찬란한 미륵삼존불 입상이 안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곁 야트막한 언덕 위에는 오층석탑 한 기가 고즈넉하게 서 있다.
그 날 아침 그 절의 분위기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데, 어찌할 거나, 금산사 대적광전이 그로부터 한 달도 아니 되어 화마에 회신(灰燼)되고 말았다는 소식을 접하게 될 줄이야! 나는 가슴에 묻어둔 귀한 보물을 잃어버린 듯, 한동안 망연한 심경을 금할 수 없었다.
(3) 선운사와 송광사
고창 도솔산의 선운사를 찾았던 것은 그 해 가을쯤이었는데, 역시 하행(下行) 때였다. 정읍에서 갈라져 22번 국도를 탔었다. 도솔산의 기암들이 시야에 들어올 무렵 하늘은 이미 황혼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날은 따스한 여관에서 쉬고, 다음 날 새벽 혼자 도솔산 중턱까지 올라갔었다. 단풍이 조금씩 물들고 있었다. 조금 더 올라가면 도솔암 낙조대 등의 명소가 있다고 들었지만, 시간 때문에 단념하고 내려와 절을 구경했다. 추사(秋史)가 썼다는 백파대사 사적비(白坡大師事蹟碑)가 눈길을 끌었다. 아내와 더불어 여인숙에서 맛보았던 복분자술과 절 뒷산의 동백 숲이 기억에 남아 있다.
여행은 다음날 승주의 조계산 송광사를 찾는 데까지 이어졌다. 노정은 고창읍을 경유, 영광, 함평을 거쳐 광주에서 남해고속도로를 타게 되어 있다. 창촌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났는데 절까지 십여 킬로미터는 비포장의 먼짓길이었다. 그러나 강을 끼고 가다가 호수를 만나기도 해 경치는 볼만 했다. 송광사는, 원효대사와 더불어 불교계의 큰 산맥인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중창한 가람이다. 도량이 넓어 여기저기 구경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가 특이했다. 절 앞의 계류에다 화강석 홍교를 걸치고 그 위에 우화각(羽化閣)을 세웠는데 이것이 사찰의 출입문으로 되어 있다. 우화각 바로 곁에는 역시 물 위에 돌기둥을 세워 한 전각을 앉혔는데, 모두 자연을 있는 그대로 활용한 점이 돋보였다. 바로 아래 잔잔한 수면에는 그 무지개다리의 그림자가 투영되고 있고, 그 위에 빨간 단풍잎 몇 점이 떠 있어 한 폭의 선명한 경색을 이루고 있었다.
(4) 다산초당
어느 해 늦은 여름이라 기억하는데, 나는 창원에서 올라오는 길에 전라남도 남녘을 가로지른 적이 있다. 순천에서 고속도로와 작별하고 2번 국도로 들어서서 벌교, 보성, 장흥을 거쳐 강진 땅의 다산초당을 심방했던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를 살던 곳이다.
강진 행은 사실 나의 연래의 숙원이었다. 워낙 길이 멀다보니 이렇듯 늦어지고 만 것이다. 나는 10년 쯤 전에 이미 팔당호반의 능내에 있는 선생의 생가, 여유당과 그 후원의 선생 묘소를 나의 아이들과 함께 한번 참배했었고, 또 그 해 여름 어느 비오는 날, 선친을 모시고 그곳을 찾은 적이 있다. 그 때 어른한테서 다산초당에 관한 말씀을 들었었고, 또 ‘한길사’가 펴낸 <역사기행>에서 이에 관해 읽은 바도 있어 사실 적당한 기회만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강진읍을 지나 국도를 버리고 비포장의 지방도로로 들어섰다. 오후 5시쯤 귤동이란 마을에 닿았다. 산자락 끝에 붙은 한촌(閑村)이다. 타작마당 같은 곳에 차를 세우고 비탈 진 산길을 십여 분 올라가자 소나무 숲 사이로 기와집 처마가 보였다. 지금 건물은 30여 년 전에 새로 지은 것이라는데, 원래 것은 아마도 작은 모옥이었으리라. 앞마당은 좁고 정당 동편에는 그가 손수 팠다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는데, 그 주위는 빈약하나마 뜰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정당 서쪽 뒤켠에는 선생이 휘호했다는 ‘丁石’이란 글자가 음각되어 있는 큼지막한 바위가 마치 초당을 호위라도 하듯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아래에 석간수 샘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기가 곧 다산초당이다. 1801년 그의 나이 갓 마흔일 때 서학과 관련하여 강진으로 유배되었고, 그 후 18년이란 장구한 유배의 세월 중 10년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한다. 일개 범부일망정 어찌 한 점 감상(感傷)이 없겠는가!
세기의 구비물이 격랑 되어 넘쳐옴에
청운의 날개 접어 초당에 앉았는다
밤 밝혀 흐르는 촉루 실학(實學)의 강 이루었네.
능내의 유택에서 한강수 굽어보며
흐르는 강물에서 나라 장래 보셨는지
오늘의 이 풍요는 실학의 소산일세.
그러한 역경에서도 그는 남이 흉내 내지 못할 찬연한 업적을 역사에 남겼다고 한다. 그가 남긴 시편(詩篇)들을 보면 그 시대 농어촌의 피폐상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고, 백성을 향한 연민의 정이 행간마다 스며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한양의 고대광실 속에서는 이토록 사실적인 시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초당을 벗어나 동쪽으로 몇 걸음 나가자 돌연 앞이 확 트이면서 저 아래로 강진만이 시야를 가득 메워온다. 그도 바로 이 자리에 서 계셨으리. 우국애민으로 잠 못 이루는 밤, 앞 바다에 드리운 달그림자와 말없는 대화를 나누시던 선생의 모습을 그려보며, 우리는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계속)